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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_해당되는 글 295건
2008.08.12   귀농일기 --거북바위 이야기 
2008.08.12   산골편지4 --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2008.08.09   산골편지3 -- 스스로 크는 아이들 
2008.08.09   자발적 가난 
2008.08.08   산골편지2 -- 애들 탓할 필요없습니다. 
2008.08.07   상도[전5권]을 읽고... 
2008.08.07   산중일기 
2008.08.07   우체부 프레드를 읽고 
2008.08.06   산골풍경--왜 갑자기 갖고 싶은걸까??? 
2008.08.06   산골편지1 -- 내가 산골로 온 이유 

 

귀농일기 --거북바위 이야기
+   [귀농일기]   |  2008. 8. 12.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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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기이한 노릇이다.

서울서 이곳으로 귀농하려고 땅 주인과 가격협상을 할 때 땅 주인 아저씨께서

이 터가 육관 손석우가 헬기타고 봐 둔 명당터이며 금구몰니(金龜沒泥)형이니

비싸게 땅값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나는 그냥 토지를 파는 사람이야 당연히 많이 팔고싶은 욕심에 그려려니

하고서는 적당한 가격에 매수를 해서 살았다.


그런데 작년에 집 앞에 큰 바위가 있고 그옆에 두릅나무 밭을 조성했던 것을 두릅나무가

죽어서 밭을 개간하다가 그 큰 바위가 거북바위 몸통이었고 땅속에 묻혀진 거북이 머리부분을 발견

했던 것이다.(사진에 보이듯 검은 부분이 밖으로 드러나 있었고 흰부분은 당시에 묻혀있던

것을 드러낸 것이다.)


처음에는 거북바위를 보고 깜짝놀라 당시에 터를 살때 금구몰니니 명당터니 하던말이 진짜인것

같아서 가슴이 덜컹덜컹 했으나 지금은 그저 우리집을 지켜주는 수호 거북이가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는 마음으로 매일 올라가 마음속으로 대화하며 산다.


 
 
        

 

산골편지4 --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   [산골편지]   |  2008. 8. 12.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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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께서 이해인 수녀님께 "수녀님은 그래 시를 쓴다고 하면서도 기껏 아는 게 뻐꾹새 소리밖에 없느냐"고 핀잔을 주시며 일일이 새이름을 구별해 가르쳐 주셨다듯이 나 역시 새소리는 뜸부기,까치,까마귀 소리밖에 모른다.

또 설령 열심히 알려줘도 그 소리가 그 소리같고 그 모습이 그 모습같아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뿐인가.
나물이름,들꽃이름도 매한가지다.

특히 나물은 더 까막눈이라 왼손에 샘플을 들고 다니면서도 똑같은 것 뜯기가 여간 능력에 부치는 것이 아니다.

이웃 형님의 놀림도 놀림이지만 이곳 산골에서 뿌리내릴 사람이다보니 내 자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오늘은 샘플로 뜯어 준 것이 시들어 꼬부라지도록 똑같은 것을 못뜯었다.
나물과 새와 들꽃들과 정말 친해지고 싶은데 잘 안되니 그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

부모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공부는 엄마주려고 하니? 너 위해서 하지."

내가 한국생산성본부 첫 여자 연구원으로 입사했을 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난 사실 학교다닐 때 정말이지 엄마위해 공부할 때가 많았어. 그 정도로 엄만 내게 헌신적이셨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여느 엄마가 자식에게 헌신적이지 않을까마는 얼굴이 안개꽃처럼 하얀 내 엄마는 당신은 없고 오직 자식만 있었다.

어쩌다 한 겨울 새벽에 도서실가는 것이 귀찮아 포기하려다가도 내 에미 새벽부터 도시락 싸놓고 자식 머리맡에서 시계 초세고 계시는 모습이 가슴저려 졸면서 도서실갈 때가 부지기수였다.

또 개인주택에 산 탓에 한 겨울 자식이 신을 신발을 미리 방안에 갖다놓으시고는 혹여 덜 따뜻할세라 당신 옷으로 덮어두시는 엄마를 생각하면 도서실에서 잠시 졸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곤했었다.

그 덕에 이 머리로 대학.대학원을 수석졸업할 수 있었다.
엄마는 늘 "여자도 많이 배워 활동적인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유학도 자신있으면 해보라고 부추겨서 아버지에게 시집이나 보내지 쓸데없는 소리한다며 핀잔을 들으시기도 했다.

결국 일본유학을 계획하고 사전답사도 다녀왔었다.

그러던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느라 유학을 덮어놓고 있었다.
몇 달 전에 풍을 맞으신 엄마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었다.

시원찮은 발을 끌며
"막내야, 그 때 유학을 더 서둘러 보냈더라면 벌써 다녀왔을텐데...."하셨다.
산골에 들어가 뙤앝볕에 고추밭매고 나물뜯는 막내딸이 가슴에 저려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며 눈에서 맑은 물을 흠치셨다.

그 때 내 가슴은 두릅나무 가시보다도 더 큰 가시가 파고드는 것같았다.

그 때 보았다.
우리 고추밭골보다도 더 깊이 깊이 패인 엄마의 주름을...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충청도의 어느 종가집 맏며느리셨다.
머슴까지 13명의 뒷치닥거리를 다 해야 하는 전형적인 종가집.

이러다가 딸 다섯을 다 시골남자와 결혼시키겠다 싶어 밤마다 아버지 옆구리찔러 서울가자 하셨었단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하시던 아버지도 결국 엄마의 끈질긴 설득끝에 아이들을 서울에서 공부시켜 서울남자와 결혼시키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때 난 코흘리개였고.

그랬더니 결국 막내딸이 다시산골로 들어가 농사짓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그 에미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그 생각만 하면 어느새 목구멍이,목구멍이 불덩이로 막히는 것같다.

병든 엄마가 보고싶을 때마다 읽는 글이 있다.
피천득님의 '엄마'라는 글이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한 일이 없고,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자지 못한 때문이다."

이 글을 맨 처음 읽었을 때 많이 울었다.
이 밤에 혼자 중얼거려본다.

'엄마 나도 엄마가 내 엄마라는 사실이 영광이야. 사람은 어느 하늘 아래에 머리를 두고 살든 착하게 넉넉한 마음으로 살면 행복한거야. 엄마, 너무 마음아파 하지마.'

******************************
오늘은 과꽃같은 우리 엄마가 보고싶을 때 보려고 과꽃씨를 뿌렸다. 가뭄에 말라죽지 않고 흐드러지게 피어 이 산골이 엄마의 향기로 가득찼으면 좋겠다싶어......

도시에 있을 때에도 글을 썼었다. 책으로 내서 울 엄마에게 드리려고..... 이 곳 산골에 와서 더 열심히 쓰고 있다.

오늘따라 하늘에 별도 몇낱없다. 모두 지에미 품에 들어가 자는가보다. 바람도 자고 텃밭의 마늘들도 자겠지.
나도 자기 전에 병든 엄마에게 목소리 공양을 해야겠다.


2001.5.13일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싶던 날에.

산골에서 배 소피아.


 
 
        

 

산골편지3 -- 스스로 크는 아이들
+   [카테고리 없음]   |  2008. 8. 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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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를 뿌리려고 작년에 씨를 받아두었던 바구니를 찾았다.
바구니에서 그대로 엎드려 일년을 보낸 터라 그런지 냉큼 내 가슴으로 와 안긴다.

봉선화, 채송화, 과꽃씨등을 심으려니 여간 땅이 가문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비가 오면 심기로 마음먹고 검고 하얀것들을 다시 올려 놓았다.

아무리 가물어도 오늘 꼭 심으려고 했던것이 목화였다.씨를 어렵게 구한지라 물을 매일 길어다 줄 요량으로 언덕에 심었다.

지금 아이들이 목화를 기억할까?
아마 문익점이라는 위인전에서나 들어본 이름일게다.

한 숟가락 정도 되는 양이지만 어서자라 나의 아이들에게 "옛날 분들은 이불솜을 이꽃에서 구했단다" 라고 얘기해 주려고 서둘러 심었다.

가문땅에 심은지라 물을 길어다 주는데 꽤 인내력을 필요로 했다.
올해 씨를 더 많이 받아 내년에는 한밭 가득 목화를 심어야 겠다.
내용이야 있든 없든 많은 아이들이 목화를 보러 오도록.....
*****************************************************

귀농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아이들이 제일 걱정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잘 적응을 할까?
햄버거, 치킨, 피자등이 먹고 싶을텐데, 재래식 화장실에 쭈구려 앉아 볼 일을 못볼텐데, 학교에 다녀왔을때 에미,애비가 저 윗밭에 가 안보이면 무서워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지금은 아이들이 싫어할지 몰라도 크고 나면 부모에게 고맙다고 할거야"
남편은 자신에 찬 소리를 했다.

그러나 난 글쎄 였다.
막상 귀농하고는 애들 상태만 살폈다.

짐정리, 집정리 등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집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집을 위해서 있는건 아니다 싶었다.
더욱 아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였다.

최소한의 문화충격을 줄여주어야 할 의무가 내겐 있었다.

남편은 이삿짐만 내리고는 서울로 갔다.

사표수리는 언제 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들이 적응할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암세포 번지듯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이들보다 어른이 더 적응을 못했다. 화장실 갈 때 대낮에도 두놈이 같이 가주고 한참을 그러더니 낮에는 혼자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두워지면 후레시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가주었다.
도시에서는 놀 때에도 각자 노는 일이 많았다.

이곳 산골에서는 둘도 없는 친구다. 아이들이 둘인것이 무척 다행이었다.

그러다 애들 아빠가 산골로 합류하게 되니 아이들이 더 명랑해지고 재미있어 했다.

아이들은 논리적이고 머리로 다가오는 지 에미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다가오는 지 애비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나도 보다 단순하게 행동해야 팬들을 놓치지 않을것 같다.

얼마전에는 아침에 주현이가 "학교에서 오는 길에 덕거리 친구집에서 놀다 오면 안되느냐" 고 물었다. 그곳은 마을 입구로 어른도 15~20분 걸리는 거리다.

그 전에도 놀다 온다기에 올때는 혼자 걸어서 오라고 했는데 결국 지 아빠를 불러 그때 아빠와 약속한 바가 있었다.
혼자 걸어올 자신이 없으면 놀러가지 말라고....

친구도 없는 곳인데 아이들 데리러 가는 것 쯤이야 당연히 해야 하는건 아닌가 생각하니 그이가 야속했다.

주현이는 혼자 걸어올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결론이야 어땠든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나 저녁이 다 되어도 아이 그림자는 안보이고 나무 그림자만이 늘어만 갔다.
이제 초등학교 아이를 너무 일찍 산골아이 취급한 것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애려왔다.

전화를 하자니 버릇될 것 같고 선우에게 집 입구 다리까지 가보라고 일렀더니 한참후에 어둠만 데리고 나타났다.
이제는 버릇이고 뭐고 애 놀랄까 싶어 뛰어 나갔다.
비포장길 끝날 즈음에 하얀 물체가 보였다.

"주현이니?"

"네 엄마!"

아이의 목소리는 맑고 밝았다.

"주현아, 혼자 걸어왔어? 왜 이렇게 늦었니?"

아이는 극히 침착한데 에미만 호들갑이다.

"엄마, 오다가 냇가보며 생각도 하고 또 오다 멈추다 놀고도 왔다"
어린 것이 에미보다 낫구나 싶었다.

아이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타다 세워둔 두발 자가용을 보더니 샬롬 샬롬 노래를 부르며 뛰어가 탄다.

헤브라이어로 샬롬은 "평화"라는 뜻이다.
**********************************************

이제 봄이 지나려는 듯 바람도 기가 죽어있다.

어쩌면 바람이 봄 따라 갈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로 처마밑에 걸어둔 풍경이 제 구실을 못한다.

오늘 밤에는 개구리와 함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줘야 겠다.

2001년 사월 마지막 날에

(필리핀에 갔을 때의 사진이다. )

조팝나무 꽃잎 날리는 산골에서 배 동 분


 
 
        

 

자발적 가난
+   [산골아낙의 책 이야기]   |  2008. 8. 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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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답 에세이’라는 말로도 대충 어떤 풍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인호 작가는 나보다 아들 선우가 좋아하는 작가다.
좋아하는 이유가 나랑 다르다.

고1인 선우는 최인호 작가의 역사 지식 그리고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부분이 무지 부럽고 존경스럽단다.

그러나 나는 역사 등에는 젬뱅이라 그런지 최인호 작가의 그런 책은 아직 안읽었다.
선우랑 대화가 되려면 ‘유림’ 정도는 읽어야지 하고 있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선우는 ‘유림’을 읽고 공자와 노자의 차이점,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과 스승을 대하는 점에 대해 느낌이 깊었다고 한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려면 에미가 ‘유림’을 읽어야 하는데 ....

사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내 자극샘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산중일기’라고 되어 있듯이 일상을 얘기하지만 그 일상이 집이든 어디이든 마음이 가 있는 곳이 그곳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출발을 한다.

읽는 내내 놀라운 것은 천주교신자이면서 불교를 가까이 하고 그 좋은 면을 보려고 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좋은 면이라기 보다 종교의 벽이 애초부터 없음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표현같다.

책 본문 중에 이 대목이 이 책을 쓰게 한 힘이 아닐까.
그 마음이 참 맑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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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교 신도도 아니고 새삼스레 초파일을 맞아 무어 소원을 빌 것도 없었지만, 여행 중에 만나는 절에 들어서는 꼭 내 식대로 향 피우고 절 세 번 하는 법도를 잊지 않았다.
그게 무슨 즐거운 일인 양 꾸벅꾸벅 고개를 조아려 세 번씩 절을 했다.
나는 그리스도료 신자이지만 그것이 죄라고 생각지 않는다.
불교도 좋은 종교이며 그리스도교도 좋은 종교이므로 나는 종교 앞에서는 그저 두렵고 그리고 죄송스럽다. 두렵고 죄송스러우면 그 순간만이라도 겸손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무엇이 담력이 크다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예수님과, 내가 무에 대단한 데가 있다고 천 년도 넘게 세세연년 내려오는 저 자비로운 불상의 미소 앞에서 무릎을 세울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천주교 신자이지만 절에 가면 한없이 인자해 보이는 부처님 앞에 절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난 불교 신자들이 하는 절 방법을 몰라 서서 한참 부처님만 바라보다 돌아오곤 하였다.

초보농사꾼 역시 산에 갔다가 절이 있으면 꼭 들린다.
초보농사꾼도 나와 같은 생각이지 싶다.

천주교 신자라고 절을 멀리하고 할 일도 아니고, 절을 하면 안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코드가 맞다.

이 책에는 사진이 많이 나오는데 모두가 절 풍경이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의 모습도 나오고, 스님의 고무신, 노스님의 뒷모습, 절 뒤켠, 스님의 차 마시는 모습, 절 문의 그림자 등등 모두가 절 풍경이다.

그냥 사진만으로도 묵상이 절로 되고, 일상의 뒤돌아 봄이 절로 될 것만 같다.
작가가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정말 일상의 일들을 다른 장르로 표현했을 뿐이지만 독자의 마음은 어느 산속 깊은 암자에 가있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선우가 시험 공부하는 중간중간 잠시 읽더니 이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다.

이 책은 사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 읽었다.
그리고 밭에서도 한 꼭지씩 읽으면 답운재밭, 새점밭, 호수밭, 달밭이 절이 된다.
그 옆의 조팝나무꽃은 절 처마끝의 풍경이 되고 말이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산골편지2 -- 애들 탓할 필요없습니다.
+   [산골편지]   |  2008. 8. 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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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읍에 다녀오다가 길가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계신 꾀골재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일단 차를 세워 할머니를 부르니 너무 반가워하십니다.
늘 우리 가족을 친 혈육처럼 이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우리 반 할머니...

길가에 죽 내놓은 짐을 차에 실으니 미안해 하십니다.
우리 집 꺾어지는 곳에서 기름값 비싸다고 내려 달라시는 할머니....
들은 척도 안하고 댁까지 모셔다 드리니 입이 닳도록 고마워 하십니다.

어여 올라가시라고 해도 짐을 막 푸십니다.
거기서 아는 분이 농사지은 양파를 주셨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자꾸 꺼내주시려 그 많은 짐보따리를 다 풀어보십니다.

거절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감사히 받는 것이 할머니 기쁘게 해드리는 길입니다.
잘 받아온 양파를 차에서 꺼내 계단에 두고 바라봅니다.
동글동글 할머니의 따사로운 얼굴이 을비칩니다.

오늘은 유독 하늘이 파랗습니다.


********************************************

요즘 아이들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를 열거해 보라면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어른 무서운줄 모르고, 위 아래가 없고, 생각이 없고,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고, 나눌줄 모르고........

모두가 부정적인 말 일색입니다.

왜 그리 되었을까를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장 호르몬을 맞고 항생제를 들이 부어 기른 육류를 먹고 자란 세대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가족 제도가 붕괴되면서 기가 세어진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예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어린 손자까지 모두 한 집에 살았다는 점을 들먹입니다.
그런 까닭에 센 젊은 아이들의 기가 약한 노인들에게 나누어지고 하여 기의 적정 배분이 이루어졌다는 논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풍족하다 보니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자라서 배고픔도 모르고, 참을성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전에 다섯 손가락 정도 꼽는 거는 보통이고 거기다 조금 넉넉하다 싶으면 마저 다섯 손가락이 동원되는 정도의 자식을 낳았는데 지금은 달랑 하나 떨어뜨리다 보니 양보할줄도 모르는 ‘너 잘났다 세대’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모두가 일리 있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밥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먹기 힘든 세대가 우리네 부모 세대였지요.

그때는 가마솥에 밥을 지어 제일 먼저 그 집의 가장 밥을 먼저 펐습니다.
그리고 신주단지 모시듯 아랫 목에 묻어두고 나머지 식구들이 남은 밥을 퍼먹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앵무새처럼 말도 잘하는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집에 들어오는대로 퍼먹습니다.
어른, 애 순서도 없습니다.
늦은 저녁에 들어온 가장도 전기밥솥에 남아있는 밥을 퍼먹으면 그만입니다.

"인간이 지금이 몇 신데 밥도 못얻어 먹고 다니다 들어와 달그락거려"라는 소리 듣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러니 그 목숨과도 같이 여겼던 밥에 우선 아래, 위가 없어졌습니다.

옛말에 배부르고 등 따수우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지요.
밥 다음으로는 등이 따수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랫목은 항상 어른, 가장의 자리였습니다.

지금은 공부하는 애들이 상전입니다.
걔들이 밥먹으러 나오면 제일 편한 식탁의자를 내어주고, 걔들이 쉬려고 거실로 등장하면 쇼파를 내어줍니다.

"인간이 신문은 꼭 쇼파에서 봐야 하나. 애들 쉬려면 꼭 쇼파 차지하고 난리야."소리 듣습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어른 지정석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른보다 늦게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래서 어둠이 깔리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마음조림과 어른의 눈치를 자연스레 먹으며 자랐습니다.

지금은 그 어른이 일로 지친 몸으로 새벽까지 차 안에서 자식 과외 끝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다 자식이 계단을 내려 오시면 잽싸게 차 문을 열고 나가 가방 받아들고 차문 열어 편안히 타시게 하는 풍경은 이제 이상하지 않습니다.

배고프다고 하기 전에 먹여 주고, 춥다고 하기 전에 따숩게 모시고 다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키운 것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들이대던 부정적인 눈초리를 우리 자신에게 조명해야 할 때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이슬을 먹고 자라지요.

어른들의 가치관과 언행을 먼저 조명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것이 어떤 것인지 깊이깊이,  안으로 안으로 반성하고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상도[전5권]을 읽고...
+   [산골아이들의 책이야기]   |  2008. 8. 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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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책의 제목에 내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상도?
장사의 길이란 뜻 아닌가.

내 장래희망은 상업자가 아닌 작가였지만 이미 내 손은 책의 표지를 넘기고 있었다.
꿈이 다른 나라고 해서 돈벌기 싫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개의 작품도 그렇고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이 책의 주 내용은 장사에 임할 때 갖춰야 할 정신 등에 대해서 2백년 전.
조선 팔도 제일의 전후후무 했던 거상 임상옥의 전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주로 알기에 장사란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한순간의 운으로 기회만 잡으면 된다고 크게 착각하고 있다.
무릇 장사로 성공하려면 돈계산이나 학문, 덕 등은 팔도 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우리가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은 상운이다.
다른 운은 아닐지 몰라도 상운이라는 것은 그 장사꾼의 덕, 학문, 지혜 등으로 예정되어 찾아오기 마련이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 역시 이것을 꿰뚫어 본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임상옥은 몇 안되는 인삼 교역권을 얻기위해 조선의 한 권력자에게 백지 수표를 바칠 정도로 대담한 사람이었다.
그때 그걸 본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비하했지만 상운은 준비된 그에게 조선 제일의 거부 자리에 앉혀 주었다.

흔히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고들 한다.

거상의 씨 역시 마찬가지다. 거상의 씨는 그 노력, 운 등으로 만들어 싹틀 수도 있고 썩어버려 악취를 풍길 수도 있다.

자, 이젠 우리도 품종은 다르지만 우리나라를 지탱할 거목의 씨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산골소년 박 선우

 
 
        

 

산중일기
+   [산골아낙의 책 이야기]   |  2008. 8. 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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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답 에세이’라는 말로도 대충 어떤 풍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인호 작가는 나보다 아들 선우가 좋아하는 작가다.
좋아하는 이유가 나랑 다르다.

고1인 선우는 최인호 작가의 역사 지식 그리고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부분이 무지 부럽고 존경스럽단다.

그러나 나는 역사 등에는 젬뱅이라 그런지 최인호 작가의 그런 책은 아직 안읽었다.
선우랑 대화가 되려면 ‘유림’ 정도는 읽어야지 하고 있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선우는 ‘유림’을 읽고 공자와 노자의 차이점,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과 스승을 대하는 점에 대해 느낌이 깊었다고 한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려면 에미가 ‘유림’을 읽어야 하는데 ....

사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내 자극샘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산중일기’라고 되어 있듯이 일상을 얘기하지만 그 일상이 집이든 어디이든 마음이 가 있는 곳이 그곳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출발을 한다.

읽는 내내 놀라운 것은 천주교신자이면서 불교를 가까이 하고 그 좋은 면을 보려고 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좋은 면이라기 보다 종교의 벽이 애초부터 없음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표현같다.

책 본문 중에 이 대목이 이 책을 쓰게 한 힘이 아닐까.
그 마음이 참 맑아서 좋다.

"나는 불교 신도도 아니고 새삼스레 초파일을 맞아 무어 소원을 빌 것도 없었지만, 여행 중에 만나는 절에 들어서는 꼭 내 식대로 향 피우고 절 세 번 하는 법도를 잊지 않았다.
그게 무슨 즐거운 일인 양 꾸벅꾸벅 고개를 조아려 세 번씩 절을 했다.
나는 그리스도료 신자이지만 그것이 죄라고 생각지 않는다.
불교도 좋은 종교이며 그리스도교도 좋은 종교이므로 나는 종교 앞에서는 그저 두렵고 그리고 죄송스럽다. 두렵고 죄송스러우면 그 순간만이라도 겸손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무엇이 담력이 크다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예수님과, 내가 무에 대단한 데가 있다고 천 년도 넘게 세세연년 내려오는 저 자비로운 불상의 미소 앞에서 무릎을 세울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천주교 신자이지만 절에 가면 한없이 인자해 보이는 부처님 앞에 절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난 불교 신자들이 하는 절 방법을 몰라 서서 한참 부처님만 바라보다 돌아오곤 하였다.

초보농사꾼 역시 산에 갔다가 절이 있으면 꼭 들린다.
초보농사꾼도 나와 같은 생각이지 싶다.

천주교 신자라고 절을 멀리하고 할 일도 아니고, 절을 하면 안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코드가 맞다.

이 책에는 사진이 많이 나오는데 모두가 절 풍경이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의 모습도 나오고, 스님의 고무신, 노스님의 뒷모습, 절 뒤켠, 스님의 차 마시는 모습, 절 문의 그림자 등등 모두가 절 풍경이다.

그냥 사진만으로도 묵상이 절로 되고, 일상의 뒤돌아 봄이 절로 될 것만 같다.
작가가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정말 일상의 일들을 다른 장르로 표현했을 뿐이지만 독자의 마음은 어느 산속 깊은 암자에 가있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선우가 시험 공부하는 중간중간 잠시 읽더니 이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다.

이 책은 사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 읽었다.
그리고 밭에서도 한 꼭지씩 읽으면 답운재밭, 새점밭, 호수밭, 달밭이 절이 된다.
그 옆의 조팝나무꽃은 절 처마끝의 풍경이 되고 말이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우체부 프레드를 읽고
+   [산골아이들의 책이야기]   |  2008. 8. 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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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친절'이란 것은 참 쉽고 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의문을 가져보자.

'나는 프레드처럼 내가 아는 사람 말고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 프레드처럼 언제나 웃으며 처음 보는 사람과도 대화해 본 적이 있는가? 또는 나에게 잘 해준 사람에게만 친철과 관심과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는가?'

프레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한 것은 아니다.
프레드의 대단한 점은, 우리가 할 수 있는것이지만 실천했다는 것과, 우리는 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않았다는 그 차이다.

우리는 크고, 대단한 일에만 신경을 쓴다.
작은 일이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린는 프레드처럼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그 방법은 작은 친절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산골소녀 박주현


 
 
        

 

산골풍경--왜 갑자기 갖고 싶은걸까???
+   [산골풍경]   |  2008. 8. 6.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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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든 문패 하나 갖고 싶습니다.
가족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문패 하나 갖고 싶습니다.

그냥 스쳐지나간 생각이었는데 요즘 맘이 급해졌습니다.
선우, 주현이가 커가는 것이 더럭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큰다는 것은 홀로서기한답시고 집 떠날 날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지요.
서울 지하철 안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으라' 부르짖는 사람의 다급함만큼이나 다급해집니다.

아이들이 커서 집떠나기 전에  그 문패가 집보다 더 기억에 남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문패에 적힌 한 사람이 아프면 모두 가슴을 푸벼 팠고, 한 사람의 기쁨이 가문의 가슴 뻐근함이었음을 기억케 하려면 맘이 급합니다.

그런데 나무를 팔 재간이 없어 평생 처음으로 내 손재주없음을 탓하는 날입니다.

돌절구 속 금붕어를 보며 신세한탄을 합니다.
금붕어는 입을 뻐끔거리며 뭐라뭐라 위로를 합니다.
그 이쁜 입으로 위로하는 그 은빛 언어들이 들리는듯합니다.

2008년 6월 17일

 
 
        

 

산골편지1 -- 내가 산골로 온 이유
+   [산골편지]   |  2008. 8. 6. 03:05  
(이 글은 2001년 4월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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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은 가고, 2월은 도망가고, 3월은 사라진다고 한다.
바람이 제법 쌀쌀한 것을 보니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 싫어 앙탈을 부리는 듯하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어우러질듯하다가도 각자 제 밥그릇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같다.

이곳 산골에서 제일 먼저 피는 꽃은 생강나무 꽃이다. 개나리보다 작으면서 색깔은 옅은 노란색이다.
역시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렇게 거칠게 굴던 바람도 아침 9시가 지나 햇살이 쪽마루에 나자빠질 때가 되면 이내 소문도 없이 꼬리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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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산골에 둥지를 튼지도 10개월이 되었다. 처음에 이사와서는 짐은 풀었는데 마음을 풀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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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루소처럼 우기던 남편은 정작 사표가 반려되고 계속 수리되지 않아 나 먼저 이 산골로 이사와야 했으니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은 서울에서, 나와 아이들은 이곳 산골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결국 그이는 한 달 후 대기업 과장의 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이곳 산골에 합류했다.
남편의 산골로의 귀농이유는 어찌보면 간단했다.

남을 밟고 올라가야 내가 서는 생활, 순수한 마음으로 살기보다는 잔머리와 이기적인 생각으로 정년 퇴직때까지 직장생활하다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빨리 이 이기적인 도시를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둘째 이유는 내 아이들 만큼은 여러 학원 뺑뺑이질 시키지 않고 자연을 닮고, 자연을 친구로 여기고, 흙을 밟고 살게 하고 싶다는 이유가 다였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던터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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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을 고민했다.
결국 아이들 문제때문에 더더욱 결정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컸을 때에는 지금보다 정서가 가장 중요시되는 사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모험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았다.

남편의 가치관이 뚜렷했고, 지금까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주었고,나름대로 인정받는 모습만 보아왔다.

또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다는 열망은 나 역시 대단했던 터였다.
거기에 나는 성당에 다니지만 평소 존경하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자연사랑의 철학이 귀농결심에 일조를 하게 되었다.

법정스님은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울타리로부터,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거듭거듭 둘레에 에워싼 제방을 무너뜨리고라도 늘 흐르는 쪽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봄에 나와 모든 이에게 묻고 싶다.
"그대는 흐르는 쪽으로 살고 있는가?"

2001.4.11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산골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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