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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_해당되는 글 9건
2010.03.24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산골소녀의 제 손님맞이 
2009.10.10   귀농일기--안동교구 귀농가족이 다 모였다. 
2009.07.12   귀농풍경--"엄마, 아빠 점심드세요!!" 
2009.03.18   귀농일기--내가 좋아하는 곳은?? 
2009.03.16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아버지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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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산골편지 -- 살아 생전에 못만날 '인연'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산골소녀의 제 손님맞이
+   [산골편지]   |  2010. 3. 24. 12:38  

충남 천안 병천에서 온 가족이 한양으로 입성하여 그 꾀재재한 짐을 푼 곳이 서대문구 홍제동이었다.
그때부터 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어리디 어린 난 그 전까지는 무엇이 부끄러움인지 잘 몰랐다.


인간이 제일 먼저 느끼는 부끄러움이란 잘은 모르지만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된 ‘벗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닐까.

그러나 난 어려서 서울로 오고도 방학때마다 시골로 내려가 벌거벗고 멱감으러 다녔으므로 그런 부끄러움은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늦게 깨쳤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느낀 부끄러움은 ‘없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시골에 살 때는 모든 것이 풍족했던 어느 종갓집 막내 손녀딸이었다.


그 꼴난 공부한답시고 부모님따라 서울로 들어서고부터는 어린 것이 그런 부끄러움 먼저 배워야 했다.


(▲ 친구들을 삼킨  버스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때는 선생님이 학생집을 죄다 찾아다니는 일명 ‘가정방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신경을 곤두세우셨다.


그래봤댔자 뽀족한 수는 없었지만 내성적인 엄마는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곤 했었다.
나의 친구들이 집에 온다고 하던 날도 여린 엄마는 더 말씀이 없이 멍해 하셨다.

 

혹여 딸아이에게 정신적 충격은 기본이고 그것으로 인해 사기를 잃을까 걱정하셨던 것같다.

아끼바리처럼 기름기가 좔좔 흘렀던 내 고향 병천에서의 살림과 전세살이인 서울살림이 몸뚱아리 하나 옮겨 놓는 것으로 손바닥 뒤집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것으로 치자면 그 당시 엄마, 아버지야말로 정신줄 제대로 잡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 버스 문으로 친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식들 줄줄이 허리춤에 꿰차고 서울에서 공부 빡시게 시켜 시집, 장가 빵빵하게 보내리라는 그 꿈 하나로 올라오셨기에 많은 자식들 눈동자만 합해도 야구경기장의 라이트 이상으로 당신들을 정신들게 했을 것이다.


서울 첫 살이를 그렇게 옹색한 전세살이를 하던 때, 우리 엄마 세대가 끔찍이도 높이 봤던(?)‘선상님’이 가정방문을 온다고 했다.

그때 이웃집에 살던 아줌마가 당신 딸 아이의 옷을 빌려 주었다.


엄마는 그런 것을 빌려달랄 주변머리도 못되는 사람이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우리가 서울 올 때의 입성으로 보나 세간살이로 보나 없는 집구석 모양새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단다.


망한 것도 아니고 시골 재산 그대도 두고 서울로 올라오느라 하루 아침에 거지꼴이 되었으니 같은 거지(?)라도 질이 다르다고 느껴 우리에게만은 살갑게 대해 준 이웃이었다.


이 이웃이 주인집이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같은 전세살이 아니 오히려 우리집 전세보다 못한 지하실 전세살이였다.

요즘 말하는 반지하 차원이 아니다.


그 집은 한참을 똥개천쪽 계단으로 내려가 있는 푸세식 공동화살실이랑 마주 보고 있는 문 속에 살았다.
그러나 먹성, 입성은 왠만한 부잣집 이상이었다.
내일 죽을 것처럼 먹고, 펑하고 사라져버릴 돈인양 옷을 사입고 가전제품을 들여 놓고 살았다.


그 당시 그 집엔 좋은 TV가 있었으니까.
그런 씀씀이로 인해 그 장마에도 똥물이 흘러들어오는 개천 옆 신세를 면치 못했다.






(▲ 이제 우리집 앞으로 가!!! )


우리 엄마는 굶어죽으면 죽었지 남의 외상지는 것과 빚지는 것을 질색으로 아셨다.

어린 기억으로, 그 집에 엄마 몰래 TV 보러 가서(엄마는 구걸하듯 TV보러가는 것을 질색하셨다. 자존심 하나는 풀먹인 교복 칼라처럼 빳빳하셨다.) 창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개천의 똥물이 아는체 하고 들어올 것같아 그 쪽에 눈도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여간, 그 집 아주머니는 시키지도 않은 옷을 싸들고 와서 서울 선생들은 애들 옷을 보고, 세간살이를 보고 애들 기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며 엄마의 대답도 들어보지 않고 자기 딸 옷을 내게 입히곤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깐깐한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아온 엄마에게 얻어 입히는 것도 아니고 빌려 입히는 것이 자존심 구기는 일이었건만 딸아이 기죽인다는 말에 찍소리 안하고 그 아줌마의 행동을 말리지 못했으리라.


그것 생각하면 지금도 엄마의 그 고뇌가 느껴져 머리통을 언 땅에 대고 진정시키고 싶다.

그랬다.
우리 엄마는, 내 엄마는 소설가 박완서님의 엄마처럼 그랬다.






(▲ '어린시절로 돌아가고파...')


박완서님의 엄마랑 우리 엄마가 너무 닮았고, 처지도 비슷했다.
자식들 공부시킨다며 종가집 뛰쳐나와 고생고생 서울살이 이겨낸 것이 똑같다.


박완서님네의 첫 서울살이가 서대문구 현저동이었으면 우리의 첫 서울살이는 서대문구 홍제동이었다는 것도 비슷했다.

시골에서는 윤택했으나 서울살이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악착같이 자식들 공부시킨 점도 엇비슷했다.


그 엄마의 그 딸도 비슷하여 박완서님이나 나나 그런 서울이 너무나도 싫어 방학하는 날, 하이에나가 먹이감을 발견한 것처럼 반은 눈이 뒤집어져서 시골로 내달렸고, 내일 개학을 코 앞에 두고 서울로 상경했던 점 등이 또한 비슷했다.

이제와서 뭐가 어쨌다고 지금 어린시절 시린 생각이 날까.


오늘,
오늘 산골에 산골소녀 주현낭자의 친구들이 온다는 날이다.
주현이가 근처의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곧잘 친구들이 오두막을 찾았지만 오히려 새 집 짓고는 이래저래 바쁘다는 이유로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 "우리 입으로 들어갈 음식이 제대로 될까???")


이제 중학교 졸업을 코 앞에 둔 딸아이에게 그게 미안해 날을 잡았다.
그 놈의 날을 잡으면 왜그리 일이 생기는지.


걱정하는 내게 의외로 초보농사꾼이 아무리 일이 생겨도 애들 오는 날은 건들지 말라고 하였다.
정히나 우리 손님이랑 겹치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저 위의 신부님 집으로 애들을 보내자고 했다.


해먹는 것도 재료만 준비해 주고 지들끼리 구워먹든, 죽쒀먹든 해 먹으라고 하면 오히려 더 신바람 날 거라는 엄명이 있었다.

우리집 ‘가장’의 명대로 ‘주현이 친구오는 날’은 북박이로 고정시켜 두었더니 겹치는 문제들이 풀려갔다.
그래서 자식은 엄마의 똑똑함으로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아빠의 지혜와 우직함이 합해져야 제대로된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5명의 공주들이 온단다.
주현이는 아침부터 신부님집으로 올라가 보일러를 켜고, 혹여 벗들이 추울까봐 벽난로의 불도 다 지펴 두었다.




 


(▲ 벗들을 위해 벽난로도 미리 피워 놓은 산골소녀)


친구들이 읍에서 10시 버스를 타고 온다며 주현이가 걸어서 마을입구로 마중을 나갔다.
엄마가 태워온다니 걸어오는 재미가 있으니 엄마는 신경 하나도 쓰지 말란다.

그래, 뭐 신경쓸 일이 있을까.


그 옛날의 내 엄마처럼 자식 친구들이 온다고 하여 걱정할 일은 내게 없지 않은가.

애들이 걸어서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는다.


딸 아이 말마따나 지금 걸어오면서 추억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찐한 추억을...





(▲ 고기도 굽고... "햐, 빨랑 익어라")


한참만에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내다 보니 다섯 명이 깔깔거리며 오고 있다.
걸어오면서 놀다 와서 늦었다고 겉옷을 다 벗어 던진다. 덥다고...


그 ‘더움’은 소녀시절의 그 풋풋한 생기와 꿈과, 호기심 등이 발동하여 열고 변했으리라.

일단 우리집으로 와서 지들의 하루 먹을 꺼리를 건내주었다.
장을 봐다 달라는 품목만 딱 사주었다.


그 전에 몇 번이나 그 이상의 것은 하나도 못주니(^^) 미리 친구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식단을 짠 후 재료 품목을 넘기라고 했기 때문에 장봐온 것만 넘겨주었다.

그래도 김치, 김, 계란, 귤은 산골아줌마가 서비스로 추가 제공해 주었다.^^


재료 보따리를 나누어 들고 신바람이 나서 올라가는 아이들을 보니 설레임을 안고 소풍가는 아이들 같다.
점심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고, 김치찌개, 핫케익도 만들어 먹고 달고나 등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집의 마당에 나서니 달밭 위 신부님 집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난 고기구워 먹으려니 전선줄이 필요하다고 하여 갖다준 것 말고는 일체 그 근처를 얼씬도 안했다.
부담없이 지들끼리 놀라고...




 


(▲ 세월이 흘러 구두의 땟깔과 사이즈는 변해도 너희들의 우정은 변치 않길 빈다 )


일단 4시가 넘어서 부모님들이 걱정하시기 전에 길을 뜨자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아래 집으로 소리를 친다.

왜 안그렇겠는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지들끼리만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실수도 하고, 자빠지게 웃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기다려주었다.


주현이와 친구들을 태우고 읍으로 달렸다.
차 안에서도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뭐가 그리 재밌었냐니 계란말이는 자신있다고 아줌마께 큰소리쳤는데 말아지질 않아 후라이팬에서 다 먹어 치웠고, 핫케익 담당은 주현이였는데 다 태워서 검은 표고버섯 두 개가 있는 것같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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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들을 위해... 달고나의 달인, 산골소녀의 맛자랑 )


삼겹살이랑 김치찌개만 정상이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두 번이나 구워 먹었단다.
하기야 먹성 좋은 아이들이라 삼겹살을 넉넉히 사고도 부족한 듯 싶어 다시 정육점에 들어가서 산 것까지 다 주었는데 다 뱃속에 들어 앉았단다.

그러면서 너무 아쉽단다.


불영계곡의 어둠이 찾아들었는데도 그 아이들의 웃음과 재잘거림은 계곡물처럼 끝이 없이 이어졌다.

난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 말문을 열었다.


옛말에 ‘엄마 팔아 친구산다’는 말이 있는데 아줌마도 너희만할 때 엄마에게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살아보니 ‘친구’는 엄마를 팔 정도로 소중하고 살가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아줌마도 그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엄마 팔아 친구 산다’고 했듯이 지금 너희들의 이 우정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머리 희어질 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는 말을 흘렸다.
알아들었는지....


아이들을 읍에 내려주고는 집에 도착하면 바로 주현이 핸드폰으로 문자날려 달라고 했다.
주현이 핸드폰이 문자를 받아먹느라 바쁘다.



 


(▲ " 너무 좋다~~~")


다시 불영계곡을 돌아돌아 주현이와 산골로 돌아오는 길.
주현이에게 오늘 친구들과 부족함이 없었느냐고 하니 태어나서 삼겹살 이렇게 많이 먹어보긴 첨이란다.(주현이는 선우만큼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들이 또 오고싶어 한다는 말도 귀에 넣어준다.


그래, 기회되면 다음에 친구의 엄마들과 직접 통화를 하고 졸업하기 전에 한 번 더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주현이가 하품을 하면서 “엄마, 내 손님을 치러서 피곤한가봐“ 한다.


“그래도 나 자면 안돼. 신부님 집 대청소는 했는데 고기 구워먹은 판은 기름이 많아 못 닦았어.그것 다 닦고 자야지.” 한다.

뜨거운 물로 어찌어찌 하라고 일러주었다.


자기 친구가 와서 해먹은 거니 자기가 마무리해야 한다고 하는 말에 아이가 많이 여물었음을 느꼈다.

아이는 제 손님을 철나고 처음 치러본 셈이다.


이렇게 자주 제 손님을 치르다 보면 저도 남의 집 손님으로 갔을 때, 어떠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손님 맞는 사람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자세여야 하는지 스스로 깨쳐갈 것이다.

그것은 주현이가 세상을 깨쳐 가는데 중요한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산골 다락방에서 귀농 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일기--안동교구 귀농가족이 다 모였다.
+   [귀농일기]   |  2009. 10. 10. 15:12  

2009년 8월 20일

 

내가 다니는 성당은 울진성당이고, 안동교구 소속이다.
안동교구에서는 해마다 두 번씩 안동교구 내에 귀농한 가족들 모임을 주선하고 있다.
주선 수준이 아니고 권혁주 요한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 속에 귀농한 가족들이 의미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특강을 듣고 있는 귀농가족들))

 

그런데 매번 주로 춘양, 봉화에서 모임을 갖게 되어 아쉬움이 있었다.
주교님이 바쁘신 일정 중에도 늘 함께 하시어 미사도 주시고 함께 점심을 나누며 귀농가족의 어깨를 감싸주시는데 늘 엇비슷한 장소에서만 모임을 갖다 보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었다.

 

울진에 귀농한 가정도 궁금하실 것이고, 상주, 영덕 등의 다른 지역 귀농자들의 사는 모습도 궁금하실 것같았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졌던 때는 우리가 집을 짓지 못한 상태라 장소가 협소하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그러다 작년에 새집을 짓자마자 아내와 의기투합하였다.
이번 ‘귀농가족 모임’은 주교님과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귀농한 많은 분들을 모시고 우리집에서 하자고...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시키지도 않은 손을 번쩍 들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그저 서로 귀농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만 했다.

 

 

 

 


((▲ 그 많은 인원의 식사를 담당하신 울진본당 성모회장 솔란치아 형님과 남루시아 형님))


 

그날이 어제였다.

사실 한참 전부터 걱정이 된 건 사실이다.
우선 날씨가 걱정이었다.


올 봄부터 여름 내내 비가 왔다.
정말이지 하루 빤한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만약 넓지도 않은 집인데 비라도 오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그 인원의 식사를 어떻게 준비하나 하는 걱정 등이었다.

 

 

 


((▲ 미사초보농사꾼))

 

그러나 첫 번째 고민은 내 소관이 아니고 하느님 소관이니 그분께 맡겼다.
그리고 식사는 울진본당의 성모회에 부탁을 하였다.

며칠 전에 행사장 주위의 풀을 뽑기 시작했다.


밭의 풀은 못뽑아도 여기는 뽑아야 한다며 아내가 몇며칠 들러붙어 풀을 뽑았다.
나는 주차장으로 쓰일 아랫 마당을 포크레인 공사를 하여 번듯한 주차장을 만들었다.


내가 한 게 아니고 늘 하늘마음농장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주는 김승하님의 손을 빌렸다.
이 기회를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 미사중이신 안 상기 신부님))

 

그리고 주차장 주위의 플라스틱 박스 등을 치우고 하다보니 날짜가 코 앞으로 닥아왔다.
며칠 앞두고 울진성당에 세레스를 가지고 가서 천막 그리고 식탁으로 쓰일 길다란 상과 의자, 그릇류를 한 차 싣고 왔다.

마당에 내려놓으니 이제 행사가 임박했음이 실감났다.

아내는 풀을 뽑다 벌에 물려 이마가 퉁퉁 붓고 얼굴이 부어 내일이 행사라며 울상을 지었다. ㅎㅎ

 

 

 

 


((▲ 본 메뉴가 나오기 전))

 

하루 전날 밤, 우리 부부는 마당을 서성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신다는데 혹여 식사 등에 어려움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어쩌지도 못하는 시간, 그저 의미있는 행사가 되기만을 빌기로 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오시는 분들이 찾아오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마을 입구와 다리결에 행사 표시판을 설치했다.
그리고 주차장 주위를 정리하는데  안 신부님과 도미니카 수녀님이 일찍 오셨다.

 

두 분을 뵈니 이제 행사가 시작되는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 안동교구 사목국 도미니카 수녀님과 울진성당 미카엘라 수녀님도 팔을 걷어 부치시고...))

 

드디어 한 분 두 분 모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번 행사에는 많은 분들이 오셨다.
나중까지 오신 분들 모두 해서 약 70분이 참석하신 것으로 안다.

 

9시 30분부터는 접수가 시작되었다.
전원이 이름표를 달아 서로 이름을 확인하고 인사를 나누도록 수녀님이 준비를 해오셨다.

그 다음에는 일일이 사는 곳과 가족소개를 하며 그간의 반가운 얼굴들을 확인했다.

 

 

 


((▲ 울진이 자랑하는 섹스폰

연주자 장진환 님))

 

10시부터 울진지역자활센터 관장인 황천호 관장님의 ‘바람직한 유통망을 위한 전략’이라는 특강이 있었다.
천막 아래 뜨거운 햇살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는 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미사가 시작되었다.
이번 행사에는 애석하게도 주교님이 바쁜 일이 갑자기 생기신 관계로 참석을 못하시고 대산 안 상기 신부님이 미사를 드려주셨다.

안 신부님은 이번 ‘교구설정 4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한 주교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셨고, 행사의 성격과 자세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다.

이제 식사시간...

 

 

 

 


((▲ 봉화신부님과 두 분의 수녀님이 오셨고, 서면의 면장님도 오셨다.))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오t셔서 울진성당 솔란치아 형님과 남 루시아 형님은 땀을 비오듯하며 그 많은 분의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며칠 전에 김치도 담아주셨고, 장날에 장도 다 봐주시어 우리 부부가 행사 준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회덮밥이었다.
회값이 녹녹치 않았지만 울진하면 바닷가를 떠올리는데 회를 하기로 했단다.

 

 

 

 


((▲ 귀농가족의 즐거운 모습))

 

회덮밥과 떡, 잡채, 전, 회 안주 등등을 준비해 주셨고 우린 마당에서 맛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친교의 시간에는 울진에서 유명한 장진환 섹스폰 연주자를 초청하여 섹스폰 연주를 감상했고, 형제, 자매님들의 노래솜씨도 들을 수 있었다.

 

이럴 때 신부님과 수녀님의 노래솜씨를 못들으면 귀에 가시가 돋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 무대로 모셨다.

 

 


((▲ 산골 안주인인 아내도 한 곡 ))

 

나중에 봉화의 신부님과 수녀님 두 분도 행사를 보시기 위해 오셨다.
더운 날 먼길 오신 신부님, 수녀님께 감사한 마음이었다.

또 내가 사는 서면의 남치우 면장님도 오셔서 행사의 흥을 돋워 주셨다.

 

 


((▲안 신부님도 마이크를 잡으시고 ))

 

울진의 산골에서 울려퍼지는 섹스폰 소리...
그동안 흙묻히고 살던 우리 귀농인들의 마음을 만져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섹스폰 소리를 들으며 그간의 농사이야기며 가공이야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귀농가족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 서로 부등켜 안고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
서로 같은 생각으로 자연으로 돌아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우리 귀농인들...

 

 

 


((▲ 늘 귀농가족 모임을 준비하시느라 바쁘셨던 도미니카 수녀님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다시 힘찬 날들을 위해 파이팅을 하고 악수를 나누며 앞으로의 날들에 힘을 실었다.

어려운 점도 많았고, 힘든 점도 많았고, 상처도 많았겠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의미있는 시간이 되길 바랬는데 내 바램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반가운 모습들이 눈에서 멀어지고 우리는 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 울진에 와서 알게 된 분인데 무지 마음이 따뜻하고 하늘마음농장을 아껴주시는 분이다.))

 

안동교구 모든 귀농인들이 돌아가고 우리 둘은 마당을 한참 걸었다.
부족한 점이 많았겠지만 행사에 최선을 다해서 마음이 참 좋다고 서로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 전체 사진을 찍었다. 그 이전에 사정상 가신 가족들이 있어 모두 함께 찍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귀농생활도 이처럼 가슴벅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참 귀농인들과 함께 했던 마당을 서성였다.

(그날 경비는 안동교구에서도 주셨고, 참석하신 가족당 만원씩 걷은 것으로 충당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www.skyheart.co.kr로!!

 

귀농주동자 초보농사꾼 박찬득 프란치스코


 
 
        

 

귀농풍경--"엄마, 아빠 점심드세요!!"
+   [산골풍경]   |  2009. 7. 1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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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6일 토요일

아들 선우와 주현이가 달밭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지들끼리 한참을 머리맞대고 무얼했는지 점심을 먹으란다.

초보농사꾼과 나는 달밭에서 오늘도 풀과의 전쟁의 벌이고 있었다.
팔목이 아프고, 무릎이 아프고...
한 골을 끝낼 때마다 서로 아이고 소리를 내면서도 서로의 손을 마주치며 다시 한 골을 잡고 앉는다.
그래서 한 번 웃으며 다시 시작한다.

둘이 하면 덜 심심하고 일도 빨리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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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skyheart.co.kr/po/S8005344.jpg">

아이들이 빨리 오셔야 한다며 다시 한번 재촉을 한다.
아이들이 점심으로 준비해 준 것은 따뜻한 스파게티...

사실 스파게티 소스는 지난 번에 이원무 신부님이 오셨을 때 아이들 주라고 직접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셨다.
그것으로 애들이 점심을 차려주었다.
물론 오이피클과 치즈가루도 신부님 찬조...

너희들은 왜 안먹느냐고 하니 엄마, 아빠 드시는 것 보고 자기들 것은 끓여 먹는단다.
주현이는 식으면 맛없다고 빨랑 드시라고 성화다.

엄마, 아빠가 먹는 것을 다 지켜보고 나서 지들끼리 양을 정해 다시 끓인다.

이제 다 컸다고 엄마, 아빠 밭에서 일하시는데 힘들다고 이렇게 점심도 차려주고...

선우가 공부 하다 창 밖을 내다 보니 엄마, 아빠가 풀을 뽑고 계시더라며 마음이 안좋았단다.
고딩이라 나가 도와드리면 엄마가 걱정하실 거고..

마음이면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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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skyheart.co.kr/po/S8005342.jpg">

나도 아이들이 스파게티를 먹는 것을 본다.
선우가 학교 급식 때도 스파게티가 나오는데 완전히 달달한 것이 이 맛하고는 천지차이라고...
오늘 이렇게 스파게티 먹을 줄 몰랐다며 즐겁게들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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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skyheart.co.kr/po/S8005347.jpg">

산골아이들을  자식처럼 대해주시는 신부님...
다음에는 어떤 요리가 먹고 싶은지 정해주면 만들어 주시겠다며 주현(안나)이랑 요리책을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실 때는 등골이 따사로웠다.

밭으로 가려는데 둘이서 설거지 하는 소리가 달그락달그락 들린다.

아이들이 차려준 점심으로 인해 풀뽑는 내내 마음까지 든든했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www.skyheart.co.kr--하늘마음농장)




 
 
        

 

귀농일기--내가 좋아하는 곳은??
+   [귀농일기]   |  2009. 3. 1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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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0일

난 오지를 좋아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좋아하듯 땅도 누구도 크게 손상시키지 않은 곳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나의 이런 성향을 알고 어디가 참 오지더라, 어디가 정말 끝내주더라 하는 말을 들으면 간단한 약도만으로도 우린 바로 확인사살에 돌입한다.

한번은 산골아낙에게도 말도 안하고 나섰다가 어두워지고 밤이 되어 집에 오니 난리가 났었던적도 있었다.
실종신고를 한다고 동네 형에게 말하고 난리였다.
처음 가려고 한 것이 아니고 볼일 보러 나갔다가 그 생각이 탁 나면 바로 돌진...
핸드폰이 안터진는 곳이니 연락할 방법도 없고 금방 갔다오면 되지 하고 나섰다가 그렇게 된 적도 몇번 있었다.
아내는 그런 남편과 살아서 알아서 감잡으면 좋겠는데 꼭 걱정을 하고 별별 상상을 다하고 기진맥진해 있곤 한다.
이젠 나이도 먹고 했으니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아직도 그 오지가 부르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 근성은 못고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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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논산의 이원무 신부님이 오셨기에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새점 밭을 구경시켜 드렸다.
새점밭은 바로 불영계곡과 접해 있어서 풍광이 좋다.
신부님과는 통하는 것이 많아서 말씀드렸더니 가보자고 하신다.

아내랑 새점밭으로 가서 밭을 보고 우린 불영계곡을 걸었다.
신부님도 풍광이 좋다고 하신다.

불영계곡의 물소리가 힘차다.
불영계곡은 겨울에도 을씨년스럽지 않다.
겨울에도 늠름하면서 멋지다.

새점밭 바로 옆이 이 사진의 모습이다.

신부님과 계곡을 걸으며 이런 저런 오지 이야기를 하며 한바탕 웃었더니 계곡도 쩌렁쩌렁 울리는듯했다.
사람과 사람
계곡물과 사람
모두 한데 어우러져 이야기꽃을 피웠다.

초보농사꾼 박찬득(www.skyheart.co.kr--하늘마음농장)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아버지 신부님
+   [산골편지]   |  2009. 3. 1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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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2CC09">요즘 산골날씨가 좀 녹녹하다 보니 슬슬 봄생각이 끼어든다.
인간의 간사함은 이런 데서도 제 구실을 잘 하고 있다.
이러다 엊그제처럼 맹추위가 기세를 떨치면
‘봄은 무슨 얼어죽을 봄’하면서 자신의 경박함에 쐐기를 박는다.

귀농 초같았으면 지금 온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어 어디가 밭이고, 어디가 개울인지 이곳에 몸붙이고 사는 자 말고는 어림짐작을 하기도 어려울 지경일 것이다.

그러나 지구온난화인지 뭔지 발음도 어려운 현상으로 지금 산골에 눈이 없다.
냉이가 금방이라도 머리를 치박고 땅 위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쭈그리고 앉아 땅의 간지러움을 함께 느끼고 있다.

오늘은 요정도로 물러나지만 다음에는 봄바구니와 칼을 옆에 차고 가리라 다짐하는 날이다.</font>

*****************************************************

그대는 살면서 팔다리가 갑자기 없어진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지...
난 말이다.
머리 털나고 처음으로 팔 다리가 갑자기 없어진 사람처럼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벅찼던 때가 있었다.

낯설고 물선 곳으로의 귀농.
누가 등을 떠밀어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선택하여 내려온 곳이지만 핏줄들이 바글바글하게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무인도나 다름없는 낯선 울진으로의 귀농은 내게 그런 경험을 하게 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모르는 사람들뿐이고, 핏줄의 그림도 없는 이곳 울진으로의 귀농을 결심하고 내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운 적이 있었다.

‘신은 어디에도 계시고 그곳에도 성당이 있을 것이다’
그 한 줄의 주문을 믿고 난 주동자인 초보농사꾼보다 더 서둘러 귀농을 했다.
그 한 줄이 나의 빽이었고, 든든한 후원자였고, 영원한 도반이었다.

그렇게 울진으로 내려와 처음 간 곳이 울진성당.
그때 주임 신부님이신 분이 이 상복 비오 신부님이시다.
신부님은 어디에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곳 울진에서  등을 비비도록 언덕이 되어 주셨던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를 시켜 주셨고 그것도 모자라 상대방이 관심이 있던 없던 상세설명까지 잊지 않으셨다.
귀농 전에 무엇을 하던 사람들이고, 지금은 서면에 귀농해서....하시면서...

신부님의 그런 사랑과 관심으로 난 숨을 쉴 수 있었고, 모가지에 깁스한 사람처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의 일이 어떻게 여봐란듯이 쭉 좋은 쪽으로만 작용하는지...
신부님이 함창본당으로 발령받아 가셨다.
그때의 허전함과 서운함과 절망감이란...
다시 한번 등이 시리도록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신부님이 함창 본당으로 가시고도 우린 몇 번 찾아 갔었다.(한번만 신부님을 뵐 수 있었지만...)
 야콘을 수확하면 제일 먼저 보내드리고 싶어 신부님 모습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포장을 했었다.

그러다 오늘 신부님이 산골에 오셨다.
내가 오늘 당장 찾아 뵙겠다는 전화를 드렸더니 마침 울진에 오신다며 월요일에 들리시겠단다.
얼마나 좋던지...

아버지 신부님께 새로 지은 집도 보여드리고  선우(아론), 주현(안나)의 큰 모습도 보여드리고 앞으로의 계획도 말씀드려야지....
기다림의 하루는 참으로 길었다.

드디어 신부님이 산골에 오셨다.
신부님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따사로움은 귀농하고 처음으로 잡았을 때의 그 온기 그대로였다.
또 한 가지 그대로 인 것은 소년처럼 맑은 웃음이었다.

신부님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드렸고, 상의드리고 싶었던 부분도 말씀드렸다.
오랫만에 막내 딸네 오신 친정 아버지에게 말씀드리듯 그렇게 두서 없이 이것저것 드릴 말씀이 입에서 다투어 쏟아져 나왔다.

신부님은 그런 나를 다 이해하시는듯 이래도 웃으시고, 저래도 웃으시며 귀한 말씀을 해주셨다.
홈에 자주 오시어  산골가족의 사는 모습을 잘 보고 간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엄나무 가시보다 더 굵은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듯 아리하게 매어왔다.

아쉽게도 두 분의 손님과 함께 오셔서 오래 계시지는 못했다.

신부님은 또 보자며 잘 살라는 말씀을 뒤로 하고 가셨다.

헤어짐은 말이다.
희망의 다른 말이다.
헤어짐은 슬픔이 다가 아니다.
이런 아리한 헤어짐 뒤에는 희망이 돋는다. 시소처럼...

신부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가셨고, 나는 훗날 아버지 신부님께 자랑할 꺼리를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것이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비 맞은 중마냥 중얼거렸다.
“신부님, 건강만 하세요. 저도 잘 살께요...”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www.skyheart.co.kr--하늘마음농장)


 
 
        

 

귀농풍경-- 손님 중 첨입니다.
+   [산골풍경]   |  2008. 12. 1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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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는 형님과 수녀님이 다녀가셨어요.
나 바쁘다고 자주 못오시던 분인데 오늘 오셔서 같이 다락방에서 기도도 하고, 산책도 하고, 사는 이야기도 하고, 함께 저녁도 먹고....
의미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손을 흔들고 들어와 설거지를 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길을 잘못들어 어디인데 차를 돌리려 하면 미끄러져 위험한 상황이라고...

크...

왜 그 위로 올라가셨댜???

초보농사꾼과 함께 달려가보니 언덕에서 차를 돌리다 자꾸 개울로 떨어질 것같으니 전화를 하셨더라구요.
그곳은 우리집과 마찬가지로 핸드폰이 안터지는데 어찌 전화를 하셨을까...
거기로는 가셨을 리가 없고 다른 곳인데 선우엄마가 잘못 전화받은 것 아니냐며 걱정하고 갔었는데...

그러니까 우리집에서 내려가면 왼쪽으로 내려가야 국도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끊임없이 올라간 것...

우리집을 찾아 올 때 그 위까지 가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잘 와서 돌아갈 때 그 위로 가는 사람은 오늘 그 형님이 최초...

"내가 길치잖아"하며 웃는 형님...
무지 놀라서는 서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두 분이 그 외진 길에서 얼마나 놀라셨을까...

초보농사꾼이 어찌어찌하여 차를 돌리고 헤어져 들어오면서 초보농사꾼이 영주쪽으로 가실까봐 걱정걱정을 합니다.
중간에 전화를 했더니 형님이 잘 울진읍쪽으로 가고 있다고...

이제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주셨네요.

오늘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다며 좋아하십니다.
상대방이 그정도로 좋았다면 당연히 저도 그정도로 행복한 것이지요......

함께 둘러앉아
다락방에서 셋이서 기도를 하는데 정말 좋더라구요.

그리고 저녁은 형님이 팔 걷어부치고 하셨어요.
프랑스 신부님들 오셨을 때처럼...^^
저는 그 사이 초보농사꾼과 야콘을 씻고...

꽃이 피면서 소리를 내고 빙빙 춤추며 핀다는 왕달맞이꽃처럼 같이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빙금빙글 돌렸습니다.

기쁜 날입니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www.skyheart.co.kr--하늘마음농장)


 
 
        

 

귀농풍경 -- 솔잎 생선찜
+   [산골풍경]   |  2008. 12. 1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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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울진 본당 신부님이 다녀가셨다.
선우(아론)가 늘 아버지처럼 따뜻하시고 자상하신 분이라며 무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선우는 아주 열을 내며 신부님의 품성에 대해 토해내곤 한다.


사람은 살면서 길 위에서 누구는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한 말이 선우의 모습을 보면 더 생동감있게 느껴진다.
선우는 신부님의 모습을 보며 가치관을 보다 더 세밀하게 따뜻하게 세우고 있을 것이다.

아론이 있을 때 신부님이 오셔서 참 좋았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식사를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특별히 음식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정성껏 , 마음으로 준비하면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후다닥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 식사를 하시고 차도 한 잔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부님이 가시고 나니 설거지 작업으로 바로 투입이 안된다.
누군가 떠나고 나면 그 향기와 여운이 남는다.


더군다나
사제가 다녀가시고 나면 더더욱 그 향기와 여운이 짙고 짙어서 바로 일을 시작 못한다.

그래서 음악을 들으며 왔다갔다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그렇게 거실을 돌아다녔다.


귀농하고 나에게 있어 신앙은 내 몸뚱아리의 뿌리요, 내가 기대는 기둥이요, 내 삶을 밝히는 등장불이다.
귀농 전에도 매일 미사를 다니며 힘찬 신앙생활을 했지만 연고도 없는 낯선 곳으로  귀농후의 그것은 또 다른 의미다.

이제 마음을 잡고 설거지를 하는데 냄비가 랜지 위에 많다.


그 중 하나는 뭐지??하고 열었는데...

앗!!~~#^%$*&#@!


신부님 드린다고 그 어둔 언덕으로 올가다 솔가지를 따다가 서울에서 어머님이 공수해 주신 맛난 생선을 쪘다.
솔향도 향기지만 기름을 넣지 않고 이렇게 찌면 아주 담백하고 생선의 고유한 맛을 솔향과 함께 느낄 수 있어 정성껏 쪘건만
까맣게 잊고 식사를 드렸으니...


이거, 이거...


아쉽다.
산골에 오셨으니 솔향기와 담백함을 드리고 싶었는데...
뭔 반찬이 그렇게 많았다고 해놓은 생선도 못드리고 난리인지...

놀라는 나를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초보농사꾼이 달려온다.
사실을 말하니...
오늘은 망치 이야기를 안한다.


내가 너무 아쉬워 하니 그 농담은 안하는 것으로 보아 나를 읽은 것같다.

나의 생각을 손이 잘 알아주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하늘마음농장 -- www.skyheart.co.kr)


 


 
 
        

 

산골풍경 -- 귀농 후, 생일잔치
+   [산골풍경]   |  2008. 11. 28. 22:17  

오늘 부랴부랴 택배발송하고, 정리하고 들어와 오후에 아점을 먹었습니다.
영 몸이 으슬으슬...

결국은 보건소에 갔다 오는데 초보농사꾼이 답운재밭에서 트렉터 작업을 하고 이웃집에 들러 서류를 가져 와서는 방앗간에서 막거리를 먹는다고 합니다.
이웃분이 자꾸 한잔 하고 가자고 하고 안주도 부인이 만들어 오셔서 나도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술은 못마셔도...
안주 먹으면서...

초보농사꾼에게 진종일
"오늘 내 생일"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 주었더니 웃기만 합니다.

마을입구에서 술을 마시고 각자 차 나누어 타고 산골로 왔습니다.
밥생각이 둘다 없었습니다.
안주도 먹고 초보농사꾼은 막걸리를 마셨으니...

그래서 씻고 홈을 열었더니
"선우 엄마, 촛불꺼야지...빨랑 나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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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인줄 알고, 그리고 귀찮고 하여 싫다고 하고 안나가니 빨랑 오랍니다.
나가 보니...
크....

아니 이게 뭐야...

내가 사다놓은 빵 사이에 크림이 들어 있는 먹던 빵에 성냥을 다섯 개 꼽아 놓고, 신부님이 선물로 주신 마주앙을 두 잔 따뤄 놓고 기다리고 있네요.

씩 웃으면서
성냥 하나의 나이가 10년이랍니다.
다섯 개가 꼽혀 있습니다.

헉....

그럼 내가 50살이냐고 따졌더니 그냥 넘어가자고 하네요.
그래도 어떻게 나이를 줄여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노인네를 만드냐고 하니 '쉽게 가자'며 웃습니다.

며칠 전에 미리 내 생일이 이번 주 금요일이라고 했을 때도 한 마디 딱 하더라구요.
"잊어" ㅜㅜ

그런 사람이 이런 준비를 했네요.
너무 기운이 없어서 안나가려다 나갔더니 이런 기쁨도 있었습니다.

성냥에 불을 당기더니 불라고 하네요.
졸지에 50세 생일 잔치를 했습니다.
이 46세 되도록 이런 생일상은 첨입니다.
성냥이 무슨 초라고...ㅋㅋ

촛불만 끄고 있으니 케익도 먹어야 한다네요.
케익은 무슨 얼어 죽을 케익...
그냥 빵이지..
그것두 내가 먹던 빵...

그래서 둘이 한 조각씩 뜯어 먹었습니다.
마주앙도 한잔 먹었구요.
근데 안주를 찾으니 영 못찾겠네요.
오징어채가 있었는데...

결국은 못찾고 마른 멸치와 한 잔 했네요.
마른 멸치에 마주앙...크....

이렇게 생일 잔치를 치렀습니다.

그러더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선우 엄마, 내가 생일 잔칫상 차려준 거다"합니다.

속삭여 봅니다.
'선우 아빠 , 고마워. 귀농 전에 받았던 꽃다발과 케익보다도 더 훌륭하다....당신이 직접 차려주고...'

귀농하고, 이렇게 행복한 귀빠진 날이 지나고 있네요.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하늘마음농장 -- www.skyhe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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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편지 -- 살아 생전에 못만날 '인연'
+   [산골편지]   |  2008. 11. 9. 23:37  

2008년 10월 19일

미사중에 초보농사꾼(프란치스코)가 팔뚝을 툭툭치며 내 눈에 들이미는 주보...
‘미사시간에 거룩하게 미사나 드리지 못하고 평소와 달리 왠 주보를 들이대나??‘ 하며 어벙벙해 있는 내게 주보의 본당소식란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내용인즉, 프랑스에서 신부님 다섯 분이 우리 본당을 반문하시는데 모시고 싶은 가정은 신청을 하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다음 주면 초보농사꾼이 서울 다녀와야 하는 일이랑 겹치기 때문에 주보글만 읽었을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런데 모기만한 소리로

“우리 집에 모시자”한다.

“서울은??”

“못가는 거지. 뭐.”

기분이 참 좋았다.
그런데 다섯 분이 어디서 다 주무시나?...
반찬은?? 난 프랑스 음식 할줄 아는 게 없는데....

그건 다음에 고민하기로 하고 우린 그렇게 신부님 강론말씀은 안듣고 일단 모시기로 용감하게 합의를 끝냈다.

미사가 끝나고 추가설명을 하시는데 보니 빠리 근교에서 사목하시는 분들로 금년 사제서품 15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나라를 방문하신다는 추가 설명을 하셨다.

지금은 경주에 묵고 계시는데 성당에서 한꺼번에 모시는 것보다는 한국의 가정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는 것도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하여 한 가정에 한 분씩 모신다는 거였다.
그러니 총 다섯 가정의 신청을 받는 거였다.
그런데 우린 용감하게도 다섯 분을 다 모시려 했던 것...

어쨌거나 날짜는 부득부득 닥아오고 나의 염려와 걱정도 얼떨결에 몸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를 제외한 세 가정에서 신청을 하였기 때문에 한 분은 남루시아 자매님이 모시기로 했다.

난 남루시아 자매님께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서 같이 모시면 신부님들이 우리랑 말이 안통해도 두 분이 이야기하시면 되겠다는 생각과 요리를 잘 하는 루시아 형님과 함께 모시면 의지도 되고 금상첨화일 것같았다.

그렇게 합의를 보고 마침 우리 차를 폐차했기 때문에 신부님은 신 베드로 형제님(남루시아 형님의 남편)이 모시고 산골로 오시기로 했다.

사제를 우리 집에 모시고 일박을 하는 것은  처음은 아니지만 그 일은 예삿일은 아니라고 늘 생각했다.
사제를 모신다는 것은 늘 기쁨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번에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다.

예전에 했었던 것처럼 신부님들이 오시기 전날 이불과 요, 베개 커버를 다 뜯어 빨고 그 속은 햇살에 죄다 내다 널었다.

<img src="http://www.skyheart.co.kr/po/S8004626e.jpg">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까지 대청소를 했다.
마음은 왜그리 걱정스러운지...

새벽 4시가 넘도록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엇이 나를 잠못들게 하는지...
이번 ‘인연’에서 가장 마음을 쓰게 된 부분이 있었다.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이 세상 그 많은 사람 중에 인연이 된다는 것. 그것도 두 번 다시 살아 생전에는 못만날 인연이라는 것이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또 하나는 다른 집에서 모시면 더 의미있고, 기억에 남고, 재밌었을텐데 혹여 우리집으로 오시게 되어 그 기회를 놓치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난 모든 일이든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뒷 마음이 깨끗하다. 내 능력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고 나머지는 내 능력밖의 일이니까...
그러나  내 스스로 돌아보아 어떤 이유에서든 최선을 다 못했으면 두고두고 스스로를 닦달하고, 후회를 하고, 아려하는 타입이다.

그렇게 날이 샜다.
드디어 신부님이 오시는 날.

 남루시아 형님이 오후에 장을 다 봐오셨다.
그리고 형님은 노련한 손놀림으로 저녁준비를 하셨다.
나야 양파까고, 파, 마늘까고, 직접 딴 고사리 물에 불리고...하는 아주 중요한 일(?)을 거들었다.

<img src="http://www.skyheart.co.kr/po/IMG_7538.jpg">

일이 번거롭게 되려고 며칠 전에 차를 폐차하게 되었다.
내가 읍에서 볼일을 보고 산골로 향하던 중 차가 섰고 카센타로 견인해 가니 그 사장님, 두 손발 다 들었다.
진단은 폐차...

그러고 나니 신부님을 우리가 모셔오지 못하고 남 루시아 형님의 아저씨인 베드로 형제님이 늦은 저녁에 터미널에서 기다리시다 모시고 산골로 오셨다.
미안스럽게도 형님네 차 두 대가 다 동원된 것이다.

초보농사꾼은 서울에서 중고차를 구하고 그 차로 신부님을 모시러 가려 했으나 결국은 시간이 늦어 그냥 부랴부랴 산골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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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산골에 좍 깔린 후 두 분의 신부님이 도착하셨다.
딸 주현(안나)이가 축하의 뜻으로 걸어둔 오색 풍선이 나보다 먼저 환영 인사를 하고 있었다.

두 분은 처음 뵙는 분 같지 않게 낯설지 않았다.
오시자마자 준비해둔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본당 신부님 말씀대로 ‘우리가 사는 그대로, 우리가 먹는 그래도 접대한다‘는 전략대로 우린 한정식으로 저녁을 준비했다.

신부님들은 프랑스에서 직접 울진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경주 등을 거쳐 오셨다는데 우리네 처럼 바닥에 앉아 식사하시는 것이 처음이신 모양이다.

<img src="http://www.skyheart.co.kr/po/IMG_7541.jpg">

우리는 식사 전 기도를 신부님들께 부탁드렸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로 식사 전 기도를 하셨다.
그 순간...

머릿속이 찌릿찌릿하더니 얼굴에 진동이 일고 알수 없는 것이 나의 머리에 가득 참을 느꼈다.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고 울컥하는 마음에 꾹 힘주어 다물었던 입에서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만 흘러나와 다행이었다.

분명 우리가 늘 식사 전 후에 하는 기도인데 왜그리 영혼에 진동이 오던지...
내가 신부님들을 모시기 전에 깊이 생각했던 처음이자 어쩌면 살아 생전에 마지막 인연일 거라는 것이 크게 작용을 했을 것이고 그 순간 신도 우리 옆에서 함께 앉아 계실 거라는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이 순간의 경험을 난 잊을 수가 없고 어떻게 세 치 혀로 표현도 다 못하겠다.

식사 전 기도가 끝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리를 오무렸다가 무릎을 꿇고 앉으셨다가...
그러시면서도 새 경험에 신기하고 좋으신 모양이다.

식탁은 있었지만 그렇게 우리 식대로 모시기로 했으니 그렇게 붕 둘러앉아 먹었다.
외국을 나가보면 그 나라의 문화와 음식을 경험하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한국식당에 가면 무지 실망했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우리 것을 보여 드리기로 했다.

처음엔 이렇게 저렇게 둘러 앉으시더니 이내 익숙해지셨다.
젓가락 대신 포크도 드렸지만 젓가락으로 한동안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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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식사를 끝냈으니 계획된 공연을 할 차례이다.
주 공연자는 주현(안나)이다.
선우(아론)는 시험기간이 바로 코앞이라 읍에 머물렀다.
그 점은 여간 아쉬운 점이 아니었다.

안나는 장고 공연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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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노래도 ‘아리랑’으로 불렀다.
어린 것이 그 노래할 생각은 어떻게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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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아리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래라는 생각을 했던 것같다.
엄마보다 낫다.
난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주현이가 장고 공연을 하는 동안 난 서울의 어느 본당에서 쓰던 징으로 그의 흥에 박자를 맞추었다.
물론 난 징을 배운 바가 없지만 최선을 다해 흥이나 돋우면 되지 하는 배짱이 작용하여  주현이 공연의 맥을 끊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두들겨 댔다.

안나도 나도 한복을 입었고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제사때만 아껴 쓰는 어머님께 물려받은 돛자리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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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장고 공연이 끝나고, 꾕과리 공연이 시작되었다.
선우가 있었다면 안나가 장고를 치고 아론이 꾕과리를 치는 공연을 했었야 했다.
그러나 지오빠가 없으니 주현이가 북치고 장고치고 다한 셈이다.

두 신부님들은 흥분하여 박수도 치시고, 사진도 찍으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그렇게 공연을 끝내려니 주현이가 두 신부님들도 장고와 꾕과리를 직접 쳐보시라는 주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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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흔쾌히 장고와 꾕과리를 쳐 보셨고, 주현이는 채를 잡는 방법을 바로 잡아드렸다.
그리고 그 물건(?)들의 이름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발음을 해보이시려 애쓰셨지만 장고야 어찌 발음이 되는데 꾕과리는 꼬부랑 불어에 익숙하신 입으로는 많이 어려우신지 계속 그 물건의 이름을 물으시고 외우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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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거기서 끝났다.
통창으로 보이는 별과 달도 흥이 났던지 더 빛을 발했다.

다음은 성가책을 펴고 모두 함께 성가를 불렀다.
프랑스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많이 부르는지 그 성가를 두 분이 부르셨다.
우리는 우리 성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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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끝내면 박씨 일가가 아니지...

한국의 대중가요라며 주현이에게 노래를 시킨 것.
이건 대본에 없는 것인디...
그러나 주현이가 누군가.
주현이 한 곡, 내가 한 곡을 불러 재꼈다.

주현이야 우리의 간곡한 부탁으로 불렀지만 나를 노래 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시켜야 하나, 난 안시켜도 한다.
인생 뭐 있나.
불러재끼며 분위기 업시키면 되는 거지.

내 노래로 분위기가 업되었는지 다운 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다.
말하면 클난다.^^

거기까지가 하루의 일정 끝이면 재미없지.
우리는 다 내 기도방인 다락방으로 가서 차를 마셨다.

신부님들은 그곳에 모셔둔 성모님을 보자 반가워 하시며 루르드 성모님이라며 설명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한 신부님이 어린 소녀에게 발현하신 성모님 모습이 그려진 동전만한 패를 선물로 주셨고, 난 그 답례로 손바닥 조각보를 하나씩 선물로 드렸다.

그 날은 일정은 모두 끝나고 선우, 주현이 방에 잠자리를 준비해 드렸고,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두 신부님이 잠든 사이 주현이는 신부님들께 편지를 썼다.
영어로 한 줄, 그 아래는 한국말로 한 줄...써놓고 혼자 쑈하느라 힘든 안나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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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우린 아침을 서둘렀다.
아침은 아침대로 스케줄이 짜여 있었다.

우선 집에서 보이는 산 아래의 표고버섯을 따러 가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남자들은 신부님을 모시고 표고버섯을 따오라고 몰았다.
직접 표고버섯을 따 보시니 아주 흥분되셨던 모양이다.
따오신 버섯을 내게 내보이며 환하게 웃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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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끝이 아니고 본당으로 가기 전에 불영사에 들리기로 하고 서둘러 산골을 떠났다.
울진성당의 미사가 10시 30분이기 때문에 그 전에 다섯 분의 신부님이 도착완료를 해야 했으니 여간 빡빡하지 않았으니 강행했다.

웅장하고, 아름답고, 가을단풍이 절절한 불영사는 모르면 몰라도 프랑스에서 오신 두 신부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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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는 주차장에서 차를 두고 한참을 비포장 길로 걸어 들어가는데 그곳의 풍경이 또한 죽음이다.
내 감동이 이쯤이면 프랑스에서 오신 코큰 신부님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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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성당에서 다섯 분의 신부님들이 다 모였을 때 불영사에 들린 것 또한 감동이었다며 초보농사꾼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더란다.

불영사를 보고 나오면서 초보농사꾼이 미사 시간 늦다며 서둘자고 제안을 했고  불영사를 빠져 나왔다.

울진성당에 도착하니 다른 댁에서 묵으신 세 분 신부님들도 모두 와 계셨다.
여기까지로 우리가 맡은 일정은 끝이 났다.

미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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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분의 신부님들도 사제복으로 갈아입으시고 함께 미사를 드렸다.
점심은 가정봉사를 한 가족들과 신부님들을 위해 성당에서 마련했다.
우리 집에서 묵으셨던 신부님들은 장고와 꾕과리 발음을 하시면서 산골의 행사를 말씀하시는 것같았다.
성당으로 합류가 선우는 신부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 여간 아쉬워 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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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이에게 편지도 받았다며 편지를 다른 신부님들께도 자랑하시고...
주현이도 이번 인연에 대한 감동이 대단한 모양이다.
그게 산 교육이지 싶다.

이제 신부님들의 다음 목적지는 봉화에 있는 우곡성지였다.
초보농사꾼 차로 우리 집에서 묵으셨던 두 분 신부님과 이영길 본당 신부님을 모시기로 했고, 김종수 형제님이 나머지 세 분의 신부님을 모시고 봉화로 출발했다.

우리 신부님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사목을 하시다 울진본당으로 오신지 오래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차 안은 온통 프랑스어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우리 신부님은 프랑스에 계실 때 르망교구에 계셨고, 오신 두 분의 신부님들은 리스교구 소속이시라 프랑스에 계실 때 서로 만난 적은 한번도 없으셨단다.

봉화로 가기 전 우리 집에 모두 들리셨다.
내가 쓴 책을 한 권씩 선물로 드렸고 거북바위도 구경하셨다.

나만 그곳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고 주현이와 초보농사꾼, 본당 신부님, 그리고 다섯 분의 프랑스 신부님, 또 다른 운전병인 김종수 형제님이 그렇게 먼지를 날리며 봉화로 출발했다.

‘만남과 이별’
그것은 지상에서의 연이고 우리 모두가 이승에서의 끈을 놓았을 때는 또 다른 인연으로 만나리...
참으로 서리했다.
짧은 시간 속에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과 사랑...

이제 포옹으로 인사를 매듭지었다.
‘인연’이란,
‘헤어짐’이란 그런 거다.
속으로 크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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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 산골을 기억하신다면 우리의 미소를 기억해 주소서.
다시는 못만날 인연이지만 주님 안에서 늘 행복하십시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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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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