2009년 1월 31일
서울에 갔었다.
어머님이 명절 쇠시러 산골에 오셨다가 가시는 날이고, 아이들도 방학마다 서울에 가서 며칠 보내다 오기때문에 겸사겸사 모두 같이 나섰다.
연례행사대로라면 올 초에 아이들과 귀농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해외여행을 가야 하지만 선우가 이제 고2라서 고등학교 졸업때까지는 잠깐 쉬는 것이 옳다는 가장의 말에 모두 수긍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고2정도 되었으면 마음자세, 정신자세라도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고 덧붙여 주었다. 자상하지도 않은 가장이...
그러니 이번에는 서울행으로 여행을 땡쳐야 한다.
해외여행과 상관없이 방학마다 서울엔 보냈었다.
핏줄들도 만나고 나름대로 가보고 싶은 곳도 경험하고...
산골에서 아침을 손님들과 먹고 손님들이 먼저 떠나시고 우린 집단속과 짐정리를 하고 바로 길을 나섰다.
오랫만에 5식구가 한 차로 이동하다보니 모두가 기분좋아한다.
서울가는 날은 3시 30분에 수원의 아주대병원에서 어머님의 MRI결과를 봐야 했기때문에 아침에 서둘렀었다.
병원에서 결과가 좋게 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본가로 가려고 하는데 초보농사꾼이 병원 대기실의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우린 시누이랑 멀리에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온 초보농사꾼의 얼굴에 그늘이 짙다.
현대자동차 동기란다.
그렇게 착할수가 없는 동기녀석이 회식하고 나오다 잠깐 부딪쳤는데 머리를 다친 모양이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우리가 귀농하고 TV에 나온 것을 보았다며 반갑게 메일을 보내주던 친구였다고...
머리를 다쳐서인지 조금 어눌하고 그렇다고...
나중에 산골에 와서서 또 친구가 걱정되었는지 전화를 해서는 답답할텐데 산골에 며칠 다녀가라고 하니까 지금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수준이라 가기가 어렵다고 하며 웃더란다.
아마도 어느 기능 하나가 고장이 나서 제 구실을 못하는 모양이다.
글과 숫자를 보는 수준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그래도 공기좋은 곳에 다녀가라며 몇번이나 말하고는 힘없이 전화를 끊는 초보농사꾼.
전화를 끊고도 초보농사꾼 마음이 많이 아픈지 서성인다.
무엇이 이리 돌아가는지...
하여간 다시 서울이야기로 돌아가면,,,,
병원을 나와 아이들은 분당의 큰이모네로 보내고 어머님을 본가로 모셔다 드렸다.
어머님과 이른 저녁을 먹고는 분당의 큰언니네 집으로 출발했다.
큰언니네 다니러 친정 엄마가 거기에 와 계신다는 정보를 접수했기때문이다.
그렇게 마천동에서 분당으로 달리는데 여기가 문정동 로데오 거리라며 우리 홈에 오시는 김태경 형님 건물이 나올 거란다.
그 소리를 듣는데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난 카메라를 꺼내 흔들리는 차안에서 건물을 찍었다.
그렇게 인연의 건물을 담고서라도 산골로 가려고...
그런데 초보농사꾼이 형님께 들려 차 한잔 얻어 마시고 가잔다.
안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퇴근 시간이 9시로 들었는데 그리 바쁜 분에게 불쑥 가는 거 아니라고...
그런데도 서운했는지 그래도 딱 차 한잔만 하고 가야지 어떻게 코앞을 지나가냐며 차를 길가 주차장에 세우고 주차료를 지불하고 있다.
초보농사꾼 전화에 건물 현관까지 나오시는 태경 오라버님....
처음 뵙는 얼굴이지만 낯설지 않고 푸근하다.
정말 친오빠처럼 다정한 향기에 끌려 그 분 건물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일전에 삼성동 벙개때에도 함께 오셨던 이준봉 사장님 사무실에서 들렀는데 농사로 아픈 몸에 테이핑을 해주시는며 이런 저런 주의사항과 함께 테이프를 또 한아름 선물로 주시는 마음이 따사로워 거절도 못하고 덥석 받았다.
그렇게 헤어져 분당으로 가려는데 아쉬우신지 생맥주 한 잔을 권하신다.(이거 초보농사꾼에게는 마약인디....)
생맥주야 초보농사꾼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만 술을 마시면 운전하고 분당으로 가는 일이 어려워진다며 가야한다고 말하는 초보농사꾼.
헤어짐이 서운한건 나도 마찬가지라 모두 모즈21 건물 지하에 있는 '샤갈...'로 내려갔다.
생맥주에 아픔과 즐거움을 토해내다 보니 한 잔이, 두 잔되고, 두 잔이 석잔되고, 그렇게 맥주잔을 정신없이 들락거리다 그만 분당으로 가는 것을 포기한 다음에는 편하게 마셨다.
일단 나도 큰언니에게 전화를 하여 오늘은 못가고 내일 산골로 가면서 들리겠다고 연락을 취해 놓았다.
사람의 인연은 어떤 모습일까...
그 완전한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까...
내가 경험하고 상상하는 인연의 깊이는 늘 새로운 인연 앞에서 그 기록이 깨지기 일쑤였다.
진정한 깊이와 향기는 어디까지일까를 분간하기 어렵다.
태경 오라버님과 만난 자리에서, 난 끊임없이 인연의 신비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리의 사람을 둘러보니 인연의 깊이와 향기의 끝이 어디까지일까 더 의아해지고, 궁금해졌다.
핏줄이고 아니고의 구별이 필요없다.
초보농사꾼은 외아들이라 든든한 형님이 생겨 더더욱 따사로웠을 것이고, 나야 달랑 한 명 있는 오빠가 있을 뿐이다 보니 그 친오빠와 구별이 안되긴 마찬가지다.
산골의 앓이를 토해낼 때는 함께 눈을 찌푸리며 맥주를 들이켰고, 산골의 좋은 일을 언급할 때는 모두 산골살이를 함께 한듯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셨다.
그때 이 두 줄짜리 시가 떠올랐다.
나 태주 시인의 '자운영꽃'
자운영꽃
잃어버린 옛날 이야기가
모두 여기 와 꽃으로 피었을줄이야.
이것 말고 뭘 바라겠는지....
내 아픔과 기쁨을 정녕 머리카락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온전히 함께 느끼는데 무엇이 더 필요한지...
태경 오라버님은 내가 대학때 한창 방송에서 난리가 났던 '이산가족찾기'에서 잃어버렸던 막내 여동생을 찾은 사람처럼 그렇게 반가워하시고 좋아하셨다. 손을 잡고 우린 놓지 않았으니까...
과연 난 저렇듯 맑으신 태경 오라버님에게 그 분과 같은 맑은 영혼을 유지하며 기쁨을 드릴 수 있을까....
수없이 자신에게 물어 보았는데 내 안의 난 대답을 신통하게 못한다.
초보농사꾼도 기분이 좋아서 생맥주를 연거푸 마시며 지난일을 토해내고 앞으로의 계획도 말씀드린다.
그 모습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아주 늦은 시간...
이제 헤어져야 한다.
서울에서는 운전을 못하고 울진 신호등 없는 곳에서나 운전을 하는 들떨어진 나는 인연의 힘을 얻어 용기가 났는지 문정동에서 본가까지 초보농사꾼이 시키는대로 운전을 해서 잘 왔다.
늦은 시간, 오늘의 일을 영상으로 떠올리니 잠이 안온다.
인연의 홍역을 앓고 있는중이다.
인연을 떠올릴수록 정신이 맑아지고 자꾸 걷고 싶어진다.
산골살이,
귀농살이,
이제는 나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니다.
우리 홈에 오시는 많은 분들의 응원과 격려, 관심, 사랑 그리고 기도로 난 밭을 갈고, 씨를 뿌릴 것이며, 풀을 뽑고, 화단에 물을 줄 것이다.
그 자양분으로 난 산골살이를 해나가는 거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 힘듬이 있어도 오뚜기처럼 일어나야 한다.
그 응원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아무리 까막정신이라도 그것만은 잊어서는 안된다.
산골에 비가 온다.
봄비처럼 주룩주룩 비가 온다.
엊그제 내 어깨를 두들겨주던 그 인연의 손길이 느껴지는듯 난 서서 통창으로 그 소리처럼 들린다.
소리는 귀로 듣는데 어깨가 따사로워진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www.skyhe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