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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농사꾼 _해당되는 글 177건
2010.04.08   귀농일기 지게로 지어나르자!!! 
2010.04.01   귀농일기--결국은 트렉터에 끌려서... 
2010.03.30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안으로 먼저 영글어야 터질 것이 아닌지. 
2010.03.27   귀농일기--산골소녀가 학교다니던 길을 걷는다. 
2010.03.05   귀농일기--밭으로 출근하고 싶다. 
2010.02.08   귀농일기--귀농했으니 누리는 혜택이다. 
2010.01.27   귀농아낙의 산골편지--못먹어도 G0라고 외쳤던 야콘농사의 변천사 
2010.01.12   산골밥상--"얘들아, 야콘 돼지갈비 해먹자~" 
2010.01.11   귀농아낙의 산골편지--딸도 자라고 엄마도 자라고... 
2010.01.07   귀농풍경--혼자 간 해돋이 

 

귀농일기 지게로 지어나르자!!!
+   [귀농일기]   |  2010. 4. 8. 09:37  

 


 (▲ 어둠 속 산골 박씨들의 오늘 미쎤은???)


2010년 2월


폭설로 인해 명절을 정신 바짝 차리고 보냈다.
명절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쏟아진 눈으로 인해 서울로 모시러 가려고 했던 어머니께서 산골의 아들이 위험한 운전하고 온다며 버스를 올라타시고 오셨다.


명절 장보러 가는 데에도 차가 미끄러져 트렉터로 끌어올려와야 했고 그렇게 명절을 눈속에서 보냈다.

명절이 지나면 한시름 놓을줄 알았는데 일은 계속 심심잖게 생긴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살이도 이와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고비 넘기면 다음에는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겠지 하지만 그거 넘으면 또 고개...
그렇기 때문에 그저 대단한 무엇을 바라기 보다는 그때 주어진 상황, 그것이 고난이든 행복이든 온전히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을 터득한지 오래다.


명절 훨씬 전에 효소 병이 떨어질 것같아 주문을 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당분간 병을 안만들고 2월 말이나 만든단다.
공장에서 이렇기도 하나...싶어 급한 마음에 조금 비싸지만 대리점에 몇 박스만 주문해 두었다.





그런데 택배에서 찾아 차에는 실었는데 눈이 많이 내려 차를 국도가에 두고 오는 바람에 내리지를 못했다.
다음에 아찔아찔해가며 다리결까지 끌고는 왔는데 이젠 거기서 집까지 옮기는 일이 문제였다.


무거운 게 문제가 아니고 길이 미끄럽다는 것이다.
잘못하여 미끄러지면 병이라서 다칠 염려도 있고 말이다.


결국 아이들이랑 나섰다.
만만한 놈이 선우라고 선우는 두박스를 묶은 것을 어깨에 지어주었다.
조금 가더니 어깨가 아프다며 끌어안고 가는데 끌어안고 가면 그 언덕과 눈길을 가려면 더 고생한다고 했더니 해보겠단다.





산골살이에서 주현이라고 우린 예외는 없다.
주현이는 그대신 한박스다.
이 놈 역시 도와주는 것이 몸에 배여 박스를 들고도 벤자민이랑 놀고 있다.
그게 보기에 좋다.





선우랑 같은 무게를 들으려니 미안스럽다.
나도 선우랑 같은 무게를 들고 걸어올라가는데 선우가 고생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깨에 매준다고 하니 끈이 풀려 그냥 가겠단다. 아빠나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시라고 걱정까지 하며 나를 돌아보고 서있다. 무거운 것을 들고 말이다.





그렇게 빈병을 옮겨 놓았으니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문제는 뭐냐 하면 택배차가 국도가에서 못올라온다는 것이다.
명절 전에 주문하여 연휴로 인해 택배에서 일찍 마감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기다린 분들도 계신데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발송을 해야 했다.


무슨 수로..

생각 끝에 지게에 지고 나르기로 했다.
고3인 선우가 다시 동원되었다.
인상 한번 안쓰고 농담하며 오는 선우다.




지게에 올려주고 송장이 눈에 젖지않도록 비닐로 씌웠다.
일단 한번 다녀오면 두 번째는 더 노련해진다는 선우
그러면서 한 마디 던지고 간다.
“아빠, 옛날에는 제가 아빠를 도와드리는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힘든 일을 전담하는 수준이예요.^^ "하며 웃고 간다.




선우가 두어번 왔다갔다 하고 나머지는 내가 들고 나섰다.
선우가 눈보라 속에서 벤자민이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섰다.
등에는 지게를 지고 그 위에는 고객들에게 갈 효소를 지고서...


저 놈은 아마도 눈길을 걸으면서 지가 좋아하는 카프카를 생각했을 것이다.

매번 그의 천재성 등을 말하며 감탄을 하던 녀석이고 아마도 이 엄마가 그런 선우를 위해 카프카의 책을 거의 사주었을 것이다.





저 아래의 차에 싣기는 했는데 미끄러운 길 내려가는 것이 또 한번의 난코스이다.

산골에서 살면서 아내와 삶의 기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다.
어디에서 살면 그렇게 생각 안하고 살까.
하지만 그것이 여기서의 삶에서는 절실히 실천하며 산다.




고객들이 기다리는 생각에 병을 그렇게 날라야 한다는 생각이 그냥 당연했고, 지게 아니라 하나씩 품에 안고서라도 택배를 보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들을 심부름시키고, 급한 일은 같이 하는 버릇을 들이는 것 또한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 지혜를 얻으라는 생각이 우리 부부의 기본 교육이다.


일단 도와달라고 부르면 애들은 표정이 밝다.
“아빠, 오늘의 미션은???” 하며 웃고 온다.
그게 고맙고 기특하다.


이렇게 발송을 하고 나니 이제 한시름놓은 기분이다.
당분간은 이렇게 지게에 지고 비닐로 덮고 하여 산야초 효소, 야콘효소, 솔잎 효소야콘즙을 발송해야 한다.
그게 또한 의미있고 신선한 일로 닥아오는 눈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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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일기--결국은 트렉터에 끌려서...
+   [귀농일기]   |  2010. 4. 1. 14:53  


2010년 2월

 

눈으로 고립되고 나니 아내가 제일 근심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차례음식을 차릴 장을 봐와야 하는데 눈 때문에 읍을 갈수없어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수있다고 해도 며느리입장에서는 그말이 그다지 안심이 되지않는지 계속 밖에만 내다 보며 걱정이다.

이러다 마누라 잡겠다 싶어서 오전에는 야콘즙작업을 하고 점심을 먹은 다음 부랴부랴 나섰다.


사실 아내를 위해서 나선 것이라기 보다는 그때 안나서면 어두워져서 돌아오니 눈길걱정이 앞선 것도 있었다. 사실은 ...
해가 있을 때 돌아와야 그나마 눈이 빙판을 이루지 않기때문인데 지금 거북이 걸음으로 가다가는 해 있을 때에 돌아오기가 어렵지 싶다.

일단 다리결에서 국도가까지 차가 내려가는 것이 문제다.


일전에 어머님을 읍에서 모시고 올 때 조금이라도 많이 쌓인 눈길을 안걷게 해드리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다리결까지 가지고 올라와서 내려가는 길이 걱정이 되었다.

국도가까지는 급경사도 많고, 위험코스도 많으니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안갈수도 없다.
무조건 가야 하는데 장을 보러...

일단 둘이 나섰다.


장을 보고 어제 친구와 대구에 갔다가 폭설로 산골로 돌아오지 못하고 친구집에서 잔 주현이를 데리고 들어와야 한다.
폭설이 내리자 서울가서 어머님을 모시고 오는 일이 제일 걱정이었고, 두번째는 읍에서 학교를 마치고 연휴를 보내러 오는 아들 선우를 산골로 들이는 일이 걱정이었고, 하필이면 졸업기념으로 친구와 당일코스로 대구여행을 간 주현이를 산골로 데려다 앉혀 놓는 일 또한 걱정이었다.

 

선우는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걸어와야 하니 장화를 하나 사놓고 대기하라고 했었다.
파란색 장화를 사놓고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산골소년.


'저 놈들이 나중에 커서 이 모든 일이 그의 필림에서 반짝이겠지...'이건 내 머리에서 나온 표현이 아니고 아내의 표현이다.

일단 사람만 들이면 나머지야 최선만 다하면 되는 일이라며 아내가 안절부절을 못한다.
일단 어제로 어머님과 선우는 우여곡절끝에 산골로 잘 모셔왔는데 문제는 주현이었다.


여자 아이라 되도록이면 산골로 데리고 오려 했으나 밤에 울진읍으로 도착하는 바람에 도저히 되질않았다.

드디어 주현이도 오늘 산골로 데리고 오면 이제 폭설이 와도 마음을 졸이며 불안할 일은 한풀 꺾였다.

장보러 국도가까지 가는 길이 무슨 굴을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눈으로 만든 굴을 빠져나가는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온천지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입구까지 가는데 한곳에서 미끌하는통에 진땀이 났지만 국도가까지 잘 나갔다.
그리고 읍으로 가는 길은 제설차가 분주히 다니며 눈을 치워주었지만 중간중간 미끄러운 위험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했다.

명절전이라 제설차도 몇 대가 돌아다니며 치우고 치우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이 그쳐야 저분들도 명절을 쇠러 갈텐데 이런 식으로 눈이 계속 오니 명절이고 뭐고 국도에서 지내게 생긴 것 같다.

읍에 도착하여 주현이 먼저 불렀다.
대구에 가서도 아빠가 눈이 많이 오니 빨리 오라고 하여 제대로 구경도 못했다며 웃는다.




‘너도 자식키워봐라....아빠 맘 알거다. 표현이 그래서 그렇지 나도 부드러운 아빠다. 이눔아.’

읍에서도 부랴부랴 아내가 장을 본다.
내가 외아들이다 보니 늘 혼자서 무거운 장을 봐서 혼자 음식을 다 만든다.


내가 도와주지도 못한다. 일도 못하고 저지레만 해서.

종이에 적어온 것을 보고 또 보고 , 다시 돌아가서 무엇을 사고 정신없이 아내가 뛰어다닌다.
산골에서는 이런 날 장을 제대로 못봐가면 다시 나오지도 못하고 옆에 슈퍼에서 사지도 못하고 아주 난감해서 이런 날 장보게 되면 며칠 전부터 아내는 종이 적고, 적고 중얼거리고 그런다.

 

마침 장날인데 아내는 아는 사람도 많아 장보랴,이러지리 인사도 하랴, 안부도 묻고 바쁘다.
나야 뒤에서 짐이나 받아들지 잘 모르니 그저 따라 다니다 짐이 많아지면 주차장에 있는 차에다 싣고 다시 와서 짐을 받아 싣고를 반복했다.

그나마 주현이가 이제는 엄마를 잘 도와 둘이서 다니는 모습이 좋아보인다.


그러고 다니다 주현이가 대학가면 혼자서 주현이 생각하며 아내는 쓸쓸해할 것이다.
장을 다 보고 나니 시간이 꽤 되었다.

 

서둘렀다. 그러지 않으면 어두워져서 올라가야 하고 그러면 눈도 얼어서 더 미끄러질 확률이 높아진다.
서둘러 밟으려니 다른 차들이 엉금엉금 앞에서 길을 터주지 않는다.

 

겨우 마을입구로 들어서서 난코스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갔을까 첫 번째 걱정한 코스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 언덕을 못올라가고 미끄러지는 차.

 

다시 후진을 하여 가속도를 붙여 시도해 보았으나 결국은 고무타는 냄새만 산골에 진동을 하고 다시 미끄러진다.
다시 하다가 후진하면서 그만 계속 미끄러지다 가드레일을 박고서야 차가 멈췄다.
모두가 초긴장상태.
가드레일이 없었다면 아마 개울로 빠졌을 것이다.

 

 

 

 

 

아까 읍에서 사온 눈삽을 꺼내 바퀴 뒤의 눈을 파보지만 허사다.
두어번 눈을 파다 그나마 새로 산 삽자루가 똑 부러진다.
어쩜 그렇게 약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을에 큰 트렉터를 가진 분이 임성도 전 이장님이다.

 

 

 


그래서 임이장님께 전화를 걸어 차를 좀 끌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기다리라며 어디냐고 하신다.

오늘 하루 종일 마을 눈치우시느라 고단한 몸을 풀고 계신 것같은데 내 부탁에 두말도 않으시고 지금 내려간다며 혹시 고리는 있느냐고 하신다.
고리가 없다고 하니 걱정말고 그냥 있으란다. 알아서 챙겨간다고...

트렉터를 기다리는 동안 아내는 부러진 삽으로 눈을 치운다.
우리는 트렉터가 와서 끌고가지만 마을분들 차라도 우리처럼 미끄러지지 말라고 굳어진 눈을 깨야 한단다.

 

 

 

 


그래가지고 되지도 않으니 그만 하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저렇게 용을 쓰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손등을 다쳐 피가 나고 부풀어올랐다.

 

 

 

 

 

지엄마를 따라 이번에는 주현이가 눈을 파고 난리가 났다.
마을입구에서 집에 있는 선우에게 전화를 했었다.
이제 곧 다리결에 도착하니 거기로 짐을 들러 나오라고

 

 

 

 

그 놈이 다리결에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걸어오고 있다.
기다려도 안와서 이거 무슨 일 난 게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개울을 쳐다 보며 왔단다.
아이가 걱정한 티가 역력하다.

 

우리 차가 미끄러져 있는 것을 보니 그나마 안심인가보다.
자기는 개울로 떨어진줄 알았다고...

 

 

 

 

한참을 기다렸나 보다.
한 30분은 기다린 것같은데 날은 벌써 어두워져 있다.
아내가 주현이를 집으로 먼저 걸어서 올라가라고 보낸다.

주현이더러 할머니가 우리가 이 정도로 안오면 분명히 걱정되어 그 미끄러운 길따라 내려오실 분이니 가서 아빠가 아는 분을 만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니 걱정말라고 하고 할머니랑 있으란다.

 

난 그 깊은 뜻도 모르고 짐 같이 날라야 한다고 했으니 ....

주현이가 가고 멀리서 트렉터소리가 나더니 불빛이 보인다.

 

 

 

 

우리 집에서도 한참 위에 사시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천천히 오시느랴 늦으신 모양이다.
눈을 치우며 내려오고 계시다.

 

 

 

 

 

우선 고리를 만들어 우리 차에 끼웠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트렉터 아래에 걸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차를 끌고 가는데 문제는 직선 거리는 상관없는데 곡선으로 된 곳에서 트렉터의 긴 끈이 차를 잡아끌면 곡선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직선으로 가기 때문에 그게 위험하다.

일단 차에 온가족이 타고 출발을 했다.


트렉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긴 끝이 팽팽하게 되자 소리를 내며 우리차가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 가드레일에서 떨어져 비탈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 곡석으로 된 곳이 두군데 있는데 그곳이 문제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계곡쪽으로 떨어지는줄 알았다.
트렉터는 직선으로 끌고 가고 아주 굴곡이 심한 곳에서 거의 떨어질 정도의 거리에서는 아내도 아이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해도 아내는 트렉터를 세우라는 트락션을 울리라고 했지만 그냥 갔다.


겨우 그곳도 빠져갔다.

이제 차는 여기까지 밖에 못간다.


다리결에 차를 세워두고 거기부터는 장봐온 것을 다 날라야 한다.

 

 

 

한번에는 안되고 일단 끌것에 끌고 들고 가고 나머지는 다시 내려와서 옮기기로 했다.
아내가 집에 도착하여서야 큰 숨을 쉰다.
차가 미끄러져 애가 많이 탔고 곡선길에서 직선으로밖에 트렉터가 끌어주지 못해 개울로 떨어지는줄 알고 겁을 먹었다며 이제 명절 다 쇤 것같다며 주저앉는다.

 

어제는 어머님을 읍에서 모시고 오는 것도 폭설로 큰 일이었는데 오늘은 또 장을 봐오느라 큰 일이었다.
가드레일을 박느라 뒷 범퍼는 박살이 났지만 그래도 사람 다치지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어머님은 주현이가 와서 아빠가 아는 분을 만나서 이야기하시느라 늦으시는 거라고 하여 그렇게 믿었다며 세상에 미끄러져 얼마나 고생하고 놀랐냐며 애들을 만지신다.


주현이가 안왔으면 지팡이짚고 내려갔을 거라고.

뭐니뭐니 해도 오늘 트렉터로 그 어둡고 먼 길을 내려와 주신 임이장님께 고마운 마음이다.
산골에서는 이렇게 서로서로 도우며 산다.




차가 빠지면 서로 다른 일을 재껴놓고 빼주러 가고, 이런 일도 그렇고 ...

눈이 펑펑 쏟아진다.


장을 봐온 것이 꿈만 같다며 아내가 긴장을 푼다.
하얀 눈은 잠도 안자고 계속 오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보세요!!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안으로 먼저 영글어야 터질 것이 아닌지.
+   [산골편지]   |  2010. 3. 30. 00:35  


2009년 12월

 

빨래줄에 빨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걸려 있는 것이 아니고 죽지 못해 매달려 있는 듯, 망한 집 집구석에 널브러진 옷처럼 빨래가 매달려 있다.

이런 모습만 봐도 요즘 내 정신줄이 어떤지 알 수 있다.


햇살은 빨래가 어떤 모습인가에 상관없이 뽀송뽀송할 때까지 빨래에 앉아 그를 말려준다.
빨래가 정갈하게 걸려있든, 팔은 팔대로, 바지가랭이는 가랑이대로 미친년 똥싸듯 널려 있든에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따사로움으로 어루만져 준다.

부부도 연애질할 때와 같은 따사로움으로 평생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

 

오늘도 빨래를 내던져 걸 듯 간신히 불에 걸어두고 볼일 보러 읍으로 내달렸다.
읍에 가면 한두 가지 일로 마무리되는 날이 별로 없다.

 

철물점에 들려 초보농사꾼이 사다달라는 공구도 사야하고(그 놈의 공구는 허구헌날 사 나른다. 그건 쓰고 제자리에 못 놓는 초보농사꾼땜에 그렇다. 이그),
산골까지 못갖다 주니 며칠 기다리라며 퉁명스럽게 내던지는 말이 듣기 싫으니 택배도 직접 대리점에 직접 방문하셔서(?) 찾아야 하고,
옷 수선도 해야 하고,


머리가 불쏘시개처럼 되면 정신까지 사나우니 지붕개량도 하러 미장원에 가야하고,
몇 푼  들어앉아 있지도 않은 통장에서 돈도 꺼내야 하고,


엊그제 거센 바람과 놀아나다 몸마저 다 망가진 플라스틱 채반도 사야 하고,
서점에 주문해 놓은 아이들 책도 찾아야 하고....

 

하여간 대여섯 가지 볼일은 기본이다.
정신없이 이 일들을 해치워야 마지막 코스인 도서실에 들려 책도 빌리고, 재수 좋으면 거기서 몇 줄 읽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오늘도 그랬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보고 나서는 어느 집에서 내 뒤통수에다 대고
“그거 알아요?”한다.

 

들어 볼 도 없이 알긴 뭘 알겠는가.
산골에 틀어박혀 저 잘났다고 살다 조용필 노래 가사처럼 가끔 먹이를 찾아 나서는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는 인간이 뭔 일을 알까?

 

내용인즉,
같은 직장에서 눈이 맞았다가 큰 일이 터졌다는 거다.


처녀, 총각이 눈이 맞았다면야 요즘 국가 차원에서 발 벗고 나서는 ‘아이 낳기’에 한 걸음 앞서는 일이니(언제는 낳지 말라구 국가가 나서더니...)문제될 리가 없을테고.... 좋지 않은 머리로 이럴 때는 판단도 빨리 한다.

내 판단대로 그랬단다.


각자 가정가진 사람끼리.
결국 칼부림이 났다는 거다.

 

산에 틀어박혀 살다 내려온 사람에게가 아니어도 이건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오늘 읍에서 할 일을 빼곡이 적은 노란 포스트잍을 붙인 손가락이 한동안 떨렸다.

 

이럴 때 작은 충격이 머리를 더 하얗게 만들기 때문에 난 그 노란 포스트 잍을 잘 붙들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맹해졌다.

다른 거 아니다.


물이 질질 흐르는 빨래가 뽀송뽀송해지도록 어루만져 주는 햇살 같은 따사로움이, 애틋함이 부부 사이에 없어서다.

출근을 안했으면 모를까 출근을 했다면 햇살은 당연하게 제 할 일을 빈틈없이 해놓는다.
결혼을 안했으면 모를까 좋아죽겠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떠들어대는 예식을 올린 이상 마음은 언제나 같아야 한다.

 

그때의 사랑이, 그 온도가 아니면 그 대신 정이, 믿음이, 애틋함이 들어앉아 늘 평상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부부 아닌가.

만에 하나 혹여 똥밟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옛날처럼 얼굴도 안보고 부모가 결정한 혼사도 아닌데(그 당시의 이혼율이 더 낮았지만), 이유야 어떻든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닌지.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은 부부간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남편, 아내가 아니라 없으면 안될 일을 떠올리며 이겨내는 여유는 없었는가보다.

이건 말이다.


가정가진 두 사람이 눈이 맞은 이유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떤 이유에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남의 가정사에 오래 말할 뜻은 없다.


다만 누구라 하더라도 어제의 일은 부족한 나의 행동이었다면 내일은 보다 더 나은 내가 되면 된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알베르 카뮈는
“결국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라”고 했다.

밖으로의 이웃 사랑도 중차대한 일이겠지만 우선 안으로 안으로 사랑이 영글어 석류터지듯하면  밖으로 밖으로 그 사랑이 새끼를 쳐 더 따숩게 번져 가리라 믿는다.

 

이거 카뮈고 뭐고 말할 처지가 아니다.
오늘 점심에 달랑 김치찌개에, 톳나물 두부 무침 하나 해놓고 산골을 떠났으니 이제 팔자에 없는 ‘책읽는 일’ 걷어치우고 가족 품으로 돌아가련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도서관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일기--산골소녀가 학교다니던 길을 걷는다.
+   [귀농일기]   |  2010. 3. 27. 14:07  

2010년 2월 10일

 

오늘은 딸 주현이의 졸업이다.
아내는 딸이라 그런지 이것 저것 선우때와 또 다른 마음이 생기는지 어제 늦도록 꼼지락 꼼지락거리며 뭘 하더니 아침에도 뭘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인다.

 

 


[왼쪽에서 두번째 아이가 딸 주현입니다. 낯이 익어서 보니 일전에 산골집에 놀러 왔었던 친구들입니다.)

이제 학교차를 타고 다니는 시절도 이제 끝이다.
마을입구에서부터 걸어서 집까지 올라오는 것을 즐겼던 딸아이다. 엠피쓰리를 듣고 길바닥에 개구리가 죽어 있는 것도 안타까워 하면서 딸아이는 걸어서 학교차를 타고 다녔다.

 

 

 

여름이면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가에서 엄마, 아빠에게 준다고 산딸기를 따오곤 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고 대견했지만 표현을 못했다.

 

 

 

요즘은 사탕처럼 달콤한 아빠(이런 표현이 난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렇게들 표현한단다)들이 많아 아빠가 딸에게 자상하게 책도 읽어주고 같이 놀아도 주고 선물도 하고 그런다지만 난 그런 부류는 못된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귀농 전보다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할수 있다.
자가진단이지만.

 

 

 

비오거나 눈이 오면 지엄마가 태워다 주기 때문에 어떤 때 보면 비가 온다고 좋아하기도 했으니 본인인들 왜 그렇게 걷는 것이 귀찮지않았을까.

그래도 초등학교때부터 군말 한번 없이 봄여름가을겨울없이 걸어서 다니는 것을 보면 기특하고 그랬지만 난 워낙 표현이 잘 안되는 아빠지만 오늘만큼은 수고했다는 말은 해주고 싶은 날이다.

 

 

 

여하튼 오늘은 아빠 말에 거역한번 못하고 잘 자라서 그렇게 친구들이랑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즐거워 하는 딸아이를 보니 대견했다.

딸아이는 친구생일이라서 축하자리가 있다며 읍에 남았고 선우는 선우대로 남고 우리 부부만 산골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읍에서부터는 계속 비가 왔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눈이 펑펑 오기 시작한 거다.

서둘러 밟았다.
산골의 눈은 금방 쌓여 어떤 사태를 불러올지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결에서 조금 올라가서 집으로 들어서는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차가 미끄러진다.


힘껏 밟아 돌진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문제는 내일 서울로 엄마를 모시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명절을 산골에서 지내기 때문에 엄마를 모시러 서울로 가야 하는데 눈이 예상보다 많이 오기 시작한다.

아내와 상의 끝에 차 두대 다 국도가에 내려다 놓기로 했다.
아내는 쉬라고 하고는 한 대씩 내려다 놓았다.


한 대를 내려다 놓고 다시 한 대를 내려다 놓고...

다 내려다 놓고 그냥 올라오면 서운하다.


오늘 내 딸 주현이의 기쁜 졸업식도 있었는데 아내가 말하는 방앗간에 들려 막걸리 한잔 하고 가야지...

유이장님댁에서 막거리를 마시고 혼자 올라오는데 저 멀리서 작은 키에 우산을 쓰고 내려오는 사람이 보인다.
나를 마중오는 아내다.

 

눈이 쏟아지니 우산을 쓰고 내려온다.
얼굴색이 아주 좋으시다며 놀린다.
기쁜 날이라 한잔했다고 했다.

 

 

 

아내는 우산을 쓰고 내 뒤를 따라오고 난 시원한 눈을 맞으며 간다고 앞장을 섰다.
요즘 계속 야콘즙 작업을 하기 때문에  바빴는데 이렇게 뒷짐을 지고 딸 주현이가 걸어다닌 길을 걷자니 다시 새삼스러워졌다.

 

 

 

내일은 어머님 모시러 가야 하는데 눈이 그쳤으면 좋겠다.
그런데 쉽사리 눈이 그칠 것 같지가 않다.

 

집 처마 밑에서 눈오는 모습을 보며 졸업식장에서 못한 말을 뱉어보았다.
“주현아, 졸업 축하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귀농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일기--밭으로 출근하고 싶다.
+   [귀농일기]   |  2010. 3. 5. 14:51  

 

2010년 2월

 

산골의 날씨는 아침 저녁으로 뿐만 아니라 벌건 대낮에도 모가지를 바짝 오그릴정도로 춥다.
아래, 위 내복을 입는 것은 기본이고 그 위에 작업복 그 위에 오리털 잠바 정도는 걸쳐 줘야 육신을 제대로 펼수가 있다.

 

야콘즙 작업을 할 때는 그 안이 증탕기의 열로 겉옷을 벗고도 작업을 할수 있지만 문 하나만 열고 나오면 안과 밖의 차이가 엄청나다.
그러나 이틀만 있으면 입춘이다 보니 봄이 어디쯤 와 있는지 자꾸만 밭쪽을 올려다 보게 된다.


귀농 초에는 눈도 엄청 많이 왔고 날도 더 매섭게 추웠었는데 점점 갈수록 눈도 놀랄 정도로 쏟아지지 않고 매섭던 추위도 조금 위세를 덜떠는데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 날씨의 변화로 도 그렇게 꽁꽁 얼지 않은듯 뭔가 꼼지락거리고 올라 올 것만 같아 을 자꾸 들여다 보게 된다.
잃어버린 돈을 찾는 사람처럼..

농부가 자꾸 밭쪽에 관심을 갖게 되면 봄이 멀지 않은 것이다.


아직은 두꺼운 얼음이 이불처럼 덮여있지만 그 아래에는 파란 물결이 봄처럼 농부의 마음을 자극한다.

이렇게 봄인듯 콧구멍에 바람을 들이지만 4월에도 자중하라고 산골에는 눈이 온다.


입춘을 떠올리는  때지만 아직도 몇 번의 눈이 산골을 찾아올 것이고, 세찬 추위도 몇차례 드나들 것이다.
날이 조금 풀리면 야콘즙을 짜고 난 찌꺼기를 작년 가을에 아내와 심었던 개복숭아 묘목 주위에 줘야겠다.


그러면 어린 묘목 주위에 풀도 덜나고 그것이 거름이 되어 많은 열매를 열 것이다.

빨리 봄이 되어 밭으로 출근하고 싶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www.skyheart.co.kr) 에서!!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일기--귀농했으니 누리는 혜택이다.
+   [귀농일기]   |  2010. 2. 8. 15:50  

 


2010년 1월 2일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다 보니 방학이 없다.
그나마 이번에는 연말에 며칠 함께 산골에서 보냈는데 애들이 참으로 좋아한다.
산골을 저렇게 좋아하니 귀농을 주동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일이 아닐수 없다.


선우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아이를 앞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었다.
고등학교부터는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보내겠다.


어려서는 자연에서 무조건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산골로 데리고 왔지만 이제 고등학교부터는 너희들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선우가 신중하게 듣더니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신중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며칠 후 우리 가족이 다시 마주 앉았을 때, 선우는 산골에 남기로 했단다.
서울로 가는 것도 싫지는 않단다.


더 넓은 곳에서 많은 아이들과 서로 자신을 비교해 가면서 자신을 다듬어 가는 것도 좋다고...

하지만 그 좋은 것보다 산골을 떠나는 것이 훨씬 싫기 때문에 산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마음을 정했단다.
어린줄로만 알았는데 이 놈 이제 믿어도 되겠구나 그때 생각했다.


그 믿는다는 게 그동안 못믿었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말에 책임도 지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알아서 고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되도록이면 아들의 말에 힘을 얹어주어야겠다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벌써 새해로 고3이 되었다.


산골을 좋아하는 아이라 산골에서 며칠 온가족이 뒹굴고 놀고 책보고 야콘즙 노가다 하고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단다.


이제 내일이면 두 놈 다 학교 때문에 이 즐거움도 막을 내려야 한다.
아침부터 애들 인상이 시원찮다.


기운이 없고 말수가 우선 없어졌다.
성격이 섬세하지 못한데 귀농하고 점점 성격도 조금씩 변하는지 이제 눈에 그런 현상이 잘 들어온다.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ㅎㅎ


아내도 벌써 말이 별로 없고, 어제  아니 오늘 새벽까지 웃고 떠들고 하던 것은 어디로 가고 모두 기운이 없다.
저녁을 먹고나니 더 심해졌다.



 


“자, 가자.”
어디로 가느냐고 모두 쳐다본다. 정신나간 사람 쳐다보듯이 한다.
어디는 어디야 야간 산행이지.


우선 아내가 말린다. 그 이유는 멧돼지 때문인데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며칠 전에 옆 동네 사는 사람이 산에 갔다가 멧돼지를 떼로 만나 나무위로 올라가 화를 면할수 있었다고 하는 소리에 겁많은 사람이 더 난리가 났다.


하도 그러기에 임도 입구까지 간다고 하고 나섰다.
주현이는 낮에 벤자민(사냥개)을 데리고 충분히 운동을 했다며 안간다고 쪽 뻗는다.
그럼 선우랑 둘이서 간다고 하니까 아내가 굳이 따라나선다.


분명히 걱정이 돼서 따라나서는 것이 틀림없다.

집에서 한참 내려온 곳에 임도가 있는데 그 입구에 이르니 약속대로 돌아간다.


‘그런게 어딨어. 말이 그렇지 뭐 뜻이 그런감.‘

들은척도 안하고 가니까 뒤에서 아내가 난리가 났다.
멧돼지 나오면 큰일난다며 손전등을 가지러 집에 갔다 온단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손전등.


조금 가다가 금방 갈테니 조금만 가자고 아내를 구슬렀는데 겁많은 아내는 금방 남편이랑 아들을 멧돼지 입에 넣을 것만 같은 모양이다.


저런 새가슴으로 어떻게 이 깊은 산중으로 들어와 살수있다고 나를 따라왔는지 고마운 일이다.
아내가 안보인다.


뒤돌아 손전등을 가지러 가는 모양이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그만 갈테니 빨리 따라오라고...


눈이 조금 온 날이라 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업어 준다고 꼬셔도 자꾸 손전등을 가지러 간단다.
선우가 가서 엄마를 데리고 온다.


선우 말이 아빠가 그런다고 안가실 분 아니니까 그냥 맘편히 재밌게 가자고, 아빠는 한번 한다면 하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설득을 했단다.
아들 말에 넘어간 아내가 선우 옆구리에 끼어 올라온다.


약속한 곳보다 한참 더 오니 이제는 가는 거리가 워낙 멀어 손전등 얘기는 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내가 되돌아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을테지만 멧돼지가 너무 무서운 모양이다.


그 얘기 말고도 동네에서 멧돼지를 보았다고 한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더 그랬을 것이고 이곳에 처형이랑 운동을 왔을 때도 어김없이 멧돼지를 보았기 때문에 아내의 그 마음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짓도 못한다.


위험을 무릎쓰는 일이야말로 기억에 남고, 추억이 되고, 얻는 것이 크다.
그렇게 생각하니 귀농이 그러네.


또 선우를 데리고 온 데에는 녀석의 기분도 전환시켜줄 마음도 컸지만 죽을 고생을 하거나, 안해본 일을 하게 되면 그만큼 가슴도 크고, 멋진 경험도 쌓인다고 생각한다.

생각같아서는 빙벽등반이라도 함께 가고 싶은데 아쉽지만 야밤에 눈이 쌓인 산길을 굽이굽이 도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이다.


작년인가 이 길에 눈이 정말 허리까지 왔다.
그때 둘이서 나섰다. 그 긴긴 산을 넘어갔다 오자고.
눈이 너무 와서 걸음을 뗄수가 없었다. 그나마 앞에 선 사람 뒤에 가면 뒷사람은 조금 덜 힘들 정도였기 때문에 우리 둘이 번갈아가면 앞장을 서곤 했었다.


그때 선우는 이 눈속에서 죽는줄 알았다고 했다.
눈은 많아 되돌아갈수도 없고 앞으로 너무 많이 남은 길을 갈수도 없고 게다가 날은 저물어가고 배는 너무 고프고 딱 죽는줄 알았단다.


정말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죽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줄 아느냐고 하면서 우린 목적지까지 다녀왔고 아내는 그때도 추운 밖에 서서 안온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그 추억은 지금도 겨울만 되면 선우가 읊은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야밤에 좋은 경험을 만들자는 것이 아닌가.


 


달빛에 의지하여 어둔 산길을 올라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설악시’를 읊조렸다.
선우가 감탄을 한다.


내 시에 감탄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달빛에 감탄을 하며 내게 고맙다고 정말 너무 멋진 경험이라며 가던 길 멈춰 서서 난리다.

달이 산등성이에 숨었다가 우리가 다시 언덕을 올라가면

등 뒤에서 환히 나타나 비춘다나 뭐라나.
책을 많이 읽은 놈이라 자연에 대한 감탄도 대단하다.

선우가 가던 길 서서 아빠 고마워요, 고마워요 소리를 몇 번이고 하니까 아내는 신바람이 난 모양이다.
애가 감격을 하니 멧돼지 생각은 이제 잊은 모양이다.


“선우야, 멋지지? 정말 그렇지?”
난리가 아니다.


그렇게 내가 애초부터 가려고 했던 곳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엔 아내가 신바람이 났다.
자기도 너무 좋다고...


일전에 넘어져서 아픈 발목이 시큰거린다고 하면서도 달빛에 눈이 온 산길을 이 야밤에 다녀온 것이 좋단다.

아들 선우가 그때의 감동을 글로 썼다니 내 글 밑에 붙이려고 한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복잡해도 잠깐씩은 일상을 벗어나서 안하던 짓도 하고 자연의 깊은 날개 속으로 들어가 보면 새로운 용기가 생긴다고 나는 확신한다.


초보농사꾼 박찬득


(아래 글은 아들 선우가 쓴 글이다)

<B><< 휘영청 달 밝은 밤에.>></B>


 자연 속에 은거(?)하는 사람들이 숙명적으로 받게 되는 질문 중 하나는 ‘좋은 풍경 많이 보겠네?’ 이다.

도시 사람들 입장에서 이 질문의 답변은 대단히, 그리고 당연히 긍정적일 것이리라 생각될 것이다.

매일 개성이 실종된 콘크리트 덩어리만 보는 도시인들에 비하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글쎄, 확실히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알지만 부르주아(‘성 안 사람’, 즉 도시인이라는 뜻이 원형임.)분들의 생각처럼 매순간이 그림 같진 않다.


물론 산골의 자연은 아름답다. 하지만 10년 동안 가슴이 울컥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풍경을 떠올리라면 딱 2가지뿐이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산이 밤새 내린 폭설로 인해 온통 희게 빛나던 어느 겨울 아침 풍경 하나, 검푸른 하늘에 모래알처럼 은은하게 흩어져 있는 별들과 그 별을 옅게 덮어주던 구름이 찬란했던 풍경 하나, 두 가지다.


위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풍경은 도시인들과 다름없는 닳도록 친숙한 주위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몇 년 만에 다시 한 번 온 몸을 전율케 하는 자연을 다시 한 번 대면했다.


 새해 벽두부터 폭로라니, 슬픈 일이지만 글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불가피해 보인다.
우리 아버지는 용기가 넘치신다. ‘많이’ 넘치신다.





해외에 갔을 때, 위험하니 밤에 나가지 말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겁도 주는 가이드의 경고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지키신 적이 없으시다.

그 뿐이면 말도 안한다.


박찬득 아들이 물을 무서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맥주병 아들을 계곡물에 집어 던지신 건 그 분의 행적 축에도 못 낄 정도다. 주위 사람들(주로 어머니)이 아무리 뜯어말려도 우이독경으로 일관하신다. 덕분에 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깊은 곳도 주저 없이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저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 가족이 함께한 일 중 가장 재밌었고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 역시 바로 아버지와 함께한 만용의 모험들이라는 점이다. 아, 물론 예외도 있다.

몇 가지 모험은 지금도 치가 떨린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이제 방학이 끝난다고 칙칙한 기운이나 팍팍 풍겨대고 있던 것이 또 다시 아버지의 (젊은 놈보다 넘치는)혈기를 자극한 발단이었다.


밤 9시를 향해 시침이 치닫고 있는 때 갑자기 요 앞의 임도 산책을 다녀오자고 하신다. 하지만 따라나선 어머니가 멧돼지와 마주친다며 극력 아버지를 말리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목적지는 ‘임도 입구’로 수정하셨지만, 난 애당초 믿지도 않았다. 아버지 성격에?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아버지는 기어이 어두컴컴한 임도로 나머지 두 사람을 인도(사실은 끌고)가셨다. 물론 어머니와 나는 말도 못하게 불안했다.


옆 동네에서 멧돼지와 마주쳐 죽을 뻔했다는 소식이 실시간으로 제보되고 있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돌아가자는 어머니의 간청에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소의 자세로 일관하신다. 나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였으나 귀농 훨씬 전부터 말리길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동장군의 입김으로 차갑게 얼어붙은 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할 즈음, 불안함이 조금씩 가시고 대신 내 시선은 반짝이는 눈길위로 내리쬐는 달빛으로 옮겨갔다.


빛을 쫓아 올려본 하늘에는 연기처럼 유연한 구름사이로 새침데기처럼 간혹 모습을 나타내는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로 잰 듯 시원스럽게 뻗은 나무와 그 뒤로 푸른 비단처럼 펼쳐진 하늘은 겨울 특유의 상쾌함을 표현하는 듯 했다.

달은 장난스러운 아이처럼 검은 나무 뒤로, 부드러운 구름의 치마폭 안으로 숨으며 내게 나름의 환영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이어 도착한 정상에서 난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정상에서의 풍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불가능하다.
 
억지로 해봐야 내 감상만 상할 것 역시 명백하니 포기하겠다.
다만 꿈속을 걷는 듯 환상적인 자연에 취해 버렸다는 미약한 감상평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시길.
 
 3년 전 쯤, 구름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성단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 있다.
‘이런 장관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너무 불공평해.’

 미안한 말이지만, 간혹 듣게 되는 도시에 매여 있기 때문에 자연을 접할 수 없다는 말은 너무 숙명론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시골 사람이라고 매순간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며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위대한 자연을 보기 위해 종종 떠나며 이번처럼 위험을 무릅쓰기도 한다.


언급했다시피 평생 찬란한 자연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불공평하다.
그리니 늦기 전에 떠나시길. 누가 봐도 무모한 용기라도 좋으니.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 있습니다.!!

 

산골 고딩 박선우


 
 
        

 

귀농아낙의 산골편지--못먹어도 G0라고 외쳤던 야콘농사의 변천사
+   [산골편지]   |  2010. 1. 27. 22:42  



2009년 12월


겨울밤 하늘에 별이 많이 나와 있으면 모가지가 아프도록 올려다 본다.
겨울 칼바람으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돋아도 상관하지 않고, 하다못해 세포까지 죄다 오그라져 있던 몸을 확 펴게 된다.


그건 아마도 이 추운 겨울에 그 많은 별무리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그러고 있는 것은 혹여나 핏줄과 뚝 떨어져 귀농한 산골가족이 외로울까 정수리를 비춰주기 때문이라 믿는다.


*************************


사람들이 귀농하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야콘이라는 것을 심게 된 특별한 이유를 자주 묻는다.
게다가 지금이 야콘철이라보니 찾아온 손님도 그렇고, 전화로도 특별한 이유를 묻는다.

여기서 ‘특별한’이 중요하다.


아마도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래서 수도 없이 반복한 말이지만 영화처럼 지나온 날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묻는 이의 호기심을 풀어줄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목에 힘주고 시건방을 떨며 말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귀농하자고 옆구리 푹푹 쑤시던 초보농사꾼은 정작 사표수리가 안되어 그냥 기회를 보며 회사를 다니고, 귀농이라니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눈을 허옇게 뜨고 입게 게거품 물던 내가 먼저 애들 데리고 귀농했다.
첩첩산중으로...




(▲ 야콘의 관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다 늦은 7월에서야 초보농사꾼이 진정 사표를 제출하려는 이유를 읽으신 이사님(지금은 현대 부사장님이 되셨다)의 사인이 떨어지자 그가 뒤따라 귀농했다.

7월에 귀농했으니 쥐뿔도 농사지을 게 없었겠다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천만의 말씀.


사표수리의 연기 등 돌발사고가 생길 것을 대비하고, 봄 농사철 지나서 귀농하면 그 해 영낙 없이 백수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주말마다 울진에 마련한 터전으로 내려와 논 준비와 모내기를 했다.

일명 주말농사 꼴이 되었다.


“우리나라 통털어 주말농사를 이렇게 멀리 지으러 다닌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며 초보농사꾼이 요즘도 우스개소리로 목에 힘주고 하는 말이다.




 


(▲ 관아를 겨우내 땅에 묻어두었다가 봄에 심으면 이렇듯 싹이 나온다. 그것이 모종이 되는 것이다.)

촛자 주제에 그런 생각까지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통한 일이다.


몸과 농사기술은 안따라 줬지만 아쉬운대로 통박 하나는 굴렸으니까 고추도 어느 정도 주말마다 내려와 땅에 박았다.

그래야만 한 해를 공치지 않는다는 무슨 보험심리같은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벼와 고추,  얼마 되지 않는 것을(지금 생각하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때 눈으로는 대농 수준으로 느꼈다)  달랑 수확하고 나서 이웃 동네 형의 수확을 도와주러 부부가 갔다.

그때 처음 만난 것이 야콘이다.


그날 노동의 댓가로 캐다가 부러지고, 호미 자국난 야콘을 몇 자루나 받았다.

그러니까 귀농하고 처음으로 품삯을 받은 셈이다. 현물이지만.
그렇게 받은 야콘을 겨우내 먹어본 초보농사꾼이 무릎을 쳤다.
이제부터 나의 길은 “야콘”이라고...



 




초보농사꾼은 귀농 전 직장다닐 때(도시의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겠지만) 변비에 장이 좋지 않았다. 물론 신경성이다.
그런데 야콘을 먹어보니 이거야 원.


변비약 먹은 듯, 그리고 장 진정제를 먹은 듯 그렇게 속이 좋을 수가 없다는 거다.
초보농사꾼 혼자 야콘을 복용(?) 했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내가 먹어봐도 신통했다.


처음 야콘을 자루째 받았을 때는 이걸 언제 먹느냐며 사실 애지중지까지 하지  않았는데 거덜이 나가자 아껴 먹게 되었다. 사람의 간사함이란...

하여간 다음 해 봄이 오기를 두 주먹 불끈 쥐고 기다린 초보농사꾼.


야콘 모종을 구하려니 야콘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의 없다보니 모종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야콘을 주었던 형에게 모종을 어렵게 구해 심으려 하니 동네 어른들께서 걱정이 늘어졌다.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야콘을 어디에 팔려고 심느냐며 말리셨다.


그래도 웃으면서 야콘을 심는 우리를 보시고 말씀은 안하셔도 골이 비어도 한참 비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 야콘을 심는 날, 하도 허리가 아파 땅바닥에 누웠다. 허리가 시원하다.)

‘이렇게 약성이 좋은데 언젠가는 알려지겠지’


이게 초보농사꾼이 믿는 구석의 전부이고, 야콘 농사를 짓기 시작한 '특별한 '이유의 전부였다.

여하튼 풀도 일일이 뽑아주고, 한방영양제를 뿌려주며 유기농으로 기똥차게 키워 수확하는데까지는 그런대로 몸이 후줄근해져서 그렇지 그런대로 좋았는데 창고가 없었다.


그때는 귀농한다고 하면 눈을 휘번덕대며 아래 위로 훑어보던 시절이었다.


‘이거, 하자 있는 인간 아냐?’ 하는 눈빛. 그런 때라 귀농지원금이나 귀농정착자금 등의 지원은 1원도 없었다.

그러니 창고지을 돈이 있는지.


오지 산골의 겨울날씨는 두 말 하면 잔소리 아닌가.

할 수 없이 부랴부랴 마을 입구의 폐교를 빌려 거기에 모셨다.(?)


말이 모셨지 창문은 다 깨지고 문짝도 아귀가 맞지 않으니 한데에 내놓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거기에 이불쪼가리와 담요 등을 죄다 갖다 덮어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거기까지가 죽도록 농사지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면 초보농사꾼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어떤 때는 담요 하나 들고 그 폐교에 가서 야콘이랑 자보기도 했다.
야콘이 어느 정도 추위를 견딜 수 있는지 생체실험(?)을 한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해봤댔자 야콘이 보란듯이 창문 쪽에서부터 얼기 시작했다.
물론 팔 곳은 없고 야콘이라는 말을 하면
“약콩요?” 하지 않으면 다행일만큼 야콘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누구도 몰랐다고 보면 된다.

둘이 오두막에 마주 앉아 의논을 했다.


고생고생해서 키운 야콘을 이렇게 얼려 버릴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선물하자.”

“OK"

그때는 귀농의 열기가 분기탱천하던 시절이니만큼 합의도 여의도 둥근 지붕 속 사람들 같지 않고 빨랐다.


 


(▲ 이렇게 초록의 물결로 야콘이 자라고 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넣어 보내느냐였다.
박스가 없었다.


박스까지 제작하면 많은 돈이 들다보니 상상으로라도 바라지 못했다.

결국 읍으로 40분 달려가 마트를 돌며 부부 넝마주이처럼 박스를 줍기 시작했다.


주위 여자들이 눈을 마구 휘번득대는 것을 뒤통수로 느꼈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그렇게 박스를 주워다 편지지에 일일이 약성을 구구절절이 적어서, 잘 드시라는 진심어린 멘트까지 부록처럼 박은 다음 야콘박스에 넣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택배비였다.


그때는 택배비 지원도 일원 한푼 없었기 때문에 그 많은 곳을 보내자니 적잖이 부담이었다.
어쩐다지...


 


(▲ 야콘의 꽃은 애기 해바라기 같다.)

선물해 달라고 하지도 않은 것을 착불로 턱하니 보내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때나 이때나 ‘되도록이면  마음이 시키는대로 살자‘ 쪽으로 삶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택배비도 내가 쏜다‘쪽으로 금방 합의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야콘을 택배로 발송하고 나니, 야콘을 받아본 분들이 꿈인 듯 생시인 듯 고맙게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갈 일이 있어 갔다가 어느 지인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사단이 난 건 그 때였다.


그 집 대문 앞에 우리가 그 고생을 해서 보낸, 일일이 손으로 풀 뽑아주고 한방 영양제 부어줘 가면서 쌔가 빠지게 길러 보낸 유기농 야콘이 탱탱 얼어 터져 검으티티해진 것을 박스째 버린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내 마음도 야콘처럼 얼어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본 초보농사꾼의 얼굴 그림자를 지금도 난 잊지 못한다.
산골로 내려오는 내내 우린 아무 말이 없었다.




 



(▲ 야콘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내 돈 내고 산 거였으면 끔찍이 여겼을테지만 주어온 라면 박스에 생전 보지도 못한 것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보냈으니 하잖게 여긴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 되었다.


뼈아픈 경험을 한 야콘을 다시 심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하지도 않았다.
초보농사꾼의 야콘의 약성에 대한 의지는 초심 그대로였다.


나 또한 가장이 ‘못먹어도 GO’라고 하는데 패를 돌려야지 별 수 있나.
귀농 초, 우린 왠만하면 의견을 서로 맞추어가며 살자고 다짐했던 그 약발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애들도 함께 돕고...)


그리고 초보농사꾼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현상에 애걸복걸하지 말자고 했다.
그건 도시 생활에서 신물나도록 했으니 이젠 산골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가자고 서로를

초보농사꾼 입에서 이처럼 한 끝발 높은 소리가 술술 나오다니.



 



지금 생각해도 그건 순전히 자연의 힘이지싶다.

그때부터 TV 출연 때마다 야콘 자랑을 했다.


멀쩡히 둘다 왠만한 직장 다니다 왜 귀농했냐며 다행히 방송국에서 구미당겨 하는 일이 심심잖게 있었기 때문에 기회 닿는 대로 야콘을 알렸다.

초보농사꾼이 그때나 이때나 연사처럼 부르짖는 것은 판매도 판매였지만 이처럼 약성이 좋은 것을 모르고 못 먹으면 안타깝다는 거였기때문에 방송에서라고 예외겠는지...


지금 생각하면 팔리지도 않던 야콘을 계속 그 의지로 신주단지 모시듯 야콘농사를 짓는 것을 보면 대단해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먹어본 분들이 점점 약성을 입소문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워온 박스에 담아 보내던 것을 조금 진화하여 스티로폴 박스를 사다가 담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어 해 하다가 ‘하늘마음농장 유기농 야콘’이라고 턱하니 인쇄된 박스도 만들었다.


창고가 없어 다 쓰러져 가고, 유리창도 다 깨진 폐교에 넣다가 그 다음에는 하우스를 하나 지어 그 안에 넣었다.
문제는 아침 저녁 기온차가 커서  해지고 나서의 하우스 안은 정말로 추웠다.





(▲ 수확철에는 너도 나도 수확을 하기 때문에 남자일꾼 구하기가 어렵다. 낮에 품을 사서 왕창 캐놓은 것을 초보농사꾼 혼자 다 실어 날랐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불과 보온덮개를 있는대로 가져다 야콘을 덮어 놓았지만 강추위에는 당해내질 못하고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했다.
그러다 야콘창고도 대출받아 마련하게 되었다.


지금은 당뇨환자분들 대부분이 야콘을 알 정도로 그 약성이 알려진 편이었지만 2001년 우리가 유기농으로 지었을 당시에는 야콘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발음도 어려운 야콘, 하늘마음농장 야콘의 변천사를 핏대 세우며 이야기 하다 보니 무슨 5일장의 약장사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런 시절도....

그런데 왜 지금 귀농 초, 그 얘기를 하는데 목젖이 뎅그랑거리며 매어오는 것일까.


괜시리 야콘의 전설 이야기를 하느라 정수리가 뻐근해지고 있다.

이제 야콘은 많이 알려져 외국에서 수입까지 해대고 있다.


아침 저녁 기온차가 큰 산골에서 자라 맛이 남다르고, 유기농으로 기른 것이라 약성 또한  끝내준다고 침튀겨봤자 수입가격으로 치고 들어오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어졌다.



 



(▲ 어둔 밤이 되어 내가 손전등을 비추고 초보농사꾼이 그 무거운 박스를 죄다 실었다. 밭에 두면 얼기 때문에 그 날 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날라야 했다. )


그러나 난 믿는다.
사람도 어느 부모밑에서 어떤 이슬먹고 자랐느냐에 따라 물건이 달라지듯이 초보농사꾼이 무릎에 관절염이 생기도록 풀 뽑아주고, 약 한번 안주고 우리나라 땅에서 자식처럼 키운 야콘은 남다를 거라고 난 믿는다.


야콘철이라 더 부쩍 손님들이 와서 늘상 묻는 것이 야콘을 어떻게 알고 농사짓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이 더 많아진터에 귀농초부터 야콘에 대한 사연과 뼈 아픈 경험들을 적게 되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고...
그런 눈물나는 시절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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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산골밥상--"얘들아, 야콘 돼지갈비 해먹자~"
+   [산골밥상]   |  2010. 1. 12. 12:37  




오랫만에, 정말 오랫만에 애들이 방학이라고 가족이 모두 모였다.
사실 선우가 다니는 울진고등학교는 방학도 보충수업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맘편하게 늦도록 이야기하고 책을 읽고 늦잠을 자고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번부터는 주현낭자도 고등학생이 되다 보니 울진고등학교에서 하는 선수학습이라고 해서 오빠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다녀야 한다.

그러니 더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그 중간에 선우는 서울에 가서 자기가 목표로 하고 있는 대학들을 다시 한번 다녀보고 온다고 하여 서울간 시간을 빼니 더 시간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주현이가 갈비를 해달란다.
그래서 돼지갈비를 사왔다.


이번에는 야콘 돼지 갈비다.

갈비를 하면 난 국물이 넉넉하도록 한다.


고기보다 그 국물에 밥 비벼먹는 것도 좋으니까.

그러다 보니 국물이 될 수 있는 것이 신경쓰인다.




일단 그 국물의 일등공신은 야콘이다.

재료를 하나하나 준비했다.


우선 야콘을 누드를 만든다.
일명 '누드 야콘'


말이 거창하지 야콘을 깎은 거다.ㅎㅎ

그렇게 준비하고, 우리가 기른 아니 , 자연이 기른 표고버섯을 불린 다음 씻는다.
생강도 까서 넉넉히 준비한다.


다음으로 양파와 당근도 준비하고, 마늘도 준비한다.
우리 홈에 오시는 치자꽃님이주신 대추도 씻어 놓고, 은행장님이 주신 은행도 까서 준비했다.




다음은 준비한 재료를 강판에 갈았다.
되도록이면 믹서기 등을 사용하지 않고 강판에 간다.
믹서기에 돌리면 비타민 등이 파괴될 수 있어서 강판에 가는 경우가 있다.




양이 많거나 시간이 바쁘면 돌리지만 되도록이면 강판을 많이 사용한다.

우선 '누드 야콘'을 강판에 갈았다.
요렇게 되었다.



또 야콘을 동글게 썰어 그대로 넣으면 살짝 익어 단맛이 절정에 이른다.
맨 위 사진에서 노랗고 둥근 것이 야콘이고 그 옆에 작은 동그란 것은 은행 두 알이다.


다른 때는 소스를 먼저 만든 다음 준비된 갈비를 넣는데 이번에는 같이 넣고 같이 푹 졸이기로 했다.

갈비는 핏물을 오래 뺀 다음 물을 붓고 한번 후르륵 끓인다.


물이 끓으면 국자로 물과 갈비를 휘휘 젖어 굳은 핏물이 붙은 것을 떼어 낸다.

그런 다음 물을 다 버리고 다시 한번만 찬물에 씻어 물기를 빼 준비한 것이다.




센불로 하여 끓기 시작하면 약한 불로 계속 뒤적이며 고기에 충분히 간이 배이도록 한다.
간은 간장과 효소원액으로 한다.

강판에 야콘과 양파 등을 충분히 갈아 넣었기 때문에 그것이 국물이 되는 것이라 비벼 먹으면 영양도 좋고, 맛도 최고다.
야콘을 갈아넣어 걸죽한 국물이 된다.


갈비는 인내가 필요하다.
부르르 끓는다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배가 고플 수밖에.
그러다 보니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ㅎㅎ

온가족이 이야기를 반찬 삼아 맛나게 먹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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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아낙의 산골편지--딸도 자라고 엄마도 자라고...
+   [산골편지]   |  2010. 1. 11. 00:45  

그렇게 가물더니 비가 내린다.
여름끝에서부터 가을걷이까지 그렇게 애걸을 해도 깜깜 무소식이던 비가 아니었는지.


이제사 뭣도 모르고 내리는지 아니면 한 해를 잘 갈무리하라는 뜻에서 대지도 씻기고, 세상사에 찌들린 인간의 마음도 씻어주려는 깊은 뜻으로 내리는지 어디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 알 수 있는지.

다만, 안그래도 마음이 구죽죽한데 비까지 박자를 맞춰주니 마음은 물먹은 솜처럼 바닥을 기고 있다는 사실만 감지할 뿐이다.


2009년 11월 29일



밤늦도록 가방 하나 달랑 싸는데 무슨 이삿짐 싸는 폭은 된다.
수건, 치약, 칫솔, 비누, 작은 베개 하나, 컵, 휴지 등을 챙기는 것은 여행이나 서울에 잠깐 다녀올 때 챙기는 것이랑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마음이 다르다.


내일이면 주현이가 병원을 간다.
이번에는 명색이 입원이다.


지난 해, 여름에 작은 수술로 물혹을 떼어 냈는데 이번에는 반대편에 다시 생겨 수술을 또 하게 된 것이다.

지난 번에는 비용은 비싸지만 간단한 시술로 하는 것을 택했는데 이번에는 예민하게 해야 하는 수술이라서 아예 전심마취를 하자고 하신다. 의사 선생님이...


나야 의학쪽에 상식이 없으니 당연히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서동권 선생님은 홈에도 가끔 오시는 분으로 산골가족을 잘 아시고, 따사로움을 간직하신 분이라 그 분의 말씀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내일 입원하기 위해 오늘 가방을 싸고 있다.
칫솔 하나 찾아 넣고 멍해 하고, 수건 하나 챙겨 넣고 물방울 하나 없는 주방을 닦고 또 닦는다.


정신의 반은 신생아 머리 위에 흔들거리는 동물 모빌처럼 공중을 흔들거리고, 정신의 반은 어여 가방을 챙기라고 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

내가 누구의 명령을 받을 처지가 아니나 내가 나에게 시키는 것은 거절 못하는 단점이 이번에는 많이 거슬린다.
다시 가방 챙기기에 집중한다.


이제 겨우 가방의 반은 채웠다.
하던 일을 놓고 이번에는 퍼질러 앉아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내가 융단폭격을 맞은 사람처럼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법, 어린 것을 전신마취하고 몸에 칼을 댄다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나 요즘처럼 이름도 못 들어본 병도 많고, 별의 별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일로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듯, 뼈없는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는 것이 맞는지...

이 세상의 모든 병원의 병실마다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의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희비가 엇갈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건 명함도 못 내밀 일이 아닌지.

사람의 일이란 어디에 견주느냐에 따라 같은 일이라도 생사가 갈린다.

어린 것이 전신마취 한다고 한숨이라면 이제 막 태어나 세상의 공기를 몇 번 마신 신생아도 심장수술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것도 몇 번이나 엄마 젖 빨듯 수술하는 신생아도 있지 않은가.


또 몸에 칼을 댄다고 했는데 몸의 장기 일부를 잘라내고 떼우고, 남의 것을 갖다 붙이고 하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무거울 일이 아니다.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내 얼굴의 반쪽이 슬슬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쪽에서는 슬슬 미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요즘 늘상 입에서 오물거리는 말이 있다. 어린 아이 옹알이하듯...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고, 웃어서 행복한 것’이라고...


이런 일 쯤이야 생각하고 이보다 더한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고 털려고 들면 이런 일은 쨉도 아니다.

마음의 숲에 이런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그까짓 이틀 입원하는 가방이야 쌀 것도 없다는 생각에 지퍼를 닫아 걸었다.

그리고 통창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는 자기 먼저 웃어보이는 달을 보며 그대로 따라 웃었다.
미친 여자처럼 미이라 같은 얼굴을 어찌어찌 움직거려 웃었다.


웃어서 행복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그렇게 날이 샜다.


2009년 11월 30일


포항의 병원까지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주현이는 당일 수술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금식을 지키며 서둘렀다.
잠을 쫓으며 어제 늦도록 준비한 가방을 들고 나서니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어제 가깟으로 물에 젖은 솜을 말렸건만 다시 마음이 젖어들려 한다.
바로 그때를 잘 경계해야 한다.


그런 주변 상황이 나를 바쳐주지 않아도 어제 다짐한  그 평안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말이 그렇지 쉽지 않으나 그래야만 그대로 쭉 그 분위기가 내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을 난 믿는다.


포항에 도착하여 피검사, 초음파 검사, 심장검사, X-ray 촬영 등을 마치고 병실에서 대기를 했다.
주현이가 혹여 긴장할까봐 난 되지도 않는 농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주현이가 더 내 안색을 챙긴다.
그새 내가 나이값을 못한 모양이다. 어린 주현이보다도...

드디어 주현이가 수술실로 들어간다.


그의 움직이는 침대를 따라가며
“주현아, 기도해라.”


그게 내가 나의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말 다 였다.

수술실로 사라진 주현이...


수술실 앞에 기다리는 보호자들 틈에 초보농사꾼과 내가 서있다.

전광판에는 ‘박주현--준비중“이라고 떠 있다.
이제 전신마취를 하겠지.


내 새끼 이름은 이 작고 째진 눈에 금방 들어온다.

한참을 문만 쳐다 보고 있다가 다시 전광판을 보니 내용이 바뀌었다.


“박주현--수술중”

간단한 수술이라 했기에 나름 후한 시간을 예상했는데도 그 시간을 훨씬 넘기고 있고 전광판에는 계속 “박주현 -- 수술중“이란 글이 내 눈을 맞추고 있다.

주현이보다 늦게 수술실로 들어간 여학생은 벌써 엄마의 품에 안겼는데 주현이는 소식이 없다.
점점 초조해졌고, 오른팔이 자꾸만 저리다.


초보농사꾼이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는다.

‘저 애는 부분 마취를 한걸꺼야’
‘안에서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야’.....


말주변 없는 남자가 마누라 진정시키느라 용을 쓰고 있다.

‘이보다 더한 병으로 수술실 앞에서 기다린다면 ...그보다야 기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내 안의 나에게 해댔다.

그건 내가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건 진실이었다.


‘이보다 더한 병이라도 받아들여야지 인간이 별 수 있는가’말이다.

사람이 어찌 푹신한 평지만 걸을 수 있는가.


물웅덩이를 걸어야 하고, 언덕도 올라가야 하고, 내리막길도 내리달려야 한다.
바닷가의 모래처럼 걸을수록 쉽지 않은 길도 걸어야 한다.
울퉁불퉁거리는 길도 ...


그러다 보면 푹신한 오솔길도 나오고, 햇살 가득한 푸근한 길도 나온다.

그런데 자꾸만 수술실 앞에서 잠이 쏟아진다.


옆으로 몸을 뉘이고 싶을 정도로 잠이 쏟아진다.

이제 수술실로 간지 2시간이 넘었다.
몸도 굳어지려 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잠은 쏟아져 앉아 있기도 힘이 드는 순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서동권 선생님이 우릴 부르신다.

가보니 이제 막 꺼낸 조직을 보여주신다.


생각보다 크기가 큰 것같다고 이제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꿰매면 되니 걱정말라는 말을 담배연기처럼 날려주시고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신다.

이제 안심이다.


몸을 일으키려니 오른쪽으로 자꾸만 몸이 기울고 멍한 머리는 여전하다.
한참만에 전광판이 바뀌었다.

‘박주현--회복중’

이제 됐다.
다시 얼마를 기다렸을까 수술실 문이 열리고 ‘박주현 보호자분’이라는 말이 굳게 닫혀 있던 내 귀를 뚫고 들어와 앉는다.

용수철 튕겨나가듯 초보농사꾼과 난 몸을 일으켜 주현이 침대에 몸을 붙였다.


아이는 의식이 돌아와 있었고 조금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그게 고맙다.


병실로 돌아와 얼마 지나면 마취가 완전히 풀려 통증이 시작되련만 주현이는 한 마디 말도 없다.
그저 수술실에 들어가서의 일들을 말할 뿐이다.


속깊은 주현이는 엄마를 가르친다.
그러면서 딸도 자라고, 그만큼 엄마도 자란다.


제 침대 옆에 엄마더러 누우란다.
수술앞에서 기다릴 때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더니 그것이 계속 되었다.
감당이 안될 정도로 머리가 아프니 정신까지 흐느적거렸다.


침대도 좁디 좁더만 저나 편히 쉬어도 통증이 있을텐데 엄마더러 자꾸 자란다.

저녁까지 주현이는 금식을 했고, 나중에서야 초보농사꾼이 병원 근처에서 따끈한 죽을 사다 주었더니 사래 걸리지 않고 잘 먹는다.

이제 밤이다.


난 주현이 병실 간이침대에서 자기로 했고, 초보농사꾼은 나와 늦디 늦은 저녁을 먹고 찜질방으로 갔다.
연고없는 곳이라 이렇구나 생각하니 씁쓸했다.

주현이와 난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2009년 12월 1일

병원의 아침을 무지 빠르다.
그 시간이 참 싫다.
새벽 동이 트기 전부터 간호사의 신발 끄는 소리가 귀에 자꾸만 달그락거려 잠을 잘 수가 없다.

다시 서동권 선생님께 진료를 받고 퇴원을 했다.
집에 돌아오니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아마도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떠났다 병원에서의 시간을 보내서일 것이다.
산골에 왔을 때 낯설음이 깊다는 것은 집 밖에서 마음의 부담이 컸었다는 뜻과도 통한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의 걱정은 안하기로 맘먹었다.


생각이란 것은 단지  생각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생각한 상황 그대로를 끌어당긴다고 믿으니 그쯤에서 걱정의 문을 닫아 걸었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할 일만 남았다.


그게 귀농


전과 귀농 후에 달라진 내 모습 중 하나다.
귀농 전같았으면 별 호들갑을 다 떨고, 세상 어머니 중 가장 속상한 어머니인양 온갖 얼굴연기를 다 했을 것이다.

교과서적인 말이라고 치부했던 것을 이제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고, 그 진실을 이제 훤히 꿰뚫고 있다.
그게 먹힌다는 것이 신통방통하다.


중국 속담에 “염라대왕이 삼경에 부르면 오경까지 살 수 없다”고 했다.
이건 목숨에 관한한 누구도 시간을 연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누구도 언제, 어느 때 나를 태울 배가 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배꼽빠지도록 웃어야 한다.
그래야만 웃을 일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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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귀농풍경--혼자 간 해돋이
+   [산골풍경]   |  2010. 1. 7. 18:37  


새해 첫날 울진성당에서는 동해안 봉평해수욕장 소나무 모래사장에서 해돋이 미사를 드립니다.
해돋이를 보고 나서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새해를 맞이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저 혼자 바닷가로 내달렸습니다.


7시까지 가려면 6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불영계곡을 달리고 달려 죽변 바닷가로 달렸습니다.

초보농사꾼과 선우는 감기가 워낙 심해서 박씨 일가는 그 행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전날 아니, 그날 새벽 4시 넘어서까지 야콘즙 작업을 하고 집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5시가 거의 다 되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기 몸살이 더 심하고 잠까지 더 못자면 안될 것 같다고 부득이 올해 해돋이 미사는 포기해야겠다고 합니다.

저 역시 그게 좋을 것같아 살금살금 혼자 일어나 준비를 하는데 아예 날을 새고 공부하는 선우가 혼자 나서는 저를 배웅합니다.
혼자서라도 잘 다녀오시라고...




다른 해와 달리 성당사람들과 합류하지 않고 혼자 바닷가에서 서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제 새로운 해를 선물 받았는데 난 그 귀한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하나,
지나온 해에 대해 감사할 일도 너무 많았는데...하면서...

혼자 그러고 있으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해가 모습을 드려냈습니다.
그때 옹알이를 했습니다.
홀서 서서...




너무 감사하다고, 지난 해에 얻은 것도 많고 감격스러운 일도 많고 가족 모두 건강한 것이 또한 기적같다고...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에 얻은 것이 너무 많았다고...

그저 감사하다는 옹알이만 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또 뭘 달라고 거지행세를 했을텐데...올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지난 해에 대한 감사만 웅얼거렸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내년 새해에는 더더욱 많은 감사할 일을 가지고 이 바닷가에 서리라고...

이제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렇게 사지 멀쩡히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니 행복한 일이지요.


그러한 행복을 유지하려면 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되 옆도 돌아보며 가리라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귀한 날을 받았으니
복되게 살리라고...




그리고 나서 해돋이 미사를 참석했습니다.
성당에서 오신 분들에게 무료로 떡국도 끓여주어 뜨끈한 국물로 속을 뎁힐 수 있었습니다.
고생하신 분들에게 어찌나 고마운지..




성당에서 마련한 떡국떡을 사고 소고기도 사고 산골로 달렸습니다.
새해 떡국을 끓여주기 위해...


가족에게 뜨끈한 떡국을 끓여 주기 위해 달려가는 그 여인은 행복한 사람이지요.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로!!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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