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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주동자 _해당되는 글 9건
2011.03.26   귀농편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011.02.28   귀농일기, 나무젓가락 허리에 차고!!! 
2011.02.22   귀농일기, 진종일 업고 일했다. 
2011.02.14   귀농일기, 고구마 모종에 베개도 고여주고... 
2011.01.25   귀농편지,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여행 
2010.06.04   귀농일기, 함께 날개짓해준 사람 
2010.04.09   귀농안했으면 반성못했을 이야기[2탄] 1
2009.11.17   귀농일기--밤에도 잔업을 계속 된다. 
2009.10.28   어느 귀농자의 어떤 여유 1

 

귀농편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산골편지]   |  2011. 3. 26. 22:05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0년 6월 21일

산골의 꽃밭은 모두 태아를 몸에 끌어안고 있는 임신부들의 모임 장소같다.


접시꽃도 그렇게 오늘, 내일 하고 있고, 향기가 죽이는 백합이, 이원무 신부님이 투톤 칼라라고 선물하신 찰스톤 장미가 그렇다.

일부는 아주 작은 머리를 내밀고 막 진통을 시작한 꽃도 있다.


그렇게 꽃밭을 한 바퀴 돌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절로 교육이 된다.


꽃밭은 아름다운 꽃을 보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겨우내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을 보며 끈기와 인내심과 생명력을 배운다.


줄기가 커가고, 이파리가 파리하게 돋기 시작하면서 바람과 태양과 하늘에서 내려주는 비의 눈치도 보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상생을 배운다.

무질서하게 제 잘난 멋에 피어난 것같지만 서열이 분명하다.
어느 왕가의 왕위 계승 서열만큼이나 철저히 지켜짐을 보면서 질서와 섬김을 배운다.


가물면 서로 가지고 있는 뿌리 끝 습기까지 나누어 먹고, 장마철이면 병들지 않으려 서로의 안색을 살펴주면서 배려와 나눔을 배운다.

자신이 가야할 때를 잘 알아 주변 정리를 하고, 올 한 해 함께 한 인연에게도 폐끼치지 않고 고스란히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우리네 삶의 끝도 저런 모습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오늘은 아무리 농사 일이 바빠도 이 가뭄을 함께 견디고 있는 꽃들에게 물을 길어다 줄 생각이다.


****************************************************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신기하게 처음엔 많은 반동이 없다.
그런데 그 충격은 서서히 사람을 옥죄어 오고, 반응이 잔여 지진처럼 오래 간다.

어제는 울진의 어느 직장에 다니는 한 가장이 딸과 함께 스스로 생을 마쳤다는 내용을 들었다.
그것도 여중생인 딸을 데리고...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하루 종일 그 일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게 무슨 일이래?”

“뭘?”

“왜 자살을 하냐고,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지. 사람 사는 게 말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고통이 있으면 웃는 일도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껌처럼 붙어다니는 일...사는 일, 어제 오늘이 똑같지 않은데 말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
.
.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뭘?”
“이제 막 피어나려는 어린 딸은 왜 데려가냐구...”

“................................”

그 다음부터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마누라가 진종일 저 일로 머리를 싸매겠구나 벌써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계속되는 궁시렁거림에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도 일손이 안잡힌다며 답운재밭의 비닐펴러 가야 하는데 안가고 데크칠이나 한단다.


뙤약볕에서 쭈구리고 앉아 칠을 하며 초보농사꾼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초보농사꾼은 월드컵 축구를 보다 그대로 쇼파에서 잠이 들어 있고....
아무리 잠을 청하려고 해도 어린 딸이 왜그리 눈에 밟히는지...

주현이 또래지 싶다.
우리 주현이가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중학생이라면 그 정도의 앳된 소녀가 아닌지...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 침대에서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답답증이 몰려와 커텐을 열고 밤하늘을 보았다.

가뭄이 계속되려는지 별들은 더 똘망똘망하다.


어제 삶을 끝낸 어린 소녀의 눈망울도 그렇게 빛났을텐데...
새벽 3시가 지나고 있다.

그러다 잠시 잠이 들었는지 비몽사몽이었는지 무서운 느낌이 들고 일어나려 해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가위가 눌렸던 모양이다.

그럴 때는 몸이 말을 안듣는다.


겨우 몸을 일으켜 초보농사꾼을 깨우니 벌써 눈치를 채고 일어나 많이 놀란 모양이라며 어서 자라는 말을 되풀이 한다.

그렇게 날을 샌 모양이다.

왜 이 생각이 이토록 오래 나를 붙잡는 걸까?
아마도 주현이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요즘 읽은 책 제목이 “네가 헛되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라는 것이다.


그 말은 오래 전부터 유행되어온 문장이지만 그저 참 기가막힌 표현이다 라는 정도였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전해듣고 보니 어떤 이들은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중환자실 작은 침대에서 삶을 부여잠고 몸을 비틀고, 어떤 이는 주어진 삶을 스스로 정리한다.

사람사는 일,
그거 말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행복과 고통이 번갈아 오는 것,
더 억세게 재수없는 인생은 벌갈아 오는 것이 아니고 행복보다 고통이 투스탭을 밟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눈으로 보면 후자가 재수 옴 붙은 삶이라고 , 불공평한 세상살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신은 공평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니까 바로 눈 앞의 삶만 보면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삶까지 생각하면 자로 잰듯이 공평하리라고 난 믿는다.

나만의 개똥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의 믿음이 있기에 지금 주어진 현실의 순서가 고통 중에 있어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옹달샘이 물고이듯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 사는 일, 톡 까놓고 얘기해서 늘 좋아죽겠는 사람 있는지...


욱하는 마음에 한번쯤 이 더러운 인생...어쩌구 저쩌구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 드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견주어 생각하는 능력이 있고, 그것을 잘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가 아닌지...


노자공자에게서만 지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서, 꽃밭의 생명들을 통해서 나의 삶을 견주어 보는 연습을 하면 한결 삶이 부드러운 것을....

그렇게 하루를 샜다.


그러고 나니 머리가 아파 걸을 때마다 뎅그랑뎅그랑 뒷골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내년에는 나름의 꿈이 있다.


그 꿈 중에 하나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 이 일이 나를 깨우쳐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어떤 이유에서든, 아무쪼록 그렇게 생을 접은 두 영혼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고통없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두손 모아본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보세요.!!

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일기, 나무젓가락 허리에 차고!!!
+   [귀농일기]   |  2011. 2. 28. 14:08  

2010년 6월 19일

 

같은 일을 며칠 하게 되면 짧은 시간을 일해도 피곤함이 빨리 찾아온다.


그것은 신체의 같은 부위를 계속 사용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것같다.
거기다가 심리적인 지루함까지 겹치다 보니 쉽게 피곤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싶다.

 

요즘 하는 일이 그렇다.
지금 며칠째 같은 일을 하다보니 아침에 일을 시작하여 조금 지나면 벌써 힘들어진다.

 

그 일이란 이런 거다.
답운재야콘밭과 호수밭의 야콘밭은 예년처럼 골에만 비닐을 깔았다.


그러다 보니 헛골에 난 풀을 예초기로 깎아야 한다.
한 해에 몇 번씩 예초기로 전 밭을 깎아주다 보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그것이 힘에 부치고 여름 내내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다 들이다 보니 다른 일을 하기 힘들다.

올해부터 소광리에 사시는 분이 자신의 땅에 같이 농사를 지어보자고 하셔서 소광리에도 야콘을 심었다.


물론 친환경 인증이 있는 땅이다.

그곳에 가보니 헛골에도 비닐을 까는 거였다.


그렇게 하면 봄에 비닐을 깔 때 고생만 하면 여름내 다른 작물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은 그렇게 계속 농사를 지으신 모양이다.

 

우리는 김을 매지 않으면 거의 예초기로 풀을 깎아주느라 고생을 했는데...
더군다나 난 왼손잡이라 예초기가 내 몸에 딱 달라붙듯이 편안한 게 아니라 뭔가 불편한 상태로 작업을 하니 다른 사람보다 쉽게 피곤해진다.

 

 

 

결국 우리 밭의 헛골에 난 풀을 단속해야 하는데 예초기로 계속 고생하기 보다는 헛골에 비닐을 깔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쉽게 얘기해서 농사의 3분의 1 정도는 풀하고 함께 씨름하며 보내는 시간이고, 노고라고 생각하면 되지 싶다.
유기농이라 풀이 깔린 것은 당연하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는 이웃 어르신들께서 약을 치던지 하라고 하셨지만 지금은 우리가 하는 농사를 이해하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안하신다.

물론 다른 농가에서는 많이들 그렇게 하고 있다.


춘양에 가서 나무 젓가락을 사오고 비닐을 준비한 다음 시작했다.

나 혼자서 하는 일이라 여러 가지 준비를 해갔다.


제일 먼저 비닐을 혼자 헛골에 끌고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닐마끼가 나를 따라오지 않도록 헛골 양쪽에 말목을 박아 거기에 마끼가 걸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내가 비닐 끝을 잡고 죽 헛골을 걸어가면 비닐이 깔린다.
그 비닐이 바람에 날리지 않아야 하므로 그때에 나무젓가락이 필요하다.


나무 젓가락으로 비닐 양쪽을 집어주면 된다.
일종의 바느질이나 다른 없다.
 
‘허리에 큰칼차고’가 아니라 ‘허리에 나무젓가락을 차고’ 뽑아서 비닐에 꽂으면서 나온다.
그래도 바람에 펄럭이기 때문에 그 다음 헛골에 있는 흙을 삽으로 퍼서 깔아놓은 비닐 위로 던진다.

 

 

 

그렇게 하는 것이 순서이다.
몇 골을 하고 나면 무릎이 끊어지듯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그렇게 며칠을 하고 있으니 같은 곳을 쓰는 부위가 금방 무리가 와서 힘들어진다.

삽으로 흙을 떠붓기 위해 걸아갈 때는 삽을 허리에 끼고 간다.


허리가 펴지는 것이 시원하다.

이 작업을 답운재밭 만큼은 모두 하려고 했는데 힘이 들어 윗밭만 하기로 했다.


아내가 도와준다고 하지만 이 일을 혼자서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는 내 옆에서 야콘모종 바로 옆에 난 풀을 뽑아주고 있다.

한 골을 하고 나서 힘이 들어 쉬면 아내는 아무 말 없이 풀을 뽑는다.
쉬었다가 하라고 해도 자기는 힘든 일이 아니라며 한 골 더 하고 와서 같이 쉬잔다.

 

내가 해놓은 골을 보니 풀로 인해 야콘이 부대끼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것같다.
다른 농가보다 풀이 많고 무성하지만 그것을 모조리 뽑아내려고 기를 쓰지도 않는다.


최선을 다해 풀이 작물보다 웃자라지 않도록 힘을 들이면 나머지는 공생하며 살면 된다.

농사를 지을수록 몸은 힘들어도 인생의 대해 배우는 것은 깊고도 진하다.


오늘은 아내랑 참으로 내가 좋아하는 국수를 먹었다.
그늘 아래 앉아 국수를 먹고 커피 한잔을 나누어 마시니 뭐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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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일기, 진종일 업고 일했다.
+   [귀농일기]   |  2011. 2. 22. 11:06  

2010년 6월

 

5월까지 농부는 열심히 땅에 무엇인가를 심는다.
다른 지방이야 더 빠르겠지만 하여간 산중의 농부는 그렇다.


일단 땅에 고추도 심고, 야콘도 심고, 아피오스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아내가 안심는다고 뻐팅겼던 감자도 기어이 심었다.

그렇게 5월까지 정신없이 보낸다.
몸만 정신 없는 것이 아니고 머리도 정신이 없다.


비가 와 주어야 할 때 와주면 좋으련만 어디 농부의 입맛대로 되는지.

인생살이처럼 척척 손발이 맞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귀농초처럼 애를 태우진 않지만 그래도 비 때문에 머리는 정신이 없다.

 

특히나 어렵게 품을 샀는데 비가 와버리면 다시 품을 사기 어렵기 때문에 그럴 때는 더 마음이 쓰인다.
아내와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의 경우는 오늘 비오면 내일 더 열심히 일해야지 하면 될 일이지만 품을 사야 할 수 있는 일들은 다음 날 그대로 품을 다시 살 수 있게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기니 신경을 쓰게 된다.

 

그나마 논농사를 닫아 걸었으니 그것만 신경쓰지 논농사를 지을 때, 비가 오면 논물도 칼같이 감독해야  한다.
안그러면 바로 논물 보고 돌아서자마자 논둑 터져 포크레인 부른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인지...

 

이제는 밭농사만 지으니 그나마 정신적인 마음쓰임이 그 정도다.
그래도 큰 마음쓰임 없이 땅에 묻을 것은 다 묻어두었으니 올 봄은 하늘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본다.

 

어쨌거나 그렇게 밭에 질서정연하게 모종들을 줄세워 심어놓고 나면 한숨돌리기가 무섭게 풀들이 작물보다 먼저 자란다.
올해는 가뭄이 아주 심했는데 풀들은 가뭄도 타지 않고 제 할일을 충실히 해냈다. 농부의 머리가 흔들리도록...


야콘모종과 고추모종들은 목이 말라 한낮에 가면 머리를 비틀고 온몸을 비틀고 난리지만 풀들을 씽씽하다.

예전에는 그 씽씽함에 골이 났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저도 살려고 이 땅에 몸붙이고 살고 나도 그러기는 마찬가지 입장인데 누가 누구더러 쓸모가 있느니 없까 싶어 이내 마음이 누그러든다.

이제 헛골에 난 풀을 어느 정도 손보자고나서 바로 집으로 올라오는 길의 예초 작업을 했다.
길 양쪽으로 풀들과 칡넝쿨들이 올라와 정신없던 터라 벼르다가 길로 나섰다.


밭에서부터 윙윙 소리를 내며 짊어지고 내려온 예초기로 길가를 다듬는다.

길가를 다듬으면 밭을 평정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 인다.


그러니까 밭의 풀을 평정하기 위해 밭에서 예초기 작업을 할 때에는 이 작업을 하고 나면 야콘모종과 고추 모종 등이 신바람이 나서 키를 키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길가의 풀을 평정할 때는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떠올리면 달아오른 예초기로 인해 등이 뜨거워도 마음은 흐뭇하다.

 

오늘은 손이 떨리도록 등에 아기 하나 업고 진종일 작업을 했다.
봄에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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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일기, 고구마 모종에 베개도 고여주고...
+   [귀농일기]   |  2011. 2. 14. 13:08  

 

세월이 흐르면 얼굴 뜨거운 일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게 된다는 것을 요즘 느낀다.

 

귀농한 사람이 만만하게 심는 것 중 하나가 고구마이다.
우리도 귀농하자마자 심었다.


집 바로 위 작은 터에 우리도 먹고 귀농을 질기게 반대한 서울의 양가 어머님께도 나누어 드린다고 보무도 당당하게 심었다.

그때는 농기계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작업을 몸으로 때웠다.


귀농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는 속으로 ‘역시 예상한대로 농사가 이렇게 힘들구나’하고 뼈저리게 느꼈겠지만 숨 몰아쉬는 소리만 입밖으로 냈지 다른 말은 속으로 쌓아두었는지 이날이때껏 꺼내지 않았다.

 

 

 

하여튼 고구마를 몇 고강심는데 애를 먹었다.


농기계도 없이 밭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고구마 모종을 심는데 온힘을 다 뺐었다.

고구마 몇 고랑을 심는데 아내와 나는 진종일 붙어서 모종을 떠받을듯이 심었다.


심는데 고생한 것으로 치자면 시간이 흐를수록 쭉쭉 자라야 한다는데 사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그 밭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왜냐 하면 몇 포기 되지도 않는 고구마를 위해 그 전밭의 풀을 일일이 맬 수가 없어서 그냥 풀을 놔둔 것이다.
그러니 자동 포기가 된 것이다.
풀들만의 자치판이 되었다.

 

아이들 방 아궁이에서 구워 먹을 정도의 고구마를 수확했을 뿐이다.
그 사연을 이웃 어른께 말씀드렸더니 대뜸


“그래, 모종을 똑바로 세워서 심었능교?”하신다.
“아니 모종을 똑바로 세워서 심지 그럼 뉘워서 심나요?”
뉘워서 심어야 한단다.

 

 

 

모종이 꼿꼿하게 서있는 것이 아니고 쉽게 말해 흐느적거리는 모종을 꼿꼿이 심어 세우려하니 길다란 모종이 자꾸 휘어졌다.
그래서 드 깊이 더 깊이 구덩이를 파고 심었다.
여하튼 그해 농사는 그렇게 절단이 났다.


단지 큰 교훈을 얻고 넘어갔다. 고구마는 세워서 심어야 한다는....

다음 해가 되어 다시 고구마에 도전을 했다.


뉘워 심으라고 했겠다...

뉘워 심었다.


식은죽 먹기였다. 긴 모종을 세워 심느라고 땅을 있는대로 파서 세워 심은 것에 비하면...
그런데 그해도 고구마 수확은 별볼일 없었다. 왤까?

 

이번에는 모종이 타죽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옆으로 뉘워 심으라고 해서 뉘워 심었는데 이번에는 비닐 위에 곧이곧대로 뉘워서 그만 비닐이 태양을 받아 뜨겁다 보니 여린 모종이 탄 것이다.

탔다고 하여 숯검뎅이로 탄 게 아니라 말라죽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해는 무지 더웠다.
또 다른 교훈을 얹어준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뉘워서 심되 머리가 비닐에 닿지 않도록 흙으로 머리를 고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아내가 말했다.


“맞아, 사람이라고 생각해봐. 그 뜨거운 비닐에 머리를 대면 사람이라도 탈나겠다. 그 어린 모종을 그랬으니...사람 머리에 베개를 고여주듯 그렇게 해주어야 하는데...”

 

 

 

농사, 만만한 게 아니다.
만만하게 보고 온 것은 아니지만 지혜로움을 요구하는 직업이 농사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해부터는 뉘워서 심고, 베개(?)를 꼬박꼬박 배주고 있다.

 

그랬더니 탈없이 잘 커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농사는 교훈 하나 얻는데 자그만치 1년이 걸린다.


한번 ‘이 방법이 아닌가벼’했다간 1년 망친다.

신중하고, 지혜롭게 사람처럼 작물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초장에 경험했다.


올해의 고구마를 심는 날이다.
성당에 다녀와 새점밭이 있는 불영계곡으로 달렸다.

 

이 밭으로 가는 길이 없기 때문에 불영계곡을 차로 직접 건넌 다음 개울가에 난 우거진 곳을 지나 밭으로 간다.

어제 아내와 둘이 심다가 못심은 것을 아는 부부가 휴일이라고 와서 함께 심고 있다.


“뉘워서 심는 거 알지? 그리고 모종 끝의 머리를 들게 해주어야 한다구”
아내는 혹여 또 모종을 태울까 걱정인 모양이다.

 

 

 

 

몇 번이나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밭고랑을 오가며 혹여 고구마순의 머리가 비닐에 닿아 뜨거운 놈은 없는지 가끔 일어나 확인하는 눈치다.

이 밭의 고구마는 맛도 좋지만 보기에도 이쁘다.


새빨갛고, 조그많고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한다.
내가 키운 자식 자랑하는 걸 보니 나도 농사꾼 다 됐다.

 

이 밭은 불영계곡과 맞닿은 밭이라서 고구마들도 땅속에서 심심하진 않을 것이다.
계곡물이랑 도란도란 친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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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편지,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여행
+   [산골편지]   |  2011. 1. 25. 13:18  

 

2010년 12월

 

울진읍에 있는 울진고등학교기숙형 고등학교다.

울진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주현이가 기숙사에서 나오는 날이다.
2주에 한 번 나오는데다 이번에는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것이라 딸 아이도 지쳤을 것이라 미리부터 여행 운운한 사람은 나였다.

 

한 해가 가기 전에 조촐하게 네 식구 여행을 가리라.
그렇게 벼르던 날이 닥아왔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이런 저런 일로 내가 심신이 지쳐있었고, 몸살기까지 있어 오한이 들었다.


결국은 여행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이거 아이들에게 한 약속이라 자꾸만 목구멍이 걸렸다.

 

 

 

늦은 저녁에 초보농사꾼과 상의를 했다.
초보농사꾼이 그러면 일단 내일 아침에 결정하고 나서보잔다.


내일 결정하자고 한 것은 초보농사꾼이 요즘 야콘즙 작업을 하는데 그 타임이 새벽에 확인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 야콘즙에 따라 아침에 출발할지를 결정하자는 거였다.

 

 


(▲ 퇴계 이황의  생가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로 여행을 준비하는 것, 참 싫어한다.
여행이란 길을 나서는 것 이전부터가 여행이다.


여행 갈 생각을 하며 들떠하고, 행복해 하고, 칫솔, 수건, 치약 등을 챙기며 흐뭇한 웃음을 함께 가방에 담는 것부터가 여행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가장의 명령에 따라 일단 대기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아침에 초보농사꾼은 일단 하던 일을 일찍 끝냈으니 떠나보잔다.
아이들이 신나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검색하고 의견을 나눈다.

 

 

 

 


(▲ 주현이가 쓴 모자는 지아빠 모자다. 주현이는 머리가 작고 뒤가 짱구라 모자가 잘어울리는데 선우랑 나는 머리가 커서 모자가 전혀.ㅠㅠ)


 

그러나 오한이 드는 것은 여전한 나로서는 가방 하나에 수건, 치약, 칫솔, 양말 등을 챙겼다.
초보농사꾼이 혹시 자고 올 수도 있다는 말을 흘려서다.


자고 오게 되면 그래도 챙겨갈 것이 있어야 하므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만 챙겼다.
그 기본 중에 곰베개 인형과 무릎담요를 잽싸게 챙겼다.

 

그 두 가지는 내가 여행을 갔다 하면 차에 먼저 태우는 종목이다.
우선 여행지에서 딸 아이에게 이 베개를 베어주고 싶은 마음과 작은 담요는 가면서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이 담배를 피워 문을 열면 추우니까의 이유도 있지만 그 담요를 워낙 좋아해서, 이런 저런 이유에  여행 때에는 먼저 챙긴다.

 

두 아이가 시간이 조급한지 의견일치를 금방 본다.
안동으로 가서 이육사 문학관과 도산서원을 먼저 둘러보고 그러면서 다음 여행지를 고민해 보잔다.

 

둘은 이제 역사적 장소나 미술관 등에 관심이 늘 있었다.
에 살지만 방학때마다 서울에 가서 스스로 미술관, 전시회 등을 찾아다니고 느끼고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커가면서 더더욱 그것을 중요시 생각하는 것같아 기특하기 그지없다.

 

 

 

 


(▲ 이황 생가 터에 선 딸 주현이와 나)

 

일단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한 차를 타고 나서는 여행이라 그 자체만으로 가족들은 여행에서 얻는 기쁨을 반 이상 얻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곳이 퇴계 이황의 종택이다.


원래의 건물은 없어졌으나 1929년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터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날은 가문의 행사가 있는지 관광객은 없고, 많은 분들이 장을 보아서 종택으로 분주히 들어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먼저 그곳에 사는 분께 구경을 해도 되겠는지 어디까지만 구경하면 되는지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아이들도 그분들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종택을 둘러보았다.
규모로 보면 그다지 웅장하지 않고 아담하게 오밀조밀지어져 옛 선비의 체취가 더 느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날씨는 아주 추웠지만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려는 선우와 주현이를 보며 으스스한 몸으로 뒤따라간 나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으로 종택을 둘러보았다.

 

 

 

 

다음 행선지는 이육사 문학관이었다.
민족시인, 저항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 본명은 이원록.

 

이육사가 수인 번호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문학관에 도착하여 설명을 듣고 보니 부끄러움이 들었다.

나는 과연 민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거창한 그 무엇을 따지기 앞서 나 개인이 향기를 나누어야 할 때 얼마나 잽싸게 굴었는지 등이 떠올라 내 나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 육사의 감옥생활)

 

아이들과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역시 문학관 구석구석을 정신 없이 둘러보며 감탄을 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문학관이 너무 현대적 냄새가 강하다는 것이다.


향토적 색채를 감안하여 지었더라면 시인을 느끼는 마음도 더 푸근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점을 안내하는 분께 말했더니 더러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고,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아쉬워했다.

또 한 가지는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표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오만가지 표지 중간에 끼어있어 눈을 부릅뜨고 찾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민족시인을 찾아가는 길 표지가 그렇게 사적인 표지와 끼어져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쉬움이 남았고 아이들도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아들 선우는 이육사 문학관에 도착하기 전에 시인의 작품 “교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무지 좋아하는 시라고...시를 읊으며 행마다 가슴 절절함을 토로했다.

<<교목>>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이니리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오한이 들어 칭칭 감고 껴입은 옷에도 한기는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아이들과 이런 감동적인 곳을 여행한다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죽어도 살쪘다는 소리는 안한다. 난.)

 

간단히 이육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육사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 고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하여 대구에서 문화활동을 벌였다.
그후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그때의 수인번호 이육사를 따서 호를 ‘육사’로 지었다.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다시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

 

 

 

 


(▲ 육사의 모습)

 

맨 먼저 들어가면 육사의 가시밭길 같은 생애를 재구성한 영상자료를 상영해주는데 그것을 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선우와 주현이는 ‘여기 오길 정말 잘 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이런 배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대견하여 한참을 두 녀석 말에 귀기울였다.




(▲ 아들 선우와 딸 주현이는  여기 와 보길 정말 잘했다며 감격해 한다. )

 

그 문학관은 안내를 하시는 두 분의 애정이 절절하여 설명을 듣는 사람도 저절로 절절한 느낌이 드는 기분을 전염시켰다.
온 가족이 저와 같은 애정어린 마음으로 문학관을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문학관도 드물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느낀 점은 아이들이 부모의 느낌을 닮아간다는 거다.
그러니까 더 정확히는 생각과 가치관, 보는 관점 등이 많은 부분 부모를 담아간다는 사실...


더더욱 조심하고, 노력하며 살 일이지 싶다.

 

 

 


(▲ 육사가 사용했던 안경과 친필)

 

문학관을 나오면 아이들에게 이육사의 시집 한 권과 그 분의 시 달력도 하나 사서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다음은 이황의 묘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표지판이 없다.
어디에도 안내하는 글 하나 없는 곳에 묘가 있었다.

아쉬움이 너무 컸다.

 


(▲ 이황의 묘소)

 

그 묘를 찾기 전에 조금 산으로 올라가니 하나의 커다란 묘가 있었는데 선우와 난 그 묘가 이황의 묘인줄 알고 그것에서 조금 있다가 내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여 저 아래 마을의 사람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물으니 한참 더 올라가란다.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거기에 이황의 묘가 있었다.
선우는 감격스러운지 한참 무덤을 둘러보고, 무덤 앞에 앉아보고 , 석상들을 어루만져보고 감격해 했다.

 

 

 

다음은 서둘러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퇴계 이황이 서당을 짓고 유생들을 가르쳤던 곳이며, 사후에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문인들과 유림이 세웠다는 곳이다.

 

한참을 걸어서 가는 흙길이 참 고왔다.
길 한 쪽으로 유유히 휘감아 흐르는 강은 살얼음 그림자 등으로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러 선우, 주현이의 환호를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 딸 주현이와 나)

 

서원 한 쪽에는 이황이 직접 지었다는 도산서당이 있었다.
아주 아담하게 지은 작은 공간이었고,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 눈으로만 보기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나는 조심조심 혹여 닳을세라 눈으로만 보았다.
또 그 앞에 들어가지 말아달라는 당부의 팻말도 있었다.

 

그렇게 구경을 하고 위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찰나,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안으로 들어가고 술래잡기를 하는지 난리가 났다.
이럴 때 못참는 성격.

 

거기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멀리서 소리를 질렀더니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말
“야, 들어가지 말란다.”하는 아이들 엄마의 소리.


그럼 바로 옆에 부모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아이들을 그렇게 두었다는 말인지.
그러니까 내가 그곳의 관리인인줄 안 것이다.
선우, 주현이도 몇 번이나 혀를 찬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모라고 말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구석구석 구경을 하는데 우리는 광명실이라고 쓰인 곳에 머물렀다.
양쪽으로 똑같이 건축물이 있는데 그것은 책을 보관하는 곳이란다.

 

 

 

 

 

동, 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아주 높게 지었다.
광명이란 “많은 책이 서광을 비추어준다”는 뜻이라는 뜻이라며 아이들이 한참을 둘러본다.


책 욕심이 많은 우리 아이들로서는 책을 소중히 여기는 선비의 마음씀이 참 따뜻했던 모양이다.

도산서원을 나온 시간이 네 시.


아점을 먹고 나선 가족들이라 속이 허전했다.
그러나 서둘러 볼 곳이 있다며 간 곳이 경북 산림과학박물관이다.

 

주현이는 예전에 왔었던 곳이라며 다시 가보고 싶다고 좋아한다.
초보농사꾼이야 산에 사는 사람이니 당연히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선우야 무조건 보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니 코드가 맞았을 것이고...

 

 

 


(▲ 도산서원, 책을 보관하는 서고)

 

다만 산골아낙 나만 오한이 심하고 편두통이 심해 차에 남아있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박씨 일가들이 안나온다.


푹 빠진 모양이다.

또 호기심 많은 초보농사꾼이 갔으니 얼마나 꼼꼼히 보고 느낄 것인가.
이제 해가 지고 있고 차 안은 추위에 물들었다.


안그래도 오한에 추위에...

기동을 걸려고 보니 키가 안꽂혀 있다.
초보농사꾼이 습관적으로 빼 간 거다. 아이고...


(▲ 선우가 부러운듯 오래 쳐다본다. 이황이 책의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높게 지었다는 서고)

발도 시려오고 머리는 더 아파오고...

 


세 박씨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차에 올라도 난 아, 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키를 빼 간 것을 안 초보농사꾼.
서둘러 밥먹으러 가잔다.


그러면서 일단 밥먹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오늘 많이 보았고, 날씨가 점점 추워져 산골생각들이 간절한 모양인지 다른 두 어린 박씨도 집에 가자고 한다.

 

오면서 숯불에 독특하게 굽기로 유명한 집이라는, 그런 집에 꼭 붙어있는 또 하나의 문구 어디 어디 방송에 나왔다고...그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더니 그제서야 얼었던 발이 녹는다.

 

그렇게 다시 산골로 돌아돌아 오는 길.
아이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소중하고, 느낌이 강하고, 유익한 여행이었다며 기회되면 또 나서잔다.


(▲ 이런 여행을 좋아하는 아들 선우와 주현이가 참 기특하다.)

 

교육이라는 것,


꼭 학교에서 언어영역, 수리영역, 외국어 영역, 사탐영역이라는 글자에 열을 올려야 함은 결코 아니라고 느꼈다.

 

아이들의 각각의 연세에 맞게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감탄하게 해주어야 하는 그런 교육이야말로 살아있는 교육이 아닐까.

 

이육사라면 다 민족시인, 청포도 어쩌구 저쩌구 외워서 다 아는 분이지만 직접 그 분의 생가를 보며, 그 분의 일대기를 설명들으며, 그 분이 쓰던 안경, 친필 원고 등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교과서에 들어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 www.skyheart.co.kr 에서 보세요.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귀농일기, 함께 날개짓해준 사람
+   [귀농일기]   |  2010. 6. 4. 14:25  


얼마 전에 아내가 책을 컴퓨터 책상에 놓고 밥하러 갔기에 들여다 보았다.
몇장을 흥미롭게 읽어가던중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일곱 가지’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에 하도 이런 제목을 내세운 책들이 많아 ‘이젠 독자들도 왠만큼 겁주는 제목이 아니면 들여다도 안보나보다’하고 씁쓸해했었다.

사람들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점점 점점 쎄져서 일거라는 생각을 하며 건성건성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 하나 읽어갈수록 내 이야기를 쓴 듯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대충보면,
첫째로,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어? 이건 내 얘기 아냐?’


난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도시의 한 독방 사무실에서 지내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신입생 시절에는 저 독방(그때 소장실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우린 그렇게 불렀었다)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 일찍 독방에 들어앉았을 때 기분 참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분좋음이 퇴색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박광수씨 말대로라면 난 거기까지만 해도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인데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껏 죽 해왔던 일을 과감히 던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지금 하고 있다.
그러니 난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한 행운의 싸나이다.


둘째, 사는 동안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미쳤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그보다 멋진 일은 없을 거라고 적어 놓았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기 일에 미쳐 보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자신있게 말할 수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햐, 이거 나를 모델로 쓴 거 아냐?”하면서 “이 친구 글 잘쓰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내 생각이랑 일치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글을 잘 쓰고 못쓰고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도 나를 보는듯해서 그런 말이 절로 튀어나와 자판 위에 굴러다녔다.


내가 처음 귀농 얘기를 꺼냈을 때 이구동성으로 “미쳤어.”소리를 들었다.
나를 낳아주시고 죽으라 키워주시고 없는 돈에 머리에 투자하면 망할 일이 없다며 공부를 시키셨던 엄마도 “너 단단히 미쳤구나.”하셨고 며느리에게도 대놓고 “저 놈 미쳤으니까 애미야 이혼해라. 손자들이랑 너까지 고생시킬 수 없다”며 통곡을 하셨다.


그리고 며칠씩 밖에 외출도 안하셨단다. 기운이 없고 챙피해서...
그렇게 난 그 말, "미쳤다"는 말을 귀농 전에 원없이 들었다.


하도 많이 들어서 나중에는 그 말이 그다지 기분 나쁜 말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셋째,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한번쯤 꼭 해봐야 할 일은 멀고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진정 목숨을 걸고 날갯짓을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란다.

정말 그랬다.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삶을 열망했고, 그 선택이 어떤 시련과 고난이 동행할지 눈감고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삶은 단 한번만 주어지기 때문에 뒤로 미룰 수도 없었고,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난 날갯짓을 했다.


그 날갯짓뒤에 후폭풍이 어떻게 몰아칠지도 다 알면서 어린 아이들과 농사
도 모르는 마음 여린 아내를 데리고 난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산골로 둥지를 옮겼다.

그러나 그 날갯짓에 늘 내 옆에서 같은 진동과 폭으로 함께 날갯짓을 해주어 그 길이 결코 외롭지 않게 해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나와 같이 힘든 날갯짓을 해주었다.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아내는 따뜻한 국과 밥을 차려놓고 나를 불렀다.
난 뜬금없이 “고마워. 잘 먹을께”했다.


아내는 그 말이 어떤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함께한 날갯짓에 대한 깊은 내 마음 속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안했으면 반성못했을 이야기[2탄]
+   [귀농일기]   |  2010. 4. 9. 09:16  

 

제목이 ‘귀농을 안했으면 지금도 반성을 못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병아리를 키우면서 아내가 하도 놀려 생각해본 제목이었다.

그러니까 작년 10월에 1탄을 쓰고 2탄을 이제야 쓰니 2년 걸린 셈이다.


자세한 지난 이야기는 <귀농일기>435번 ‘귀농을 안했으면 지금도 반성을 못했을 것이다’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병아리 두 마리를 집에서 키우게 되면서 주현이가 제일 바빠졌다.


워낙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다 보니 그 관심은 놀랄만하다.
병아리들을 바라보는 모습도 진지하고 따뜻하여 나도 닥아가 들여다 보게 만든다.





바깥 세상 적응훈련을 시킨다며 마당으로 데리고 나온 주현이는 갑자기 코스모스 향기를 맡아보라며 병아리의 코를 코스모스 가까이에 들이댄다.
아이들의 생각은 정말 놀랍니다.
기발하고, 세심하면서도, 따듯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저런 아이들을 기계식으로 학원으로 전전하게 하고, 콘트리트 벽에만 가두어 공부만 시키니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참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나날이 그 건조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게 병아리들을 꽃밭에서 놀게 하더니 이번에는 그 꼬맹이들의 집 평수를 두 배로 늘려주어야 한다며 박스를 찾는다.
딸아이의 그런 호기심과 애정을 지켜보던 아내가 바로 박스를 구해다 준다.




어쩌나 하고 보니 박스 하나의 벽을 트더니 다른 박스 하나를 테이프로 붙여주고 있다.
완성된 것을 보니 근사한 넓은 평수의 병아리 집이 되었다.
그제서야 병아리들이 운동도 하고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며 좋아한다.


2009년 10월 14일


오늘은 주현이가 밤에 손전등을 찾는다.
이 밤에 어디를 가느냐고 하니 병아리들을 이제는 이유식을 시켜야한단다.
이유식이라...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가지고 이유식을 어떻게 시킨다는 건지 지켜볼 수밖에...





밭으로 가서 한참만에 나타난 주현이 손에 정말 병아리의 웰빙식사재료가 들려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쑥도 보이고, 씀바귀인지의 잎도 보인다.
유기농하는 에서 뜯어왔으니 병아리 이유식도 유기농 식단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은 이유식은 없을 것이란다.
이번 병아리 때문에 놀란 것은 주현이의 동물사랑의 정도이다.





아이는 따뜻하게 동물을 대하고 있고 사랑하는 흔적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며 아내도 주현이의 행동이 대견한 모양이다.
밭에서 뜯어온 것들을 가위로 잘게 썰어 넣어주는 아이





하늘에서 무엇이 떨어지나 병아리 두 마리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나중에 또 들여다 보니 작은 부리로 쪼아먹기 시작한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아니면 쪼기만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쪼기는 한다.





만약 목구멍으로 못넘긴다면 언젠가는 넘길 것이고, 동물들은 바로 먹이넘기는 것을 잘 하니까 이제는 주현이 말대로 제대로 이유식이 될 것이다.


2009년 10월 20일


점점 병아리 소리도 커지고 손님들이 와서 병아리를 만지자 주현이가 날로날로 신경을 쓰게 되었다.
지엄마를 보면 제발 손님들이 병아리를 못만지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 안타까워 하기 시작했다.




또 언제까지 집안에 둘수는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병아리집을 보일러실로 옮기기로 가족간에 합의를 보았다.
보일러실에 두니 나무를 때기 위해 가서는 운동도 시키고 더 좋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시키기 위해 밖에 내다 놓고 노는 것을 들여다 보니 아무래도 한 녀석의 다리가 문제가 있다.
걷는 것도 뒤뚱거리고 하여 집어 들여다 보았다.
한쪽 다리가 부어올랐다.
그래서 그렇게 발이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항생제도 안맞고 그저 태어나자마자 자연에서 먹이만 먹고 자랐으니 이런 일이 있는가보다.
주현이도 자꾸 병아리가 다리를 전다며 걱정이 많다.




어쩌랴.
지켜보는 수 밖에. 운동을 많이 시키면서...


2009년 10월 29일


가을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야콘밭을 오가며 들녘을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난 섬세하지 못하지만 가을은 그 깊이가 있다.
신부님 집도 가을 풍경속에 잠기어 들고...(가을이라 그런지 이런 말도 구사되고 용됐다.)





그러는 동안에 신부님집 바로 옆에 집을 마련한 닭장에 새로운 식구들이 또 합류를 했다.
한쪽 집만 사용하던 것을 중간에 구멍을 내고 두 집을 다 사용하기로 했다.
두 칸을 오가며 잘 먹고 잘 싸고 있는 닭들.


다시 병아리들의 발육상태를 체크해 보기로 했다.
한 놈은 비록 보일러실에서 컸지만 잘 커주고 있는데 시원찮았던 녀석은 기형의 다리가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마음이 편치가 않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얼마나 고통중에 있을지...
이제는 보일러실에 먹이랑 물을 주러 가는 것이 즐겁지가 않다.


주현이도 자꾸 시원잖은 놈에게 관심이 더 가는 모양이다.


별다른 방법이 없는 날을 보내다 결국은 한 놈이 삶을 등지고 말았다.
작은 구덩이를 파고 흙을 덮어주었다.


그동안 산골가족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주고 간 녀석이다.
이래서 동물키우는 일은 좋은 것만이 아니다.

한 녀석이 산골을 떠나고 나니 나머지 한 녀석이 안스러워 보인다.


둘이 박스속에서 빠약거리며 잘 지냈는데 이제 혼자 살아가고 있는 한 놈 아리가 더 안스러워 보인다.
주현이가 이름을 아리라고 지어주었는데 지엄마가 왜 이름이 아리라고 하니 병아리의 아리란다.


이제 아리도 웬만큼 컸다며 주현이랑 아내가 아리를 이제 다른 닭들이 있는 닭장으로 넣어주는 좋겠다고 결정하고는 주현이를 시켜 닭장으로 보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닭장에 넣어주자마자, 다른 닭들, 특히 제일 큰 숫컷이 이 어린 아리를 잡아먹을 듯 하도 쪼아붙이고 하는통에 앗 뜨거워라 하면서 다시 데리고 내려왔단다.





그 말을 듣고 내 경험도 얘기해 주었다.
주현이보다 먼저  닭을 데리고 갔었다. 닭장에 넣어주러.
그런데 그 놈의 숫놈이 어찌나 아리를 쪼아죽이려고 달려드는지 금방이라도 죽일 것만 같아서 나 역시 주현이처럼 부리나케 데리고 내려왔었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집단으로 쪼임을 당해서 아리가 정신줄을 놓은 것같단다.

다시 아리는 보이러실 박스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2010년 2월 5일


새해가 되었다.
벌써 두 살이 되는셈인가 보다.
보일러실에서 무럭무럭 큰 아리.




이제는 제법 어른티가 난다.
보일러실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 운동도 하고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보고 할짓은 다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는 녀석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늘 있었다.


이제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워낙 수탉이 죽인다고 달려들어 어쩔수가 없다.


아내도 이제는 포기했는지 급한 일도 재껴놓고 보일러실을 치우기 시작한다.
벌써 치운다고 하더니 이래저래 급한 일이 생기니 마음만 썼었단다. 이제는 도저히 안되겠는지 보일러실의 아리집 근처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잘 때는 횟대가 없으니 통나무 횟대 역할을 하라고 커다란 통나무 한토막을 굴려서 횃대처럼 해주었다며 보여준다.





아리는 이제 제집처럼 보일러실 통나무 위에 앉아서 잠을 청하고 자라고 있다.
밖에 나가 운동도 하고 먹이도 쪼아 먹으며 제 잘 곳이 어딘지 이제는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 아내 말이 위의 닭장에서 닭울음소리가 나니까 그 소리를 듣고는 저도 작음 소리로 화답을 하더란다.


2010년 2월 26일


오늘 저녁을 먹으며 아내가 말한다.
이제 위의 동료들이 있는 닭장으로 가기는 틀렸고, 보일러실에 닭장에 있는 암탉을 한 마리 데려다 아리의 벗이 되게 해주어야겠단다.
횃대도 만들어주고...


그런데 그 암탉이 도망가지 않고 보일러실을 제집으로 잘 알는지...
그게 숙제다.

아내 말대로 육아일기를 이렇게 한번이라도 썼었으면 아마 아내가 상장과 금일봉을 내렸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보세요. ^^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귀농일기--밤에도 잔업을 계속 된다.
+   [귀농일기]   |  2009. 11. 17. 02:31  

 

2009년 10월 20일


오늘은 답운재에서 고추를 땄다.
아내와 따면 속도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아내는 손을 잽싸게 놀리기 때문에 고추도 잘 따고, 김매기도 훨씬 앞서서 나간다.
자기 골을 다 매고 돌아와 내 골을 매주면 우린 중간에서 만난다.

낮에는 고추를 따고 저녁에는 고추꼭지를 따야 한다.


아내는 낮에 고추꼭지를 따고 있으면 시간이 아깝다고 한다.
밤에도 할수 있는 일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쉴새 없이 일하는 것이라서 말리지만 안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고추꼭지를 잘 따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체질상으로 못하는 데다가 왼손잡이라 손도 잽싸지는 않다.

그래도 처음은 꼭 같이 해준다. 이정도의 센스가 있어야지.
아내는 왼손으로 고추꼭지 따는 것이 영 신통치않다며 물러나 앉아 구경이나 하란다.


설거지를 끝낸 아내의 손놀림이 정신없이 돌아가더니 벌써 한쪽부터 비어간다. 자리가..

늦도록 고추를 다 땄다.
내일이면 봉화디딜방아로 고추를 빻으러 간다고 약속을 해두어서 일찍 자야한다.

고추는 사실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다.


말목도 모종 다섯 포기정도 마다 일일이 박아주어야 하고, 다른 작물의 수확은 한번 하는데 고추는 여러번 해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일일이 끈을 고추모종의 크기에 따라 한번, 두번 , 세번까지 일일이 다 매주어야 한다.



 


그리고 수확후 일일이 물에 넣어 씻은 후 건조하고 다시 건조한 꼭지를 하나 하나 다 따야 한다.
모두 재래식으로 손이 가야 하는 일이다.


그래도 디딜방아로 가서 내가 손수 빻아서 발송할 때는 마음이 뿌듯하다.
내일 봉화까지가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고추꼭지 딸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이러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로!!

귀농 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어느 귀농자의 어떤 여유
+   [귀농일기]   |  2009. 10. 28.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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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6일


요즘 개복숭아씨를 심고 개복숭아 묘목을 옮겨심는 일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어제도 아내와 함께 집 위의 달밭에서 엎드려 새생명이 잘 자라나는 상상을 하고 그것이 더 자라 복사꽃도 아름답게 피고, 그 꽃이 진 자리에 옛날 분들이 '죽은 사람도 살린다'며 극찬하는 개복숭아가 열리는 상상을 하며 심었다.


그런 상상이 구체적이고 칼라플하면 할수록 기분이 업되고 상대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안든다.
이번에 전지가위도 새로 사고, 허리에 가위를 찰 수 있는 권총집처럼 생긴 것도 두르고 그런 상상을 하니 더더욱 상상력이 힘을 받는 느낌이다.

어제 논산의 이원무신부님이 장미를 다섯그루 주셨다.
신부님 집 주위에 심으신다고 주문하신 것인데 꼼꼼히 직접 심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장미이다.

신부님 말씀으로는 두톤인 장미라서 이쁘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 소린가 했더니 한 송이에 두가지 색깔의 꽃이 핀다는 말씀이시다.
한송이 장미에 꽃잎 끝은 빨강색이고 그 안쪽의 색은 노랑이라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나야 워낙 그런 것에 세심한 관심을 못기울이며 살아서 상상이 안갔지만 투톤이라면 아주 이쁠 것 같았다.

또 이름도 그냥 장미가 아니라 나름대로 이름이 있다.


발음도 어려워 듣고도 생각이 안나 집에 와서 장미를 주문하셨다는 곳의 홈에 들어가보니 이름이 나와 있다.
하나는 오렌지메이안디나이고 투톤이라고 하셨던 그 장미의 이름은 찰스톤이었다.
하여튼 이름도 멋지고 거창하다.

찰스톤이고 오렌지메이단디나이고간에 잘 심어서 살리는 것이 내 임무이다.


귀농하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내가 좋아하는 이런 꽃에 관심을 갖게 된지가 오래 되지 않는다.
꽃이나 작은 나무에 관심은 많은 아내지만 내가 뒷받침을 해주지못한점을 인정한다.
니름대로 이유를 대자면 타지에 와서 적응해야 했고, 이렇게 저렇게 생기는 보도 듣도 못한 문제들을 극복하며 산다는 것이 그럴 여유를 만들어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두서너 해 전부터는 귀농 짠밥이 늘수록 그런 곳에 눈을 돌릴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번에 신부님께서 이 넝쿨장미도 주셨지만 그 장미가 잘 타고 올라갈수 있도록 아치형 구조물도 두개 주셨다.
스텐으로 된 구조물이라 값이 많이 나가게 생겼고 아주 튼튼해 보이는 것이었다.


장미를 받은 날은 개복숭아를 심느라 손을 대지 못하고 오늘 장미뿌리가 마르기 전에 서둘러 일을 시작했다.
일단 스텐 아치 구조물을 박아야 했다.


적당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아내가 설치해 주길 바라는 위치를 설명듣고 땅을 팠다.
그곳은 땅이 푹신 푹신한 곳이 아니라 삽으로 땅을 파는데 쉽지않았다.





일단 두개를 터널식으로 만들 생각을 하는 아내이기 때문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박았다.
그런 다음에 아끼던 양질의 퇴비도 아낌없이 듬뿍 주고, 물도 한다라이 받아다가 듬뿍 주고 각각의 구조물끝에 하나씩 장미를 심었다.
그리고 장미덩쿨이 쓰러지지않도록 장미농원에서 보내준 끈으로 묶어주었다.내 성격에 이건 거의 작품이다, 작품.

분명 찰스톤인지, 오렌지메이안디나인지 구별하는 표시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려니 깜깜하다.
피어보면 알겠지.


찰스톤이면 어떻고, 오렌지메이안디나이면 어떤가. 피어서 이쁘면 되지.


아내 같았으면 같은 종류로 하던지, 하나하나 하던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내가 나오기 전에 후다닥 심었다.
아치 옆에 장미를 다 심었는데 내가 못믿어웠는지 효소 발송준비를 서둘러 끝내고 나와서는 바로 지적을 한다.


위치가 거기이면 앞에 있는 게시판식 구조물에 가려져 멋진 장미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구조물 하나를 더 앞으로 당겨달란다.


말이 앞으로 조금 당기는 거지, 죽으라 땅파고 스텐구조물을 심었는데...
그러나 또 내가 누군가.
심어서 어쩔수없다고만 말 하면 자기가 뽑아서 다시 심어도 심을 사람이니 나도 머리를 썼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심었노라고 , 나도 위치를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고 다 해서 심은 거라고 하고는 잽싸게 나머지 장미를 심으러 집앞으로 올라갔다.

아내는 한동안 구조물을 바라보더니 따라온다.


더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남편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미리 위치를 말해달라는 아내에게 주문을 했고 아내는 효소 택배발송준비를 하느라고 밖에 나와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시간이 없어 말로만 대충 설명한 것을 딥다 후회하는 눈치였다.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없는 상상을 동원해서 장미가 피어 덩쿨이 이렇게 올라가게 해야지 등등의 계획은 있었다. 비록 마음은 밭에  가있었지만.


이제 두그루는 물건너 갔고, 집주위에 심는 것은 이왕 아내가 나와서  도끼눈을 뜨고 있으니 아내의 의향을 물었다. 엄청 배려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미 기분이 상했는지 볼멘소리로 당신이 그렇게 세심하게 배려했다 하니 이것두 그런 깊은 배려심을 발휘해서 심으란다.
어째 뼈있는 말 같았다. 나야 심는 거야 잘 심지.


그렇게 이름도 어려운 장미를 내년이면 볼수있다는 기대를 하면서 다 심고 밭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이왕 심는 거 아내가 그렇게 원하는 아치 구조물의 위치를 하나만 옮겨줄껄 그랬나 싶은 마음이 들어 뒤돌아 보니 아내는 장미를 한참 둘러보고는 밭으로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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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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