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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_해당되는 글 139건
2010.03.27   귀농일기--산골소녀가 학교다니던 길을 걷는다. 
2010.03.24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산골소녀의 제 손님맞이 
2010.03.05   귀농일기--밭으로 출근하고 싶다. 
2010.02.08   귀농일기--귀농했으니 누리는 혜택이다. 
2010.02.02   귀농일기--며칠 여기에도 올인하려 한다. 2
2010.01.27   귀농아낙의 산골편지--못먹어도 G0라고 외쳤던 야콘농사의 변천사 
2010.01.12   귀농아낙의 책이야기--침대와 책 
2010.01.11   귀농아낙의 산골편지--딸도 자라고 엄마도 자라고... 
2010.01.07   귀농풍경--혼자 간 해돋이 
2009.12.26   귀농풍경--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귀농일기--산골소녀가 학교다니던 길을 걷는다.
+   [귀농일기]   |  2010. 3. 27. 14:07  

2010년 2월 10일

 

오늘은 딸 주현이의 졸업이다.
아내는 딸이라 그런지 이것 저것 선우때와 또 다른 마음이 생기는지 어제 늦도록 꼼지락 꼼지락거리며 뭘 하더니 아침에도 뭘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인다.

 

 


[왼쪽에서 두번째 아이가 딸 주현입니다. 낯이 익어서 보니 일전에 산골집에 놀러 왔었던 친구들입니다.)

이제 학교차를 타고 다니는 시절도 이제 끝이다.
마을입구에서부터 걸어서 집까지 올라오는 것을 즐겼던 딸아이다. 엠피쓰리를 듣고 길바닥에 개구리가 죽어 있는 것도 안타까워 하면서 딸아이는 걸어서 학교차를 타고 다녔다.

 

 

 

여름이면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가에서 엄마, 아빠에게 준다고 산딸기를 따오곤 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고 대견했지만 표현을 못했다.

 

 

 

요즘은 사탕처럼 달콤한 아빠(이런 표현이 난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렇게들 표현한단다)들이 많아 아빠가 딸에게 자상하게 책도 읽어주고 같이 놀아도 주고 선물도 하고 그런다지만 난 그런 부류는 못된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귀농 전보다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할수 있다.
자가진단이지만.

 

 

 

비오거나 눈이 오면 지엄마가 태워다 주기 때문에 어떤 때 보면 비가 온다고 좋아하기도 했으니 본인인들 왜 그렇게 걷는 것이 귀찮지않았을까.

그래도 초등학교때부터 군말 한번 없이 봄여름가을겨울없이 걸어서 다니는 것을 보면 기특하고 그랬지만 난 워낙 표현이 잘 안되는 아빠지만 오늘만큼은 수고했다는 말은 해주고 싶은 날이다.

 

 

 

여하튼 오늘은 아빠 말에 거역한번 못하고 잘 자라서 그렇게 친구들이랑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즐거워 하는 딸아이를 보니 대견했다.

딸아이는 친구생일이라서 축하자리가 있다며 읍에 남았고 선우는 선우대로 남고 우리 부부만 산골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읍에서부터는 계속 비가 왔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눈이 펑펑 오기 시작한 거다.

서둘러 밟았다.
산골의 눈은 금방 쌓여 어떤 사태를 불러올지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결에서 조금 올라가서 집으로 들어서는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차가 미끄러진다.


힘껏 밟아 돌진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문제는 내일 서울로 엄마를 모시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명절을 산골에서 지내기 때문에 엄마를 모시러 서울로 가야 하는데 눈이 예상보다 많이 오기 시작한다.

아내와 상의 끝에 차 두대 다 국도가에 내려다 놓기로 했다.
아내는 쉬라고 하고는 한 대씩 내려다 놓았다.


한 대를 내려다 놓고 다시 한 대를 내려다 놓고...

다 내려다 놓고 그냥 올라오면 서운하다.


오늘 내 딸 주현이의 기쁜 졸업식도 있었는데 아내가 말하는 방앗간에 들려 막걸리 한잔 하고 가야지...

유이장님댁에서 막거리를 마시고 혼자 올라오는데 저 멀리서 작은 키에 우산을 쓰고 내려오는 사람이 보인다.
나를 마중오는 아내다.

 

눈이 쏟아지니 우산을 쓰고 내려온다.
얼굴색이 아주 좋으시다며 놀린다.
기쁜 날이라 한잔했다고 했다.

 

 

 

아내는 우산을 쓰고 내 뒤를 따라오고 난 시원한 눈을 맞으며 간다고 앞장을 섰다.
요즘 계속 야콘즙 작업을 하기 때문에  바빴는데 이렇게 뒷짐을 지고 딸 주현이가 걸어다닌 길을 걷자니 다시 새삼스러워졌다.

 

 

 

내일은 어머님 모시러 가야 하는데 눈이 그쳤으면 좋겠다.
그런데 쉽사리 눈이 그칠 것 같지가 않다.

 

집 처마 밑에서 눈오는 모습을 보며 졸업식장에서 못한 말을 뱉어보았다.
“주현아, 졸업 축하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귀농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산골소녀의 제 손님맞이
+   [산골편지]   |  2010. 3. 24. 12:38  

충남 천안 병천에서 온 가족이 한양으로 입성하여 그 꾀재재한 짐을 푼 곳이 서대문구 홍제동이었다.
그때부터 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어리디 어린 난 그 전까지는 무엇이 부끄러움인지 잘 몰랐다.


인간이 제일 먼저 느끼는 부끄러움이란 잘은 모르지만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된 ‘벗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닐까.

그러나 난 어려서 서울로 오고도 방학때마다 시골로 내려가 벌거벗고 멱감으러 다녔으므로 그런 부끄러움은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늦게 깨쳤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느낀 부끄러움은 ‘없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시골에 살 때는 모든 것이 풍족했던 어느 종갓집 막내 손녀딸이었다.


그 꼴난 공부한답시고 부모님따라 서울로 들어서고부터는 어린 것이 그런 부끄러움 먼저 배워야 했다.


(▲ 친구들을 삼킨  버스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때는 선생님이 학생집을 죄다 찾아다니는 일명 ‘가정방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신경을 곤두세우셨다.


그래봤댔자 뽀족한 수는 없었지만 내성적인 엄마는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곤 했었다.
나의 친구들이 집에 온다고 하던 날도 여린 엄마는 더 말씀이 없이 멍해 하셨다.

 

혹여 딸아이에게 정신적 충격은 기본이고 그것으로 인해 사기를 잃을까 걱정하셨던 것같다.

아끼바리처럼 기름기가 좔좔 흘렀던 내 고향 병천에서의 살림과 전세살이인 서울살림이 몸뚱아리 하나 옮겨 놓는 것으로 손바닥 뒤집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것으로 치자면 그 당시 엄마, 아버지야말로 정신줄 제대로 잡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 버스 문으로 친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식들 줄줄이 허리춤에 꿰차고 서울에서 공부 빡시게 시켜 시집, 장가 빵빵하게 보내리라는 그 꿈 하나로 올라오셨기에 많은 자식들 눈동자만 합해도 야구경기장의 라이트 이상으로 당신들을 정신들게 했을 것이다.


서울 첫 살이를 그렇게 옹색한 전세살이를 하던 때, 우리 엄마 세대가 끔찍이도 높이 봤던(?)‘선상님’이 가정방문을 온다고 했다.

그때 이웃집에 살던 아줌마가 당신 딸 아이의 옷을 빌려 주었다.


엄마는 그런 것을 빌려달랄 주변머리도 못되는 사람이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우리가 서울 올 때의 입성으로 보나 세간살이로 보나 없는 집구석 모양새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단다.


망한 것도 아니고 시골 재산 그대도 두고 서울로 올라오느라 하루 아침에 거지꼴이 되었으니 같은 거지(?)라도 질이 다르다고 느껴 우리에게만은 살갑게 대해 준 이웃이었다.


이 이웃이 주인집이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같은 전세살이 아니 오히려 우리집 전세보다 못한 지하실 전세살이였다.

요즘 말하는 반지하 차원이 아니다.


그 집은 한참을 똥개천쪽 계단으로 내려가 있는 푸세식 공동화살실이랑 마주 보고 있는 문 속에 살았다.
그러나 먹성, 입성은 왠만한 부잣집 이상이었다.
내일 죽을 것처럼 먹고, 펑하고 사라져버릴 돈인양 옷을 사입고 가전제품을 들여 놓고 살았다.


그 당시 그 집엔 좋은 TV가 있었으니까.
그런 씀씀이로 인해 그 장마에도 똥물이 흘러들어오는 개천 옆 신세를 면치 못했다.






(▲ 이제 우리집 앞으로 가!!! )


우리 엄마는 굶어죽으면 죽었지 남의 외상지는 것과 빚지는 것을 질색으로 아셨다.

어린 기억으로, 그 집에 엄마 몰래 TV 보러 가서(엄마는 구걸하듯 TV보러가는 것을 질색하셨다. 자존심 하나는 풀먹인 교복 칼라처럼 빳빳하셨다.) 창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개천의 똥물이 아는체 하고 들어올 것같아 그 쪽에 눈도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여간, 그 집 아주머니는 시키지도 않은 옷을 싸들고 와서 서울 선생들은 애들 옷을 보고, 세간살이를 보고 애들 기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며 엄마의 대답도 들어보지 않고 자기 딸 옷을 내게 입히곤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깐깐한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아온 엄마에게 얻어 입히는 것도 아니고 빌려 입히는 것이 자존심 구기는 일이었건만 딸아이 기죽인다는 말에 찍소리 안하고 그 아줌마의 행동을 말리지 못했으리라.


그것 생각하면 지금도 엄마의 그 고뇌가 느껴져 머리통을 언 땅에 대고 진정시키고 싶다.

그랬다.
우리 엄마는, 내 엄마는 소설가 박완서님의 엄마처럼 그랬다.






(▲ '어린시절로 돌아가고파...')


박완서님의 엄마랑 우리 엄마가 너무 닮았고, 처지도 비슷했다.
자식들 공부시킨다며 종가집 뛰쳐나와 고생고생 서울살이 이겨낸 것이 똑같다.


박완서님네의 첫 서울살이가 서대문구 현저동이었으면 우리의 첫 서울살이는 서대문구 홍제동이었다는 것도 비슷했다.

시골에서는 윤택했으나 서울살이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악착같이 자식들 공부시킨 점도 엇비슷했다.


그 엄마의 그 딸도 비슷하여 박완서님이나 나나 그런 서울이 너무나도 싫어 방학하는 날, 하이에나가 먹이감을 발견한 것처럼 반은 눈이 뒤집어져서 시골로 내달렸고, 내일 개학을 코 앞에 두고 서울로 상경했던 점 등이 또한 비슷했다.

이제와서 뭐가 어쨌다고 지금 어린시절 시린 생각이 날까.


오늘,
오늘 산골에 산골소녀 주현낭자의 친구들이 온다는 날이다.
주현이가 근처의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곧잘 친구들이 오두막을 찾았지만 오히려 새 집 짓고는 이래저래 바쁘다는 이유로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 "우리 입으로 들어갈 음식이 제대로 될까???")


이제 중학교 졸업을 코 앞에 둔 딸아이에게 그게 미안해 날을 잡았다.
그 놈의 날을 잡으면 왜그리 일이 생기는지.


걱정하는 내게 의외로 초보농사꾼이 아무리 일이 생겨도 애들 오는 날은 건들지 말라고 하였다.
정히나 우리 손님이랑 겹치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저 위의 신부님 집으로 애들을 보내자고 했다.


해먹는 것도 재료만 준비해 주고 지들끼리 구워먹든, 죽쒀먹든 해 먹으라고 하면 오히려 더 신바람 날 거라는 엄명이 있었다.

우리집 ‘가장’의 명대로 ‘주현이 친구오는 날’은 북박이로 고정시켜 두었더니 겹치는 문제들이 풀려갔다.
그래서 자식은 엄마의 똑똑함으로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아빠의 지혜와 우직함이 합해져야 제대로된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5명의 공주들이 온단다.
주현이는 아침부터 신부님집으로 올라가 보일러를 켜고, 혹여 벗들이 추울까봐 벽난로의 불도 다 지펴 두었다.




 


(▲ 벗들을 위해 벽난로도 미리 피워 놓은 산골소녀)


친구들이 읍에서 10시 버스를 타고 온다며 주현이가 걸어서 마을입구로 마중을 나갔다.
엄마가 태워온다니 걸어오는 재미가 있으니 엄마는 신경 하나도 쓰지 말란다.

그래, 뭐 신경쓸 일이 있을까.


그 옛날의 내 엄마처럼 자식 친구들이 온다고 하여 걱정할 일은 내게 없지 않은가.

애들이 걸어서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는다.


딸 아이 말마따나 지금 걸어오면서 추억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찐한 추억을...





(▲ 고기도 굽고... "햐, 빨랑 익어라")


한참만에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내다 보니 다섯 명이 깔깔거리며 오고 있다.
걸어오면서 놀다 와서 늦었다고 겉옷을 다 벗어 던진다. 덥다고...


그 ‘더움’은 소녀시절의 그 풋풋한 생기와 꿈과, 호기심 등이 발동하여 열고 변했으리라.

일단 우리집으로 와서 지들의 하루 먹을 꺼리를 건내주었다.
장을 봐다 달라는 품목만 딱 사주었다.


그 전에 몇 번이나 그 이상의 것은 하나도 못주니(^^) 미리 친구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식단을 짠 후 재료 품목을 넘기라고 했기 때문에 장봐온 것만 넘겨주었다.

그래도 김치, 김, 계란, 귤은 산골아줌마가 서비스로 추가 제공해 주었다.^^


재료 보따리를 나누어 들고 신바람이 나서 올라가는 아이들을 보니 설레임을 안고 소풍가는 아이들 같다.
점심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고, 김치찌개, 핫케익도 만들어 먹고 달고나 등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집의 마당에 나서니 달밭 위 신부님 집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난 고기구워 먹으려니 전선줄이 필요하다고 하여 갖다준 것 말고는 일체 그 근처를 얼씬도 안했다.
부담없이 지들끼리 놀라고...




 


(▲ 세월이 흘러 구두의 땟깔과 사이즈는 변해도 너희들의 우정은 변치 않길 빈다 )


일단 4시가 넘어서 부모님들이 걱정하시기 전에 길을 뜨자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아래 집으로 소리를 친다.

왜 안그렇겠는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지들끼리만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실수도 하고, 자빠지게 웃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기다려주었다.


주현이와 친구들을 태우고 읍으로 달렸다.
차 안에서도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뭐가 그리 재밌었냐니 계란말이는 자신있다고 아줌마께 큰소리쳤는데 말아지질 않아 후라이팬에서 다 먹어 치웠고, 핫케익 담당은 주현이였는데 다 태워서 검은 표고버섯 두 개가 있는 것같았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벗들을 위해... 달고나의 달인, 산골소녀의 맛자랑 )


삼겹살이랑 김치찌개만 정상이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두 번이나 구워 먹었단다.
하기야 먹성 좋은 아이들이라 삼겹살을 넉넉히 사고도 부족한 듯 싶어 다시 정육점에 들어가서 산 것까지 다 주었는데 다 뱃속에 들어 앉았단다.

그러면서 너무 아쉽단다.


불영계곡의 어둠이 찾아들었는데도 그 아이들의 웃음과 재잘거림은 계곡물처럼 끝이 없이 이어졌다.

난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 말문을 열었다.


옛말에 ‘엄마 팔아 친구산다’는 말이 있는데 아줌마도 너희만할 때 엄마에게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살아보니 ‘친구’는 엄마를 팔 정도로 소중하고 살가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아줌마도 그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엄마 팔아 친구 산다’고 했듯이 지금 너희들의 이 우정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머리 희어질 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는 말을 흘렸다.
알아들었는지....


아이들을 읍에 내려주고는 집에 도착하면 바로 주현이 핸드폰으로 문자날려 달라고 했다.
주현이 핸드폰이 문자를 받아먹느라 바쁘다.



 


(▲ " 너무 좋다~~~")


다시 불영계곡을 돌아돌아 주현이와 산골로 돌아오는 길.
주현이에게 오늘 친구들과 부족함이 없었느냐고 하니 태어나서 삼겹살 이렇게 많이 먹어보긴 첨이란다.(주현이는 선우만큼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들이 또 오고싶어 한다는 말도 귀에 넣어준다.


그래, 기회되면 다음에 친구의 엄마들과 직접 통화를 하고 졸업하기 전에 한 번 더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주현이가 하품을 하면서 “엄마, 내 손님을 치러서 피곤한가봐“ 한다.


“그래도 나 자면 안돼. 신부님 집 대청소는 했는데 고기 구워먹은 판은 기름이 많아 못 닦았어.그것 다 닦고 자야지.” 한다.

뜨거운 물로 어찌어찌 하라고 일러주었다.


자기 친구가 와서 해먹은 거니 자기가 마무리해야 한다고 하는 말에 아이가 많이 여물었음을 느꼈다.

아이는 제 손님을 철나고 처음 치러본 셈이다.


이렇게 자주 제 손님을 치르다 보면 저도 남의 집 손님으로 갔을 때, 어떠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손님 맞는 사람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자세여야 하는지 스스로 깨쳐갈 것이다.

그것은 주현이가 세상을 깨쳐 가는데 중요한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산골 다락방에서 귀농 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일기--밭으로 출근하고 싶다.
+   [귀농일기]   |  2010. 3. 5. 14:51  

 

2010년 2월

 

산골의 날씨는 아침 저녁으로 뿐만 아니라 벌건 대낮에도 모가지를 바짝 오그릴정도로 춥다.
아래, 위 내복을 입는 것은 기본이고 그 위에 작업복 그 위에 오리털 잠바 정도는 걸쳐 줘야 육신을 제대로 펼수가 있다.

 

야콘즙 작업을 할 때는 그 안이 증탕기의 열로 겉옷을 벗고도 작업을 할수 있지만 문 하나만 열고 나오면 안과 밖의 차이가 엄청나다.
그러나 이틀만 있으면 입춘이다 보니 봄이 어디쯤 와 있는지 자꾸만 밭쪽을 올려다 보게 된다.


귀농 초에는 눈도 엄청 많이 왔고 날도 더 매섭게 추웠었는데 점점 갈수록 눈도 놀랄 정도로 쏟아지지 않고 매섭던 추위도 조금 위세를 덜떠는데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 날씨의 변화로 도 그렇게 꽁꽁 얼지 않은듯 뭔가 꼼지락거리고 올라 올 것만 같아 을 자꾸 들여다 보게 된다.
잃어버린 돈을 찾는 사람처럼..

농부가 자꾸 밭쪽에 관심을 갖게 되면 봄이 멀지 않은 것이다.


아직은 두꺼운 얼음이 이불처럼 덮여있지만 그 아래에는 파란 물결이 봄처럼 농부의 마음을 자극한다.

이렇게 봄인듯 콧구멍에 바람을 들이지만 4월에도 자중하라고 산골에는 눈이 온다.


입춘을 떠올리는  때지만 아직도 몇 번의 눈이 산골을 찾아올 것이고, 세찬 추위도 몇차례 드나들 것이다.
날이 조금 풀리면 야콘즙을 짜고 난 찌꺼기를 작년 가을에 아내와 심었던 개복숭아 묘목 주위에 줘야겠다.


그러면 어린 묘목 주위에 풀도 덜나고 그것이 거름이 되어 많은 열매를 열 것이다.

빨리 봄이 되어 밭으로 출근하고 싶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www.skyheart.co.kr) 에서!!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일기--귀농했으니 누리는 혜택이다.
+   [귀농일기]   |  2010. 2. 8. 15:50  

 


2010년 1월 2일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다 보니 방학이 없다.
그나마 이번에는 연말에 며칠 함께 산골에서 보냈는데 애들이 참으로 좋아한다.
산골을 저렇게 좋아하니 귀농을 주동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일이 아닐수 없다.


선우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아이를 앞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었다.
고등학교부터는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보내겠다.


어려서는 자연에서 무조건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산골로 데리고 왔지만 이제 고등학교부터는 너희들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선우가 신중하게 듣더니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신중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며칠 후 우리 가족이 다시 마주 앉았을 때, 선우는 산골에 남기로 했단다.
서울로 가는 것도 싫지는 않단다.


더 넓은 곳에서 많은 아이들과 서로 자신을 비교해 가면서 자신을 다듬어 가는 것도 좋다고...

하지만 그 좋은 것보다 산골을 떠나는 것이 훨씬 싫기 때문에 산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마음을 정했단다.
어린줄로만 알았는데 이 놈 이제 믿어도 되겠구나 그때 생각했다.


그 믿는다는 게 그동안 못믿었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말에 책임도 지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알아서 고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되도록이면 아들의 말에 힘을 얹어주어야겠다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벌써 새해로 고3이 되었다.


산골을 좋아하는 아이라 산골에서 며칠 온가족이 뒹굴고 놀고 책보고 야콘즙 노가다 하고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단다.


이제 내일이면 두 놈 다 학교 때문에 이 즐거움도 막을 내려야 한다.
아침부터 애들 인상이 시원찮다.


기운이 없고 말수가 우선 없어졌다.
성격이 섬세하지 못한데 귀농하고 점점 성격도 조금씩 변하는지 이제 눈에 그런 현상이 잘 들어온다.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ㅎㅎ


아내도 벌써 말이 별로 없고, 어제  아니 오늘 새벽까지 웃고 떠들고 하던 것은 어디로 가고 모두 기운이 없다.
저녁을 먹고나니 더 심해졌다.



 


“자, 가자.”
어디로 가느냐고 모두 쳐다본다. 정신나간 사람 쳐다보듯이 한다.
어디는 어디야 야간 산행이지.


우선 아내가 말린다. 그 이유는 멧돼지 때문인데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며칠 전에 옆 동네 사는 사람이 산에 갔다가 멧돼지를 떼로 만나 나무위로 올라가 화를 면할수 있었다고 하는 소리에 겁많은 사람이 더 난리가 났다.


하도 그러기에 임도 입구까지 간다고 하고 나섰다.
주현이는 낮에 벤자민(사냥개)을 데리고 충분히 운동을 했다며 안간다고 쪽 뻗는다.
그럼 선우랑 둘이서 간다고 하니까 아내가 굳이 따라나선다.


분명히 걱정이 돼서 따라나서는 것이 틀림없다.

집에서 한참 내려온 곳에 임도가 있는데 그 입구에 이르니 약속대로 돌아간다.


‘그런게 어딨어. 말이 그렇지 뭐 뜻이 그런감.‘

들은척도 안하고 가니까 뒤에서 아내가 난리가 났다.
멧돼지 나오면 큰일난다며 손전등을 가지러 집에 갔다 온단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손전등.


조금 가다가 금방 갈테니 조금만 가자고 아내를 구슬렀는데 겁많은 아내는 금방 남편이랑 아들을 멧돼지 입에 넣을 것만 같은 모양이다.


저런 새가슴으로 어떻게 이 깊은 산중으로 들어와 살수있다고 나를 따라왔는지 고마운 일이다.
아내가 안보인다.


뒤돌아 손전등을 가지러 가는 모양이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그만 갈테니 빨리 따라오라고...


눈이 조금 온 날이라 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업어 준다고 꼬셔도 자꾸 손전등을 가지러 간단다.
선우가 가서 엄마를 데리고 온다.


선우 말이 아빠가 그런다고 안가실 분 아니니까 그냥 맘편히 재밌게 가자고, 아빠는 한번 한다면 하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설득을 했단다.
아들 말에 넘어간 아내가 선우 옆구리에 끼어 올라온다.


약속한 곳보다 한참 더 오니 이제는 가는 거리가 워낙 멀어 손전등 얘기는 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내가 되돌아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을테지만 멧돼지가 너무 무서운 모양이다.


그 얘기 말고도 동네에서 멧돼지를 보았다고 한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더 그랬을 것이고 이곳에 처형이랑 운동을 왔을 때도 어김없이 멧돼지를 보았기 때문에 아내의 그 마음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짓도 못한다.


위험을 무릎쓰는 일이야말로 기억에 남고, 추억이 되고, 얻는 것이 크다.
그렇게 생각하니 귀농이 그러네.


또 선우를 데리고 온 데에는 녀석의 기분도 전환시켜줄 마음도 컸지만 죽을 고생을 하거나, 안해본 일을 하게 되면 그만큼 가슴도 크고, 멋진 경험도 쌓인다고 생각한다.

생각같아서는 빙벽등반이라도 함께 가고 싶은데 아쉽지만 야밤에 눈이 쌓인 산길을 굽이굽이 도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이다.


작년인가 이 길에 눈이 정말 허리까지 왔다.
그때 둘이서 나섰다. 그 긴긴 산을 넘어갔다 오자고.
눈이 너무 와서 걸음을 뗄수가 없었다. 그나마 앞에 선 사람 뒤에 가면 뒷사람은 조금 덜 힘들 정도였기 때문에 우리 둘이 번갈아가면 앞장을 서곤 했었다.


그때 선우는 이 눈속에서 죽는줄 알았다고 했다.
눈은 많아 되돌아갈수도 없고 앞으로 너무 많이 남은 길을 갈수도 없고 게다가 날은 저물어가고 배는 너무 고프고 딱 죽는줄 알았단다.


정말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죽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줄 아느냐고 하면서 우린 목적지까지 다녀왔고 아내는 그때도 추운 밖에 서서 안온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그 추억은 지금도 겨울만 되면 선우가 읊은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야밤에 좋은 경험을 만들자는 것이 아닌가.


 


달빛에 의지하여 어둔 산길을 올라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설악시’를 읊조렸다.
선우가 감탄을 한다.


내 시에 감탄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달빛에 감탄을 하며 내게 고맙다고 정말 너무 멋진 경험이라며 가던 길 멈춰 서서 난리다.

달이 산등성이에 숨었다가 우리가 다시 언덕을 올라가면

등 뒤에서 환히 나타나 비춘다나 뭐라나.
책을 많이 읽은 놈이라 자연에 대한 감탄도 대단하다.

선우가 가던 길 서서 아빠 고마워요, 고마워요 소리를 몇 번이고 하니까 아내는 신바람이 난 모양이다.
애가 감격을 하니 멧돼지 생각은 이제 잊은 모양이다.


“선우야, 멋지지? 정말 그렇지?”
난리가 아니다.


그렇게 내가 애초부터 가려고 했던 곳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엔 아내가 신바람이 났다.
자기도 너무 좋다고...


일전에 넘어져서 아픈 발목이 시큰거린다고 하면서도 달빛에 눈이 온 산길을 이 야밤에 다녀온 것이 좋단다.

아들 선우가 그때의 감동을 글로 썼다니 내 글 밑에 붙이려고 한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복잡해도 잠깐씩은 일상을 벗어나서 안하던 짓도 하고 자연의 깊은 날개 속으로 들어가 보면 새로운 용기가 생긴다고 나는 확신한다.


초보농사꾼 박찬득


(아래 글은 아들 선우가 쓴 글이다)

<B><< 휘영청 달 밝은 밤에.>></B>


 자연 속에 은거(?)하는 사람들이 숙명적으로 받게 되는 질문 중 하나는 ‘좋은 풍경 많이 보겠네?’ 이다.

도시 사람들 입장에서 이 질문의 답변은 대단히, 그리고 당연히 긍정적일 것이리라 생각될 것이다.

매일 개성이 실종된 콘크리트 덩어리만 보는 도시인들에 비하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글쎄, 확실히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알지만 부르주아(‘성 안 사람’, 즉 도시인이라는 뜻이 원형임.)분들의 생각처럼 매순간이 그림 같진 않다.


물론 산골의 자연은 아름답다. 하지만 10년 동안 가슴이 울컥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풍경을 떠올리라면 딱 2가지뿐이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산이 밤새 내린 폭설로 인해 온통 희게 빛나던 어느 겨울 아침 풍경 하나, 검푸른 하늘에 모래알처럼 은은하게 흩어져 있는 별들과 그 별을 옅게 덮어주던 구름이 찬란했던 풍경 하나, 두 가지다.


위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풍경은 도시인들과 다름없는 닳도록 친숙한 주위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몇 년 만에 다시 한 번 온 몸을 전율케 하는 자연을 다시 한 번 대면했다.


 새해 벽두부터 폭로라니, 슬픈 일이지만 글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불가피해 보인다.
우리 아버지는 용기가 넘치신다. ‘많이’ 넘치신다.





해외에 갔을 때, 위험하니 밤에 나가지 말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겁도 주는 가이드의 경고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지키신 적이 없으시다.

그 뿐이면 말도 안한다.


박찬득 아들이 물을 무서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맥주병 아들을 계곡물에 집어 던지신 건 그 분의 행적 축에도 못 낄 정도다. 주위 사람들(주로 어머니)이 아무리 뜯어말려도 우이독경으로 일관하신다. 덕분에 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깊은 곳도 주저 없이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저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 가족이 함께한 일 중 가장 재밌었고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 역시 바로 아버지와 함께한 만용의 모험들이라는 점이다. 아, 물론 예외도 있다.

몇 가지 모험은 지금도 치가 떨린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이제 방학이 끝난다고 칙칙한 기운이나 팍팍 풍겨대고 있던 것이 또 다시 아버지의 (젊은 놈보다 넘치는)혈기를 자극한 발단이었다.


밤 9시를 향해 시침이 치닫고 있는 때 갑자기 요 앞의 임도 산책을 다녀오자고 하신다. 하지만 따라나선 어머니가 멧돼지와 마주친다며 극력 아버지를 말리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목적지는 ‘임도 입구’로 수정하셨지만, 난 애당초 믿지도 않았다. 아버지 성격에?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아버지는 기어이 어두컴컴한 임도로 나머지 두 사람을 인도(사실은 끌고)가셨다. 물론 어머니와 나는 말도 못하게 불안했다.


옆 동네에서 멧돼지와 마주쳐 죽을 뻔했다는 소식이 실시간으로 제보되고 있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돌아가자는 어머니의 간청에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소의 자세로 일관하신다. 나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였으나 귀농 훨씬 전부터 말리길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동장군의 입김으로 차갑게 얼어붙은 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할 즈음, 불안함이 조금씩 가시고 대신 내 시선은 반짝이는 눈길위로 내리쬐는 달빛으로 옮겨갔다.


빛을 쫓아 올려본 하늘에는 연기처럼 유연한 구름사이로 새침데기처럼 간혹 모습을 나타내는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로 잰 듯 시원스럽게 뻗은 나무와 그 뒤로 푸른 비단처럼 펼쳐진 하늘은 겨울 특유의 상쾌함을 표현하는 듯 했다.

달은 장난스러운 아이처럼 검은 나무 뒤로, 부드러운 구름의 치마폭 안으로 숨으며 내게 나름의 환영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이어 도착한 정상에서 난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정상에서의 풍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불가능하다.
 
억지로 해봐야 내 감상만 상할 것 역시 명백하니 포기하겠다.
다만 꿈속을 걷는 듯 환상적인 자연에 취해 버렸다는 미약한 감상평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시길.
 
 3년 전 쯤, 구름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성단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 있다.
‘이런 장관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너무 불공평해.’

 미안한 말이지만, 간혹 듣게 되는 도시에 매여 있기 때문에 자연을 접할 수 없다는 말은 너무 숙명론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시골 사람이라고 매순간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며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위대한 자연을 보기 위해 종종 떠나며 이번처럼 위험을 무릅쓰기도 한다.


언급했다시피 평생 찬란한 자연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불공평하다.
그리니 늦기 전에 떠나시길. 누가 봐도 무모한 용기라도 좋으니.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 있습니다.!!

 

산골 고딩 박선우


 
 
        

 

귀농일기--며칠 여기에도 올인하려 한다.
+   [귀농일기]   |  2010. 2. 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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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오랫만에 애들이 방학이라 집에 있다.
방학을 해도 보충수업 등으로 학교를 다니다 보니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다.
요즘 제일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 야콘즙 작업이다.

야콘을 다듬고, 일일이 씻어서, 다시 슬라이스를 하고 다시 중탕기에 넣고...
다시 일일이 짜서 포장을 하고 하는 일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애들이 있으면 고등학생이건 아니건 일을 시킨다.
진종일은 아니어도 함께 일하는 시간을 꼭 갖는다.
그건 내 일을 분담하는 의미도 있지만 가족이면 함께 도와야 하는 것이 몸에 배이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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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이들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줄로 알다보니 일할 때 지들이 재밌게 할 방법도 생각해 내곤 한다.
그렇게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가족이 함께 보낼 생각을 하게 된다.
무슨 일로 애들에게 새로운 기분을 들게 해줄까...

사실 난 세세한 재주는 없다.
만만한 게 함께 고기도 구워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요즘은 밖에서 그 상을 차리고 있다.
나무를 때는 보일러라 늘 불이 있으니 밖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했다.
애들이 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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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을 다 구워먹고 나니 아쉽단다.
그러나 산골이라 삼겹살을 사서 갈수는 없으니 집에 있는 것을 내놓아보라니 아내가 꼬막밖에 없단다.
꼬막이면 어떤가. 우리 꼬막을 굽기로 했다.
잘 익혀 먹어야 한다며 아내가 말렸으나 우리는 말리면 더하는 성격이라 그대로 석쇠에 구웠다.

아내는 삼겹살 구운데에데 굽는다고 석쇠를 다른 것으로 갈아서 하라고 기다리란다.
다 입으로 들어가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건 마찬가지인데 뭐 그걸 가지구...그냥 구워먹었다.
미친단다.

날은 추워도 재미붙여 고기도 굽고, 옛날 이야기도 하고, 장래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하다보면 어느새 친구가 되고 형이 되어 있다.

다른 날, 선우가 슬슬 또 뭘 구워먹잖다.그것두 밖에서.
이 눔이 맛들였다.
너무 춥다며 안에서 구워먹으라고 아내가 판을 펴는데 우리 박씨들은 보일러실 안에다 판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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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이 꼭 다 갖추어야 판이냐, 그냥 김치랑 고기랑 놓고 신문지 깔고 앉으면 장땡 아닌가.
보일러실이 좁다.
셋이서 구워먹고 하는데 아내가 와보고는 먹는 거 바닥에 그냥 두었다구 난리다.

먹는 것을 바닥에 놓고 먹지 머리에 이고 먹나...
다 괜찮다.
사는 거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어떤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머리로 들어앉는 것이 어떤가가 중요하지 않은지.

내가 노래를 부르고,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주현이의 소감도 들어보고, 노래도 함께 부르고...
이것은 오늘 노동에 대한 댓가이기도 하다.

좁은 보일러실에서 이렇게 있으니 선우가 너무 좋단다.
서로 몸도 부딪치고 하는 것이 귀농하고 처음에 자기들이 어려서 작은 흙방 하나에서 네 식구가 잤었는데 그때 참 좋았단다.
그때 몸을 서로 부딪치며 자고도 옆이 남았었는데 그 방이 지금 있다면 둘이 자기도 벅찰 거란다.

지금 좁은 보일러실에서 이러고 있으니 그때처럼 참 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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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있는 동안은 여기에도 올인해야 한다.

잘 자라다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  www.skyheart.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의 귀농일기


 
 
        

 

귀농아낙의 산골편지--못먹어도 G0라고 외쳤던 야콘농사의 변천사
+   [산골편지]   |  2010. 1. 27. 22:42  



2009년 12월


겨울밤 하늘에 별이 많이 나와 있으면 모가지가 아프도록 올려다 본다.
겨울 칼바람으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돋아도 상관하지 않고, 하다못해 세포까지 죄다 오그라져 있던 몸을 확 펴게 된다.


그건 아마도 이 추운 겨울에 그 많은 별무리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그러고 있는 것은 혹여나 핏줄과 뚝 떨어져 귀농한 산골가족이 외로울까 정수리를 비춰주기 때문이라 믿는다.


*************************


사람들이 귀농하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야콘이라는 것을 심게 된 특별한 이유를 자주 묻는다.
게다가 지금이 야콘철이라보니 찾아온 손님도 그렇고, 전화로도 특별한 이유를 묻는다.

여기서 ‘특별한’이 중요하다.


아마도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래서 수도 없이 반복한 말이지만 영화처럼 지나온 날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묻는 이의 호기심을 풀어줄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목에 힘주고 시건방을 떨며 말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귀농하자고 옆구리 푹푹 쑤시던 초보농사꾼은 정작 사표수리가 안되어 그냥 기회를 보며 회사를 다니고, 귀농이라니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눈을 허옇게 뜨고 입게 게거품 물던 내가 먼저 애들 데리고 귀농했다.
첩첩산중으로...




(▲ 야콘의 관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다 늦은 7월에서야 초보농사꾼이 진정 사표를 제출하려는 이유를 읽으신 이사님(지금은 현대 부사장님이 되셨다)의 사인이 떨어지자 그가 뒤따라 귀농했다.

7월에 귀농했으니 쥐뿔도 농사지을 게 없었겠다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천만의 말씀.


사표수리의 연기 등 돌발사고가 생길 것을 대비하고, 봄 농사철 지나서 귀농하면 그 해 영낙 없이 백수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주말마다 울진에 마련한 터전으로 내려와 논 준비와 모내기를 했다.

일명 주말농사 꼴이 되었다.


“우리나라 통털어 주말농사를 이렇게 멀리 지으러 다닌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며 초보농사꾼이 요즘도 우스개소리로 목에 힘주고 하는 말이다.




 


(▲ 관아를 겨우내 땅에 묻어두었다가 봄에 심으면 이렇듯 싹이 나온다. 그것이 모종이 되는 것이다.)

촛자 주제에 그런 생각까지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통한 일이다.


몸과 농사기술은 안따라 줬지만 아쉬운대로 통박 하나는 굴렸으니까 고추도 어느 정도 주말마다 내려와 땅에 박았다.

그래야만 한 해를 공치지 않는다는 무슨 보험심리같은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벼와 고추,  얼마 되지 않는 것을(지금 생각하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때 눈으로는 대농 수준으로 느꼈다)  달랑 수확하고 나서 이웃 동네 형의 수확을 도와주러 부부가 갔다.

그때 처음 만난 것이 야콘이다.


그날 노동의 댓가로 캐다가 부러지고, 호미 자국난 야콘을 몇 자루나 받았다.

그러니까 귀농하고 처음으로 품삯을 받은 셈이다. 현물이지만.
그렇게 받은 야콘을 겨우내 먹어본 초보농사꾼이 무릎을 쳤다.
이제부터 나의 길은 “야콘”이라고...



 




초보농사꾼은 귀농 전 직장다닐 때(도시의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겠지만) 변비에 장이 좋지 않았다. 물론 신경성이다.
그런데 야콘을 먹어보니 이거야 원.


변비약 먹은 듯, 그리고 장 진정제를 먹은 듯 그렇게 속이 좋을 수가 없다는 거다.
초보농사꾼 혼자 야콘을 복용(?) 했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내가 먹어봐도 신통했다.


처음 야콘을 자루째 받았을 때는 이걸 언제 먹느냐며 사실 애지중지까지 하지  않았는데 거덜이 나가자 아껴 먹게 되었다. 사람의 간사함이란...

하여간 다음 해 봄이 오기를 두 주먹 불끈 쥐고 기다린 초보농사꾼.


야콘 모종을 구하려니 야콘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의 없다보니 모종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야콘을 주었던 형에게 모종을 어렵게 구해 심으려 하니 동네 어른들께서 걱정이 늘어졌다.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야콘을 어디에 팔려고 심느냐며 말리셨다.


그래도 웃으면서 야콘을 심는 우리를 보시고 말씀은 안하셔도 골이 비어도 한참 비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 야콘을 심는 날, 하도 허리가 아파 땅바닥에 누웠다. 허리가 시원하다.)

‘이렇게 약성이 좋은데 언젠가는 알려지겠지’


이게 초보농사꾼이 믿는 구석의 전부이고, 야콘 농사를 짓기 시작한 '특별한 '이유의 전부였다.

여하튼 풀도 일일이 뽑아주고, 한방영양제를 뿌려주며 유기농으로 기똥차게 키워 수확하는데까지는 그런대로 몸이 후줄근해져서 그렇지 그런대로 좋았는데 창고가 없었다.


그때는 귀농한다고 하면 눈을 휘번덕대며 아래 위로 훑어보던 시절이었다.


‘이거, 하자 있는 인간 아냐?’ 하는 눈빛. 그런 때라 귀농지원금이나 귀농정착자금 등의 지원은 1원도 없었다.

그러니 창고지을 돈이 있는지.


오지 산골의 겨울날씨는 두 말 하면 잔소리 아닌가.

할 수 없이 부랴부랴 마을 입구의 폐교를 빌려 거기에 모셨다.(?)


말이 모셨지 창문은 다 깨지고 문짝도 아귀가 맞지 않으니 한데에 내놓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거기에 이불쪼가리와 담요 등을 죄다 갖다 덮어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거기까지가 죽도록 농사지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면 초보농사꾼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어떤 때는 담요 하나 들고 그 폐교에 가서 야콘이랑 자보기도 했다.
야콘이 어느 정도 추위를 견딜 수 있는지 생체실험(?)을 한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해봤댔자 야콘이 보란듯이 창문 쪽에서부터 얼기 시작했다.
물론 팔 곳은 없고 야콘이라는 말을 하면
“약콩요?” 하지 않으면 다행일만큼 야콘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누구도 몰랐다고 보면 된다.

둘이 오두막에 마주 앉아 의논을 했다.


고생고생해서 키운 야콘을 이렇게 얼려 버릴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선물하자.”

“OK"

그때는 귀농의 열기가 분기탱천하던 시절이니만큼 합의도 여의도 둥근 지붕 속 사람들 같지 않고 빨랐다.


 


(▲ 이렇게 초록의 물결로 야콘이 자라고 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넣어 보내느냐였다.
박스가 없었다.


박스까지 제작하면 많은 돈이 들다보니 상상으로라도 바라지 못했다.

결국 읍으로 40분 달려가 마트를 돌며 부부 넝마주이처럼 박스를 줍기 시작했다.


주위 여자들이 눈을 마구 휘번득대는 것을 뒤통수로 느꼈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그렇게 박스를 주워다 편지지에 일일이 약성을 구구절절이 적어서, 잘 드시라는 진심어린 멘트까지 부록처럼 박은 다음 야콘박스에 넣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택배비였다.


그때는 택배비 지원도 일원 한푼 없었기 때문에 그 많은 곳을 보내자니 적잖이 부담이었다.
어쩐다지...


 


(▲ 야콘의 꽃은 애기 해바라기 같다.)

선물해 달라고 하지도 않은 것을 착불로 턱하니 보내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때나 이때나 ‘되도록이면  마음이 시키는대로 살자‘ 쪽으로 삶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택배비도 내가 쏜다‘쪽으로 금방 합의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야콘을 택배로 발송하고 나니, 야콘을 받아본 분들이 꿈인 듯 생시인 듯 고맙게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갈 일이 있어 갔다가 어느 지인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사단이 난 건 그 때였다.


그 집 대문 앞에 우리가 그 고생을 해서 보낸, 일일이 손으로 풀 뽑아주고 한방 영양제 부어줘 가면서 쌔가 빠지게 길러 보낸 유기농 야콘이 탱탱 얼어 터져 검으티티해진 것을 박스째 버린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내 마음도 야콘처럼 얼어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본 초보농사꾼의 얼굴 그림자를 지금도 난 잊지 못한다.
산골로 내려오는 내내 우린 아무 말이 없었다.




 



(▲ 야콘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내 돈 내고 산 거였으면 끔찍이 여겼을테지만 주어온 라면 박스에 생전 보지도 못한 것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보냈으니 하잖게 여긴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 되었다.


뼈아픈 경험을 한 야콘을 다시 심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하지도 않았다.
초보농사꾼의 야콘의 약성에 대한 의지는 초심 그대로였다.


나 또한 가장이 ‘못먹어도 GO’라고 하는데 패를 돌려야지 별 수 있나.
귀농 초, 우린 왠만하면 의견을 서로 맞추어가며 살자고 다짐했던 그 약발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애들도 함께 돕고...)


그리고 초보농사꾼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현상에 애걸복걸하지 말자고 했다.
그건 도시 생활에서 신물나도록 했으니 이젠 산골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가자고 서로를

초보농사꾼 입에서 이처럼 한 끝발 높은 소리가 술술 나오다니.



 



지금 생각해도 그건 순전히 자연의 힘이지싶다.

그때부터 TV 출연 때마다 야콘 자랑을 했다.


멀쩡히 둘다 왠만한 직장 다니다 왜 귀농했냐며 다행히 방송국에서 구미당겨 하는 일이 심심잖게 있었기 때문에 기회 닿는 대로 야콘을 알렸다.

초보농사꾼이 그때나 이때나 연사처럼 부르짖는 것은 판매도 판매였지만 이처럼 약성이 좋은 것을 모르고 못 먹으면 안타깝다는 거였기때문에 방송에서라고 예외겠는지...


지금 생각하면 팔리지도 않던 야콘을 계속 그 의지로 신주단지 모시듯 야콘농사를 짓는 것을 보면 대단해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먹어본 분들이 점점 약성을 입소문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워온 박스에 담아 보내던 것을 조금 진화하여 스티로폴 박스를 사다가 담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어 해 하다가 ‘하늘마음농장 유기농 야콘’이라고 턱하니 인쇄된 박스도 만들었다.


창고가 없어 다 쓰러져 가고, 유리창도 다 깨진 폐교에 넣다가 그 다음에는 하우스를 하나 지어 그 안에 넣었다.
문제는 아침 저녁 기온차가 커서  해지고 나서의 하우스 안은 정말로 추웠다.





(▲ 수확철에는 너도 나도 수확을 하기 때문에 남자일꾼 구하기가 어렵다. 낮에 품을 사서 왕창 캐놓은 것을 초보농사꾼 혼자 다 실어 날랐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불과 보온덮개를 있는대로 가져다 야콘을 덮어 놓았지만 강추위에는 당해내질 못하고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했다.
그러다 야콘창고도 대출받아 마련하게 되었다.


지금은 당뇨환자분들 대부분이 야콘을 알 정도로 그 약성이 알려진 편이었지만 2001년 우리가 유기농으로 지었을 당시에는 야콘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발음도 어려운 야콘, 하늘마음농장 야콘의 변천사를 핏대 세우며 이야기 하다 보니 무슨 5일장의 약장사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런 시절도....

그런데 왜 지금 귀농 초, 그 얘기를 하는데 목젖이 뎅그랑거리며 매어오는 것일까.


괜시리 야콘의 전설 이야기를 하느라 정수리가 뻐근해지고 있다.

이제 야콘은 많이 알려져 외국에서 수입까지 해대고 있다.


아침 저녁 기온차가 큰 산골에서 자라 맛이 남다르고, 유기농으로 기른 것이라 약성 또한  끝내준다고 침튀겨봤자 수입가격으로 치고 들어오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어졌다.



 



(▲ 어둔 밤이 되어 내가 손전등을 비추고 초보농사꾼이 그 무거운 박스를 죄다 실었다. 밭에 두면 얼기 때문에 그 날 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날라야 했다. )


그러나 난 믿는다.
사람도 어느 부모밑에서 어떤 이슬먹고 자랐느냐에 따라 물건이 달라지듯이 초보농사꾼이 무릎에 관절염이 생기도록 풀 뽑아주고, 약 한번 안주고 우리나라 땅에서 자식처럼 키운 야콘은 남다를 거라고 난 믿는다.


야콘철이라 더 부쩍 손님들이 와서 늘상 묻는 것이 야콘을 어떻게 알고 농사짓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이 더 많아진터에 귀농초부터 야콘에 대한 사연과 뼈 아픈 경험들을 적게 되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고...
그런 눈물나는 시절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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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귀농아낙의 책이야기--침대와 책
+   [산골아낙의 책 이야기]   |  2010. 1. 12. 12:12  

 

침대와 책 상세보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이 책은 CBS PD 정혜윤이 온라인 웹진 서점에 연재한 칼럼 <침대와 책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독서의...작가는 이 책을 통해 침대와 책의 공통점과 현실을 직시하는 또 다른 눈이 되어버린 책의 다양한 이야기와...

 

 

 

정혜윤님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였다.
그 책을 고를 때, 여러 사람들이 나온 것을 묶은 것이라는 판단에서 사실 망설였다.
그런 책은 실망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책을 달랐다.


나도 감명깊게 읽었지만 아들 선우가 읽고 또 읽으며 진정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자주 엿보고 자극제로 삼는 것같다.

<그들은....>이 나중에 나왔고, 오늘 내가 소개하려는 <침대와 책>이 나중에 나왔다.
난 거꾸로 본 셈이다.

 

두 권의 책에서 난 정혜윤이라는 작가는 책이 삶의 일부이고 거기서 삶을 지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러웠다.

 

그만 부러워하고 책 소개를 해야겠지...

우선 이 책 날개에 소개된 작가를 소개하고 싶다.
작가를 잘 알 수 있는 글이니까....

 

“엄마는 나의 검은 피부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갈색 피부를 좋아했으며, 엄마는 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부스스한 머리를 좋아했다
엄마는 레슬링과 가요와 관광버스를 좋아했으며 나는 레슬링과 관광버스를 싫어했다. 우리는 많은 부분 통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엄마는 내가 책을 읽을 때면 항상 자기를 닮아서 애가 이렇게 책을 좋아한다고 칭찬하고 인정해줬다.
칭찬받을 일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 뒤로도 쭉 책 읽는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라디오 PD의 좋은 점을 글로 써보겠지만, 라디오 PD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사소한 인간인지를 깨닫는 직업이며 동시에 남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인지를 깨닫는 직업이므로 참 근사한 일인 것같 다.
나는 라디오 PD가 된 뒤로 잘 놀라지도 상처받지도 않는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수만 가지 방식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책과 라디오 때문이다. "(책 날개에서)

 

위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우선 책의 맛을 잘 알고 하루하루 그것을 즐겼다.


정혜윤 작가를 보면서 책을 많이 읽는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이 정도는 되야지...생각하며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산골에서 누군가를 모델로 삼아 스스로를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발견인지 모른다.


귀농 전 같았으면 끼리끼리 즉, 책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 차도 마시면서 읽은 책을 서로 권하면서 나누는 대화에는 국화향같은 것이 난다.
국화향은 진하지 않다.


그러나 냄새를 맡고 돌아서면 치맛자락을 붙드는 그 어떤 매력이 있다.

우선 독특한 책의 구성을 설명하려면 목차가 필요하다.
이 책의 목차는 이렇게 이어진다.

 

서문- ‘침대와 책’을 시작하며

꽃 같은 그대가 울고 있을 때
우울한 다음 날 술 한 잔 딱 걸치고 돌아오는 길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싶은 아침
도시의 연인들이 여자들의 가슴 크기에 주목하게 될 때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면 어디로라도 떠나고 싶어!
내 옆의 남자들이 매력 없고 한심해 보이면
별일 없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술
버지니아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사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
고독해서 사랑을 하나? 사랑을 해서 고독한가?
성형수술이 우리를 유혹할 때
오늘은 내 꼴이 추레하고 처량하구나
사랑이 끝나버린 걸 아는 순간
기죽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낯선 사람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마음의 평화가 깨졌다
세월은 가고, 헛되이 나이 들어가거나 늙어간다고 느낄 때
'나 젊어져서 돌아올게' 귓가에 울리는 이 말!
부장님께 된통 깨지고 나서
외로운 날 꼭 듣고 싶은 한 마디
꿈은 있지만 꿈에 이르는 길을 몰라 불안할 때
밉고 싫고 감정은 파도치고 삶은 휘청대는 날
이 글이 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에 바치는 엔딩의 사(辭)
- 지

 

상에서 가장 아늑한 침대

정혜윤의 침대 위 책들

 

 

 

이렇다.

예를 들어 ‘우울한 다음 날 술 한 잔 딱 걸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꼭지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수잔 손택의 ‘우울한 열정’이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이라는 책과 작가가 등장한다.

 

예를 들면,
“내 우울 때문에 다른 인간을 할퀴고 싶지 않은 날에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있거나 아니면 재빨리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토성 편을 펼쳐 든다.


토성편에는 파이어니어 11호 발사 후 5년 정도 경과한 시점인 1979년 8월 26일에 찍은 토성의 고리 사진이 실려 있다....“(본문22쪽)

물론 여기에는 다른 관련 작가도 등장한다.
발터 벤야민...
 
“자신의 우울을 토성적 기질 때문이라고 설명한 발터 베야민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본질적인 외로움, 인생에서의 성공에 대한 공포, 우유부단, 둔감, 느림, 실수를 잘 하는 것, 고집, 서투르고 멍쳐해 보이는 것, 눈에 들어오는 것의 3분의 1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본문23쪽)

 

그렇게 폴 오트서가 소개되고, 수잔 손택이 등장한다.
그들의 책이 이 글에 대한 심증을 더 짙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작가는
“자아식이란 건 우리가 그 무게에 짓눌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해석해야 할 대상이고 만들어 나가야 할 대상일 뿐이니, 지금의 우울로 둔갑한 자의식 역시 우리를 지배하게 해선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날은 제대로 술 한잔 마신 날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한잔 더!”(본문27쪽)


이렇게 그 꼭지를 마무리 하는 식이다.

명쾌하다.
어떤 책에 대해 감동이다, 어떤 교훈이다를 진한 연필로 언급한 것이 아니고, 파스텔로 아련히 그려낸다고나 할까.

요즘 이런 류의 책이 많다.


그 이름만 대면 금방 알아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쓴 책도 많다.
그러나 나랑 아들 선우가 정혜윤에게 끌리는 것은 크게 드러내려 하지 않으면서 등장하는 작품을 살려주고, 그 속의 일부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찡한 울림을 그대로 표현해 준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성격이 좋다.

 

“내 명함에는 회사 이름과 직책 대신 결코 표현된 적은 없었지만 사실은 꼭 알아줬으면 싶은 이력들을 써넣는 사상을 한다. ‘아마추어 여행 작가, 고기 요리를 싫어함, 귀를 뚫지 않았음, 스타킹 수집가, 증명사진 싫어함, 옆얼굴에 더 자신 있음, 자고 나서 푸석푸석할 때 가장 예쁨, 출신 대학과 직책을 말하는 것을 싫어함, ’어쩔 수 없다‘란 말을 싫어함, 예외 없다는 말을 싫어함, 누군가를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함, 누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깜짝 놀람, 프로보다 아마추어를 편애함, 나의 장점을 찬양하는 사람보다 나의 단점에 웃어주는 사람을 편애함.’ (본문 206쪽)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사람은 끼리끼리 좋아죽나보다.


수다는 언제 들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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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아낙의 산골편지--딸도 자라고 엄마도 자라고...
+   [산골편지]   |  2010. 1. 11. 00:45  

그렇게 가물더니 비가 내린다.
여름끝에서부터 가을걷이까지 그렇게 애걸을 해도 깜깜 무소식이던 비가 아니었는지.


이제사 뭣도 모르고 내리는지 아니면 한 해를 잘 갈무리하라는 뜻에서 대지도 씻기고, 세상사에 찌들린 인간의 마음도 씻어주려는 깊은 뜻으로 내리는지 어디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 알 수 있는지.

다만, 안그래도 마음이 구죽죽한데 비까지 박자를 맞춰주니 마음은 물먹은 솜처럼 바닥을 기고 있다는 사실만 감지할 뿐이다.


2009년 11월 29일



밤늦도록 가방 하나 달랑 싸는데 무슨 이삿짐 싸는 폭은 된다.
수건, 치약, 칫솔, 비누, 작은 베개 하나, 컵, 휴지 등을 챙기는 것은 여행이나 서울에 잠깐 다녀올 때 챙기는 것이랑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마음이 다르다.


내일이면 주현이가 병원을 간다.
이번에는 명색이 입원이다.


지난 해, 여름에 작은 수술로 물혹을 떼어 냈는데 이번에는 반대편에 다시 생겨 수술을 또 하게 된 것이다.

지난 번에는 비용은 비싸지만 간단한 시술로 하는 것을 택했는데 이번에는 예민하게 해야 하는 수술이라서 아예 전심마취를 하자고 하신다. 의사 선생님이...


나야 의학쪽에 상식이 없으니 당연히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서동권 선생님은 홈에도 가끔 오시는 분으로 산골가족을 잘 아시고, 따사로움을 간직하신 분이라 그 분의 말씀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내일 입원하기 위해 오늘 가방을 싸고 있다.
칫솔 하나 찾아 넣고 멍해 하고, 수건 하나 챙겨 넣고 물방울 하나 없는 주방을 닦고 또 닦는다.


정신의 반은 신생아 머리 위에 흔들거리는 동물 모빌처럼 공중을 흔들거리고, 정신의 반은 어여 가방을 챙기라고 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

내가 누구의 명령을 받을 처지가 아니나 내가 나에게 시키는 것은 거절 못하는 단점이 이번에는 많이 거슬린다.
다시 가방 챙기기에 집중한다.


이제 겨우 가방의 반은 채웠다.
하던 일을 놓고 이번에는 퍼질러 앉아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내가 융단폭격을 맞은 사람처럼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법, 어린 것을 전신마취하고 몸에 칼을 댄다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나 요즘처럼 이름도 못 들어본 병도 많고, 별의 별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일로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듯, 뼈없는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는 것이 맞는지...

이 세상의 모든 병원의 병실마다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의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희비가 엇갈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건 명함도 못 내밀 일이 아닌지.

사람의 일이란 어디에 견주느냐에 따라 같은 일이라도 생사가 갈린다.

어린 것이 전신마취 한다고 한숨이라면 이제 막 태어나 세상의 공기를 몇 번 마신 신생아도 심장수술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것도 몇 번이나 엄마 젖 빨듯 수술하는 신생아도 있지 않은가.


또 몸에 칼을 댄다고 했는데 몸의 장기 일부를 잘라내고 떼우고, 남의 것을 갖다 붙이고 하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무거울 일이 아니다.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내 얼굴의 반쪽이 슬슬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쪽에서는 슬슬 미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요즘 늘상 입에서 오물거리는 말이 있다. 어린 아이 옹알이하듯...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고, 웃어서 행복한 것’이라고...


이런 일 쯤이야 생각하고 이보다 더한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고 털려고 들면 이런 일은 쨉도 아니다.

마음의 숲에 이런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그까짓 이틀 입원하는 가방이야 쌀 것도 없다는 생각에 지퍼를 닫아 걸었다.

그리고 통창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는 자기 먼저 웃어보이는 달을 보며 그대로 따라 웃었다.
미친 여자처럼 미이라 같은 얼굴을 어찌어찌 움직거려 웃었다.


웃어서 행복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그렇게 날이 샜다.


2009년 11월 30일


포항의 병원까지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주현이는 당일 수술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금식을 지키며 서둘렀다.
잠을 쫓으며 어제 늦도록 준비한 가방을 들고 나서니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어제 가깟으로 물에 젖은 솜을 말렸건만 다시 마음이 젖어들려 한다.
바로 그때를 잘 경계해야 한다.


그런 주변 상황이 나를 바쳐주지 않아도 어제 다짐한  그 평안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말이 그렇지 쉽지 않으나 그래야만 그대로 쭉 그 분위기가 내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을 난 믿는다.


포항에 도착하여 피검사, 초음파 검사, 심장검사, X-ray 촬영 등을 마치고 병실에서 대기를 했다.
주현이가 혹여 긴장할까봐 난 되지도 않는 농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주현이가 더 내 안색을 챙긴다.
그새 내가 나이값을 못한 모양이다. 어린 주현이보다도...

드디어 주현이가 수술실로 들어간다.


그의 움직이는 침대를 따라가며
“주현아, 기도해라.”


그게 내가 나의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말 다 였다.

수술실로 사라진 주현이...


수술실 앞에 기다리는 보호자들 틈에 초보농사꾼과 내가 서있다.

전광판에는 ‘박주현--준비중“이라고 떠 있다.
이제 전신마취를 하겠지.


내 새끼 이름은 이 작고 째진 눈에 금방 들어온다.

한참을 문만 쳐다 보고 있다가 다시 전광판을 보니 내용이 바뀌었다.


“박주현--수술중”

간단한 수술이라 했기에 나름 후한 시간을 예상했는데도 그 시간을 훨씬 넘기고 있고 전광판에는 계속 “박주현 -- 수술중“이란 글이 내 눈을 맞추고 있다.

주현이보다 늦게 수술실로 들어간 여학생은 벌써 엄마의 품에 안겼는데 주현이는 소식이 없다.
점점 초조해졌고, 오른팔이 자꾸만 저리다.


초보농사꾼이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는다.

‘저 애는 부분 마취를 한걸꺼야’
‘안에서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야’.....


말주변 없는 남자가 마누라 진정시키느라 용을 쓰고 있다.

‘이보다 더한 병으로 수술실 앞에서 기다린다면 ...그보다야 기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내 안의 나에게 해댔다.

그건 내가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건 진실이었다.


‘이보다 더한 병이라도 받아들여야지 인간이 별 수 있는가’말이다.

사람이 어찌 푹신한 평지만 걸을 수 있는가.


물웅덩이를 걸어야 하고, 언덕도 올라가야 하고, 내리막길도 내리달려야 한다.
바닷가의 모래처럼 걸을수록 쉽지 않은 길도 걸어야 한다.
울퉁불퉁거리는 길도 ...


그러다 보면 푹신한 오솔길도 나오고, 햇살 가득한 푸근한 길도 나온다.

그런데 자꾸만 수술실 앞에서 잠이 쏟아진다.


옆으로 몸을 뉘이고 싶을 정도로 잠이 쏟아진다.

이제 수술실로 간지 2시간이 넘었다.
몸도 굳어지려 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잠은 쏟아져 앉아 있기도 힘이 드는 순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서동권 선생님이 우릴 부르신다.

가보니 이제 막 꺼낸 조직을 보여주신다.


생각보다 크기가 큰 것같다고 이제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꿰매면 되니 걱정말라는 말을 담배연기처럼 날려주시고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신다.

이제 안심이다.


몸을 일으키려니 오른쪽으로 자꾸만 몸이 기울고 멍한 머리는 여전하다.
한참만에 전광판이 바뀌었다.

‘박주현--회복중’

이제 됐다.
다시 얼마를 기다렸을까 수술실 문이 열리고 ‘박주현 보호자분’이라는 말이 굳게 닫혀 있던 내 귀를 뚫고 들어와 앉는다.

용수철 튕겨나가듯 초보농사꾼과 난 몸을 일으켜 주현이 침대에 몸을 붙였다.


아이는 의식이 돌아와 있었고 조금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그게 고맙다.


병실로 돌아와 얼마 지나면 마취가 완전히 풀려 통증이 시작되련만 주현이는 한 마디 말도 없다.
그저 수술실에 들어가서의 일들을 말할 뿐이다.


속깊은 주현이는 엄마를 가르친다.
그러면서 딸도 자라고, 그만큼 엄마도 자란다.


제 침대 옆에 엄마더러 누우란다.
수술앞에서 기다릴 때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더니 그것이 계속 되었다.
감당이 안될 정도로 머리가 아프니 정신까지 흐느적거렸다.


침대도 좁디 좁더만 저나 편히 쉬어도 통증이 있을텐데 엄마더러 자꾸 자란다.

저녁까지 주현이는 금식을 했고, 나중에서야 초보농사꾼이 병원 근처에서 따끈한 죽을 사다 주었더니 사래 걸리지 않고 잘 먹는다.

이제 밤이다.


난 주현이 병실 간이침대에서 자기로 했고, 초보농사꾼은 나와 늦디 늦은 저녁을 먹고 찜질방으로 갔다.
연고없는 곳이라 이렇구나 생각하니 씁쓸했다.

주현이와 난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2009년 12월 1일

병원의 아침을 무지 빠르다.
그 시간이 참 싫다.
새벽 동이 트기 전부터 간호사의 신발 끄는 소리가 귀에 자꾸만 달그락거려 잠을 잘 수가 없다.

다시 서동권 선생님께 진료를 받고 퇴원을 했다.
집에 돌아오니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아마도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떠났다 병원에서의 시간을 보내서일 것이다.
산골에 왔을 때 낯설음이 깊다는 것은 집 밖에서 마음의 부담이 컸었다는 뜻과도 통한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의 걱정은 안하기로 맘먹었다.


생각이란 것은 단지  생각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생각한 상황 그대로를 끌어당긴다고 믿으니 그쯤에서 걱정의 문을 닫아 걸었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할 일만 남았다.


그게 귀농


전과 귀농 후에 달라진 내 모습 중 하나다.
귀농 전같았으면 별 호들갑을 다 떨고, 세상 어머니 중 가장 속상한 어머니인양 온갖 얼굴연기를 다 했을 것이다.

교과서적인 말이라고 치부했던 것을 이제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고, 그 진실을 이제 훤히 꿰뚫고 있다.
그게 먹힌다는 것이 신통방통하다.


중국 속담에 “염라대왕이 삼경에 부르면 오경까지 살 수 없다”고 했다.
이건 목숨에 관한한 누구도 시간을 연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누구도 언제, 어느 때 나를 태울 배가 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배꼽빠지도록 웃어야 한다.
그래야만 웃을 일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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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풍경--혼자 간 해돋이
+   [산골풍경]   |  2010. 1. 7. 18:37  


새해 첫날 울진성당에서는 동해안 봉평해수욕장 소나무 모래사장에서 해돋이 미사를 드립니다.
해돋이를 보고 나서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새해를 맞이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저 혼자 바닷가로 내달렸습니다.


7시까지 가려면 6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불영계곡을 달리고 달려 죽변 바닷가로 달렸습니다.

초보농사꾼과 선우는 감기가 워낙 심해서 박씨 일가는 그 행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전날 아니, 그날 새벽 4시 넘어서까지 야콘즙 작업을 하고 집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5시가 거의 다 되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기 몸살이 더 심하고 잠까지 더 못자면 안될 것 같다고 부득이 올해 해돋이 미사는 포기해야겠다고 합니다.

저 역시 그게 좋을 것같아 살금살금 혼자 일어나 준비를 하는데 아예 날을 새고 공부하는 선우가 혼자 나서는 저를 배웅합니다.
혼자서라도 잘 다녀오시라고...




다른 해와 달리 성당사람들과 합류하지 않고 혼자 바닷가에서 서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제 새로운 해를 선물 받았는데 난 그 귀한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하나,
지나온 해에 대해 감사할 일도 너무 많았는데...하면서...

혼자 그러고 있으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해가 모습을 드려냈습니다.
그때 옹알이를 했습니다.
홀서 서서...




너무 감사하다고, 지난 해에 얻은 것도 많고 감격스러운 일도 많고 가족 모두 건강한 것이 또한 기적같다고...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에 얻은 것이 너무 많았다고...

그저 감사하다는 옹알이만 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또 뭘 달라고 거지행세를 했을텐데...올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지난 해에 대한 감사만 웅얼거렸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내년 새해에는 더더욱 많은 감사할 일을 가지고 이 바닷가에 서리라고...

이제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렇게 사지 멀쩡히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니 행복한 일이지요.


그러한 행복을 유지하려면 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되 옆도 돌아보며 가리라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귀한 날을 받았으니
복되게 살리라고...




그리고 나서 해돋이 미사를 참석했습니다.
성당에서 오신 분들에게 무료로 떡국도 끓여주어 뜨끈한 국물로 속을 뎁힐 수 있었습니다.
고생하신 분들에게 어찌나 고마운지..




성당에서 마련한 떡국떡을 사고 소고기도 사고 산골로 달렸습니다.
새해 떡국을 끓여주기 위해...


가족에게 뜨끈한 떡국을 끓여 주기 위해 달려가는 그 여인은 행복한 사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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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풍경--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   [산골풍경]   |  2009. 12. 2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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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고버섯을 가족 먹을 것과 조금씩 나누어 먹을 것 정도의 표고목을 했으면 했던 초보농사꾼.
그러다 이웃형과 함께 초겨울에 죽으라 표고목을 했다.

그리고 다음 해 봄.


표고나무에 종균을 넣기 위해 표고목에 드릴로 구멍을 내는 일을 했다.
그 집 것과 우리 것...


하여간 그렇게 함께 일을 했고 초보농사꾼은 결국 '테니스 엘보'라는 병명을 하나 얻게 되었다.
계속되는 팔 통증으로 병원에도 다니고 했지만 농사철이 시작되는 봄에도 계속 되어 사기까지 꺾었었다.

그렇게 해서 생긴 표고목...


봄에 표고가 나와서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사랑방 손님들과 나눌 생각에 어찌나 마음이 좋던지...
결국 조금씩이나마 나누었다.

 



된장찌개에 넣어드시라고...


그러면서 가을에 나오면 또 한번 나누리...
그런데 가물어서 영 소식이 없다.
몇 번을 초보농사꾼 헛걸음을 했다.


그러다 잠시 밭에 한눈 파는 사이 표고가 자라고 비가 와서 썪었다.
얼마나 아깝던지 초보농사꾼


과 난 기가막혔다.

그리고 올 겨울에는 우리도 된장에 넣을 것 하나 없겠구나 했다.


그런데 비가 계속 오지 않고 그런대로 날이 따뜻하여 표고버섯이 자랐다.
생각도 안했는데 ...

이번에는 제대로 맞추어서 땄건만 양이 형편없다.
나누고 자시고 할 양도 안된다.


사람 욕심이 어디 한이 있는지...
전혀 가을에 기대안했던 것에 비하면 많다고 생각해야지...


산골의 표고버섯은 노지에 그냥 두어 자연의 온도대로 자라기 때문에,
그리고 아침 저녁의 기온차가 큰 곳에서 좋은 공기 속에 자라기 때문에 맛이 좋다.

많이 나누지 못해 이쁜 표고버섯을 따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보세요.!!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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