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울진읍에 있는 울진고등학교는 기숙형 고등학교다.
그 울진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주현이가 기숙사에서 나오는 날이다.
2주에 한 번 나오는데다 이번에는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것이라 딸 아이도 지쳤을 것이라 미리부터 여행 운운한 사람은 나였다.
한 해가 가기 전에 조촐하게 네 식구 여행을 가리라.
그렇게 벼르던 날이 닥아왔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이런 저런 일로 내가 심신이 지쳐있었고, 몸살기까지 있어 오한이 들었다.
결국은 여행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이거 아이들에게 한 약속이라 자꾸만 목구멍이 걸렸다.
늦은 저녁에 초보농사꾼과 상의를 했다.
초보농사꾼이 그러면 일단 내일 아침에 결정하고 나서보잔다.
내일 결정하자고 한 것은 초보농사꾼이 요즘 야콘즙 작업을 하는데 그 타임이 새벽에 확인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 야콘즙에 따라 아침에 출발할지를 결정하자는 거였다.
(▲ 퇴계 이황의 생가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로 여행을 준비하는 것, 참 싫어한다.
여행이란 길을 나서는 것 이전부터가 여행이다.
여행 갈 생각을 하며 들떠하고, 행복해 하고, 칫솔, 수건, 치약 등을 챙기며 흐뭇한 웃음을 함께 가방에 담는 것부터가 여행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가장의 명령에 따라 일단 대기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아침에 초보농사꾼은 일단 하던 일을 일찍 끝냈으니 떠나보잔다.
아이들이 신나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검색하고 의견을 나눈다.
(▲ 주현이가 쓴 모자는 지아빠 모자다. 주현이는 머리가 작고 뒤가 짱구라 모자가 잘어울리는데 선우랑 나는 머리가 커서 모자가 전혀.ㅠㅠ)
그러나 오한이 드는 것은 여전한 나로서는 가방 하나에 수건, 치약, 칫솔, 양말 등을 챙겼다.
초보농사꾼이 혹시 자고 올 수도 있다는 말을 흘려서다.
자고 오게 되면 그래도 챙겨갈 것이 있어야 하므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만 챙겼다.
그 기본 중에 곰베개 인형과 무릎담요를 잽싸게 챙겼다.
그 두 가지는 내가 여행을 갔다 하면 차에 먼저 태우는 종목이다.
우선 여행지에서 딸 아이에게 이 베개를 베어주고 싶은 마음과 작은 담요는 가면서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이 담배를 피워 문을 열면 추우니까의 이유도 있지만 그 담요를 워낙 좋아해서, 이런 저런 이유에 여행 때에는 먼저 챙긴다.
두 아이가 시간이 조급한지 의견일치를 금방 본다.
안동으로 가서 이육사 문학관과 도산서원을 먼저 둘러보고 그러면서 다음 여행지를 고민해 보잔다.
둘은 이제 역사적 장소나 미술관 등에 관심이 늘 있었다.
산골에 살지만 방학때마다 서울에 가서 스스로 미술관, 전시회 등을 찾아다니고 느끼고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커가면서 더더욱 그것을 중요시 생각하는 것같아 기특하기 그지없다.
(▲ 이황 생가 터에 선 딸 주현이와 나)
일단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한 차를 타고 나서는 여행이라 그 자체만으로 가족들은 여행에서 얻는 기쁨을 반 이상 얻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곳이 퇴계 이황의 종택이다.
원래의 건물은 없어졌으나 1929년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터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날은 가문의 행사가 있는지 관광객은 없고, 많은 분들이 장을 보아서 종택으로 분주히 들어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먼저 그곳에 사는 분께 구경을 해도 되겠는지 어디까지만 구경하면 되는지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아이들도 그분들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종택을 둘러보았다.
규모로 보면 그다지 웅장하지 않고 아담하게 오밀조밀지어져 옛 선비의 체취가 더 느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날씨는 아주 추웠지만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려는 선우와 주현이를 보며 으스스한 몸으로 뒤따라간 나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으로 종택을 둘러보았다.
다음 행선지는 이육사 문학관이었다.
민족시인, 저항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 본명은 이원록.
이육사가 수인 번호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문학관에 도착하여 설명을 듣고 보니 부끄러움이 들었다.
나는 과연 민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거창한 그 무엇을 따지기 앞서 나 개인이 향기를 나누어야 할 때 얼마나 잽싸게 굴었는지 등이 떠올라 내 나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 육사의 감옥생활)
아이들과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역시 문학관 구석구석을 정신 없이 둘러보며 감탄을 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문학관이 너무 현대적 냄새가 강하다는 것이다.
향토적 색채를 감안하여 지었더라면 시인을 느끼는 마음도 더 푸근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점을 안내하는 분께 말했더니 더러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고,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아쉬워했다.
또 한 가지는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표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오만가지 표지 중간에 끼어있어 눈을 부릅뜨고 찾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민족시인을 찾아가는 길 표지가 그렇게 사적인 표지와 끼어져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쉬움이 남았고 아이들도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아들 선우는 이육사 문학관에 도착하기 전에 시인의 작품 “교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무지 좋아하는 시라고...시를 읊으며 행마다 가슴 절절함을 토로했다.
<<교목>>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이니리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오한이 들어 칭칭 감고 껴입은 옷에도 한기는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아이들과 이런 감동적인 곳을 여행한다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죽어도 살쪘다는 소리는 안한다. 난.)
간단히 이육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육사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 고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하여 대구에서 문화활동을 벌였다.
그후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그때의 수인번호 이육사를 따서 호를 ‘육사’로 지었다.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다시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
(▲ 육사의 모습)
맨 먼저 들어가면 육사의 가시밭길 같은 생애를 재구성한 영상자료를 상영해주는데 그것을 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선우와 주현이는 ‘여기 오길 정말 잘 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이런 배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대견하여 한참을 두 녀석 말에 귀기울였다.
(▲ 아들 선우와 딸 주현이는 여기 와 보길 정말 잘했다며 감격해 한다. )
그 문학관은 안내를 하시는 두 분의 애정이 절절하여 설명을 듣는 사람도 저절로 절절한 느낌이 드는 기분을 전염시켰다.
온 가족이 저와 같은 애정어린 마음으로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문학관도 드물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느낀 점은 아이들이 부모의 느낌을 닮아간다는 거다.
그러니까 더 정확히는 생각과 가치관, 보는 관점 등이 많은 부분 부모를 담아간다는 사실...
더더욱 조심하고, 노력하며 살 일이지 싶다.
(▲ 육사가 사용했던 안경과 친필)
문학관을 나오면 아이들에게 이육사의 시집 한 권과 그 분의 시 달력도 하나 사서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다음은 이황의 묘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표지판이 없다.
어디에도 안내하는 글 하나 없는 곳에 묘가 있었다.
아쉬움이 너무 컸다.
(▲ 이황의 묘소)
그 묘를 찾기 전에 조금 산으로 올라가니 하나의 커다란 묘가 있었는데 선우와 난 그 묘가 이황의 묘인줄 알고 그것에서 조금 있다가 내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여 저 아래 마을의 사람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물으니 한참 더 올라가란다.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거기에 이황의 묘가 있었다.
선우는 감격스러운지 한참 무덤을 둘러보고, 무덤 앞에 앉아보고 , 석상들을 어루만져보고 감격해 했다.
다음은 서둘러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퇴계 이황이 서당을 짓고 유생들을 가르쳤던 곳이며, 사후에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문인들과 유림이 세웠다는 곳이다.
한참을 걸어서 가는 흙길이 참 고왔다.
길 한 쪽으로 유유히 휘감아 흐르는 강은 살얼음 그림자 등으로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러 선우, 주현이의 환호를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 딸 주현이와 나)
서원 한 쪽에는 이황이 직접 지었다는 도산서당이 있었다.
아주 아담하게 지은 작은 공간이었고,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 눈으로만 보기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나는 조심조심 혹여 닳을세라 눈으로만 보았다.
또 그 앞에 들어가지 말아달라는 당부의 팻말도 있었다.
그렇게 구경을 하고 위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찰나,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안으로 들어가고 술래잡기를 하는지 난리가 났다.
이럴 때 못참는 성격.
거기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멀리서 소리를 질렀더니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말
“야, 들어가지 말란다.”하는 아이들 엄마의 소리.
그럼 바로 옆에 부모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아이들을 그렇게 두었다는 말인지.
그러니까 내가 그곳의 관리인인줄 안 것이다.
선우, 주현이도 몇 번이나 혀를 찬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모라고 말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구석구석 구경을 하는데 우리는 광명실이라고 쓰인 곳에 머물렀다.
양쪽으로 똑같이 건축물이 있는데 그것은 책을 보관하는 곳이란다.
동, 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아주 높게 지었다.
광명이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준다”는 뜻이라는 뜻이라며 아이들이 한참을 둘러본다.
책 욕심이 많은 우리 아이들로서는 책을 소중히 여기는 선비의 마음씀이 참 따뜻했던 모양이다.
도산서원을 나온 시간이 네 시.
아점을 먹고 나선 가족들이라 속이 허전했다.
그러나 서둘러 볼 곳이 있다며 간 곳이 경북 산림과학박물관이다.
주현이는 예전에 왔었던 곳이라며 다시 가보고 싶다고 좋아한다.
초보농사꾼이야 산에 사는 사람이니 당연히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선우야 무조건 보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니 코드가 맞았을 것이고...
(▲ 도산서원, 책을 보관하는 서고)
다만 산골아낙 나만 오한이 심하고 편두통이 심해 차에 남아있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박씨 일가들이 안나온다.
푹 빠진 모양이다.
또 호기심 많은 초보농사꾼이 갔으니 얼마나 꼼꼼히 보고 느낄 것인가.
이제 해가 지고 있고 차 안은 추위에 물들었다.
안그래도 오한에 추위에...
기동을 걸려고 보니 키가 안꽂혀 있다.
초보농사꾼이 습관적으로 빼 간 거다. 아이고...
(▲ 선우가 부러운듯 오래 쳐다본다. 이황이 책의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높게 지었다는 서고)
발도 시려오고 머리는 더 아파오고...
세 박씨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차에 올라도 난 아, 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키를 빼 간 것을 안 초보농사꾼.
서둘러 밥먹으러 가잔다.
그러면서 일단 밥먹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오늘 많이 보았고, 날씨가 점점 추워져 산골생각들이 간절한 모양인지 다른 두 어린 박씨도 집에 가자고 한다.
오면서 숯불에 독특하게 굽기로 유명한 집이라는, 그런 집에 꼭 붙어있는 또 하나의 문구 어디 어디 방송에 나왔다고...그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더니 그제서야 얼었던 발이 녹는다.
그렇게 다시 산골로 돌아돌아 오는 길.
아이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소중하고, 느낌이 강하고, 유익한 여행이었다며 기회되면 또 나서잔다.
(▲ 이런 여행을 좋아하는 아들 선우와 주현이가 참 기특하다.)
교육이라는 것,
꼭 학교에서 언어영역, 수리영역, 외국어 영역, 사탐영역이라는 글자에 열을 올려야 함은 결코 아니라고 느꼈다.
아이들의 각각의 연세에 맞게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감탄하게 해주어야 하는 그런 교육이야말로 살아있는 교육이 아닐까.
이육사라면 다 민족시인, 청포도 어쩌구 저쩌구 외워서 다 아는 분이지만 직접 그 분의 생가를 보며, 그 분의 일대기를 설명들으며, 그 분이 쓰던 안경, 친필 원고 등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교과서에 들어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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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