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일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다 보니 방학이 없다.
그나마 이번에는 연말에 며칠 함께 산골에서 보냈는데 애들이 참으로 좋아한다.
산골을 저렇게 좋아하니 귀농을 주동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일이 아닐수 없다.
선우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아이를 앞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었다.
고등학교부터는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보내겠다.
어려서는 자연에서 무조건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산골로 데리고 왔지만 이제 고등학교부터는 너희들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선우가 신중하게 듣더니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신중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며칠 후 우리 가족이 다시 마주 앉았을 때, 선우는 산골에 남기로 했단다.
서울로 가는 것도 싫지는 않단다.
더 넓은 곳에서 많은 아이들과 서로 자신을 비교해 가면서 자신을 다듬어 가는 것도 좋다고...
하지만 그 좋은 것보다 산골을 떠나는 것이 훨씬 싫기 때문에 산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마음을 정했단다.
어린줄로만 알았는데 이 놈 이제 믿어도 되겠구나 그때 생각했다.
그 믿는다는 게 그동안 못믿었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말에 책임도 지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알아서 고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되도록이면 아들의 말에 힘을 얹어주어야겠다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벌써 새해로 고3이 되었다.
산골을 좋아하는 아이라 산골에서 며칠 온가족이 뒹굴고 놀고 책보고 야콘즙 노가다 하고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단다.
이제 내일이면 두 놈 다 학교 때문에 이 즐거움도 막을 내려야 한다.
아침부터 애들 인상이 시원찮다.
기운이 없고 말수가 우선 없어졌다.
성격이 섬세하지 못한데 귀농하고 점점 성격도 조금씩 변하는지 이제 눈에 그런 현상이 잘 들어온다.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ㅎㅎ
아내도 벌써 말이 별로 없고, 어제 아니 오늘 새벽까지 웃고 떠들고 하던 것은 어디로 가고 모두 기운이 없다.
저녁을 먹고나니 더 심해졌다.
“자, 가자.”
어디로 가느냐고 모두 쳐다본다. 정신나간 사람 쳐다보듯이 한다.
어디는 어디야 야간 산행이지.
우선 아내가 말린다. 그 이유는 멧돼지 때문인데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며칠 전에 옆 동네 사는 사람이 산에 갔다가 멧돼지를 떼로 만나 나무위로 올라가 화를 면할수 있었다고 하는 소리에 겁많은 사람이 더 난리가 났다.
하도 그러기에 임도 입구까지 간다고 하고 나섰다.
주현이는 낮에 벤자민(사냥개)을 데리고 충분히 운동을 했다며 안간다고 쪽 뻗는다.
그럼 선우랑 둘이서 간다고 하니까 아내가 굳이 따라나선다.
분명히 걱정이 돼서 따라나서는 것이 틀림없다.
집에서 한참 내려온 곳에 임도가 있는데 그 입구에 이르니 약속대로 돌아간다.
‘그런게 어딨어. 말이 그렇지 뭐 뜻이 그런감.‘
들은척도 안하고 가니까 뒤에서 아내가 난리가 났다.
멧돼지 나오면 큰일난다며 손전등을 가지러 집에 갔다 온단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손전등.
조금 가다가 금방 갈테니 조금만 가자고 아내를 구슬렀는데 겁많은 아내는 금방 남편이랑 아들을 멧돼지 입에 넣을 것만 같은 모양이다.
저런 새가슴으로 어떻게 이 깊은 산중으로 들어와 살수있다고 나를 따라왔는지 고마운 일이다.
아내가 안보인다.
뒤돌아 손전등을 가지러 가는 모양이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그만 갈테니 빨리 따라오라고...
눈이 조금 온 날이라 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업어 준다고 꼬셔도 자꾸 손전등을 가지러 간단다.
선우가 가서 엄마를 데리고 온다.
선우 말이 아빠가 그런다고 안가실 분 아니니까 그냥 맘편히 재밌게 가자고, 아빠는 한번 한다면 하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설득을 했단다.
아들 말에 넘어간 아내가 선우 옆구리에 끼어 올라온다.
약속한 곳보다 한참 더 오니 이제는 가는 거리가 워낙 멀어 손전등 얘기는 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내가 되돌아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을테지만 멧돼지가 너무 무서운 모양이다.
그 얘기 말고도 동네에서 멧돼지를 보았다고 한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더 그랬을 것이고 이곳에 처형이랑 운동을 왔을 때도 어김없이 멧돼지를 보았기 때문에 아내의 그 마음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짓도 못한다.
위험을 무릎쓰는 일이야말로 기억에 남고, 추억이 되고, 얻는 것이 크다.
그렇게 생각하니 귀농이 그러네.
또 선우를 데리고 온 데에는 녀석의 기분도 전환시켜줄 마음도 컸지만 죽을 고생을 하거나, 안해본 일을 하게 되면 그만큼 가슴도 크고, 멋진 경험도 쌓인다고 생각한다.
생각같아서는 빙벽등반이라도 함께 가고 싶은데 아쉽지만 야밤에 눈이 쌓인 산길을 굽이굽이 도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이다.
작년인가 이 길에 눈이 정말 허리까지 왔다.
그때 둘이서 나섰다. 그 긴긴 산을 넘어갔다 오자고.
눈이 너무 와서 걸음을 뗄수가 없었다. 그나마 앞에 선 사람 뒤에 가면 뒷사람은 조금 덜 힘들 정도였기 때문에 우리 둘이 번갈아가면 앞장을 서곤 했었다.
그때 선우는 이 눈속에서 죽는줄 알았다고 했다.
눈은 많아 되돌아갈수도 없고 앞으로 너무 많이 남은 길을 갈수도 없고 게다가 날은 저물어가고 배는 너무 고프고 딱 죽는줄 알았단다.
정말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죽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줄 아느냐고 하면서 우린 목적지까지 다녀왔고 아내는 그때도 추운 밖에 서서 안온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그 추억은 지금도 겨울만 되면 선우가 읊은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야밤에 좋은 경험을 만들자는 것이 아닌가.
달빛에 의지하여 어둔 산길을 올라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설악시’를 읊조렸다.
선우가 감탄을 한다.
내 시에 감탄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달빛에 감탄을 하며 내게 고맙다고 정말 너무 멋진 경험이라며 가던 길 멈춰 서서 난리다.
달이 산등성이에 숨었다가 우리가 다시 언덕을 올라가면
등 뒤에서 환히 나타나 비춘다나 뭐라나.
책을 많이 읽은 놈이라 자연에 대한 감탄도 대단하다.
선우가 가던 길 서서 아빠 고마워요, 고마워요 소리를 몇 번이고 하니까 아내는 신바람이 난 모양이다.
애가 감격을 하니 멧돼지 생각은 이제 잊은 모양이다.
“선우야, 멋지지? 정말 그렇지?”
난리가 아니다.
그렇게 내가 애초부터 가려고 했던 곳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엔 아내가 신바람이 났다.
자기도 너무 좋다고...
일전에 넘어져서 아픈 발목이 시큰거린다고 하면서도 달빛에 눈이 온 산길을 이 야밤에 다녀온 것이 좋단다.
아들 선우가 그때의 감동을 글로 썼다니 내 글 밑에 붙이려고 한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복잡해도 잠깐씩은 일상을 벗어나서 안하던 짓도 하고 자연의 깊은 날개 속으로 들어가 보면 새로운 용기가 생긴다고 나는 확신한다.
초보농사꾼 박찬득
(아래 글은 아들 선우가 쓴 글이다)
<B><< 휘영청 달 밝은 밤에.>></B>
자연 속에 은거(?)하는 사람들이 숙명적으로 받게 되는 질문 중 하나는 ‘좋은 풍경 많이 보겠네?’ 이다.
도시 사람들 입장에서 이 질문의 답변은 대단히, 그리고 당연히 긍정적일 것이리라 생각될 것이다.
매일 개성이 실종된 콘크리트 덩어리만 보는 도시인들에 비하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글쎄, 확실히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알지만 부르주아(‘성 안 사람’, 즉 도시인이라는 뜻이 원형임.)분들의 생각처럼 매순간이 그림 같진 않다.
물론 산골의 자연은 아름답다. 하지만 10년 동안 가슴이 울컥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풍경을 떠올리라면 딱 2가지뿐이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산이 밤새 내린 폭설로 인해 온통 희게 빛나던 어느 겨울 아침 풍경 하나, 검푸른 하늘에 모래알처럼 은은하게 흩어져 있는 별들과 그 별을 옅게 덮어주던 구름이 찬란했던 풍경 하나, 두 가지다.
위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풍경은 도시인들과 다름없는 닳도록 친숙한 주위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몇 년 만에 다시 한 번 온 몸을 전율케 하는 자연을 다시 한 번 대면했다.
새해 벽두부터 폭로라니, 슬픈 일이지만 글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불가피해 보인다.
우리 아버지는 용기가 넘치신다. ‘많이’ 넘치신다.
해외에 갔을 때, 위험하니 밤에 나가지 말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겁도 주는 가이드의 경고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지키신 적이 없으시다.
그 뿐이면 말도 안한다.
박찬득 아들이 물을 무서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맥주병 아들을 계곡물에 집어 던지신 건 그 분의 행적 축에도 못 낄 정도다. 주위 사람들(주로 어머니)이 아무리 뜯어말려도 우이독경으로 일관하신다. 덕분에 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깊은 곳도 주저 없이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저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 가족이 함께한 일 중 가장 재밌었고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 역시 바로 아버지와 함께한 만용의 모험들이라는 점이다. 아, 물론 예외도 있다.
몇 가지 모험은 지금도 치가 떨린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이제 방학이 끝난다고 칙칙한 기운이나 팍팍 풍겨대고 있던 것이 또 다시 아버지의 (젊은 놈보다 넘치는)혈기를 자극한 발단이었다.
밤 9시를 향해 시침이 치닫고 있는 때 갑자기 요 앞의 임도 산책을 다녀오자고 하신다. 하지만 따라나선 어머니가 멧돼지와 마주친다며 극력 아버지를 말리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목적지는 ‘임도 입구’로 수정하셨지만, 난 애당초 믿지도 않았다. 아버지 성격에?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아버지는 기어이 어두컴컴한 임도로 나머지 두 사람을 인도(사실은 끌고)가셨다. 물론 어머니와 나는 말도 못하게 불안했다.
옆 동네에서 멧돼지와 마주쳐 죽을 뻔했다는 소식이 실시간으로 제보되고 있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돌아가자는 어머니의 간청에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소의 자세로 일관하신다. 나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였으나 귀농 훨씬 전부터 말리길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동장군의 입김으로 차갑게 얼어붙은 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할 즈음, 불안함이 조금씩 가시고 대신 내 시선은 반짝이는 눈길위로 내리쬐는 달빛으로 옮겨갔다.
빛을 쫓아 올려본 하늘에는 연기처럼 유연한 구름사이로 새침데기처럼 간혹 모습을 나타내는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로 잰 듯 시원스럽게 뻗은 나무와 그 뒤로 푸른 비단처럼 펼쳐진 하늘은 겨울 특유의 상쾌함을 표현하는 듯 했다.
달은 장난스러운 아이처럼 검은 나무 뒤로, 부드러운 구름의 치마폭 안으로 숨으며 내게 나름의 환영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이어 도착한 정상에서 난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정상에서의 풍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불가능하다.
억지로 해봐야 내 감상만 상할 것 역시 명백하니 포기하겠다.
다만 꿈속을 걷는 듯 환상적인 자연에 취해 버렸다는 미약한 감상평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시길.
3년 전 쯤, 구름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성단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 있다.
‘이런 장관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너무 불공평해.’
미안한 말이지만, 간혹 듣게 되는 도시에 매여 있기 때문에 자연을 접할 수 없다는 말은 너무 숙명론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시골 사람이라고 매순간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며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위대한 자연을 보기 위해 종종 떠나며 이번처럼 위험을 무릅쓰기도 한다.
언급했다시피 평생 찬란한 자연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불공평하다.
그리니 늦기 전에 떠나시길. 누가 봐도 무모한 용기라도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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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고딩 박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