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산성본부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던 당시,
둘째인 딸 아이를 키워주시던 친정 엄마가 몸이 안좋아져 아이를 돌봐주실 수 없게 되었었다.
남에게 맡겨 보려고 사람도 구해보았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서 그만 울고 나왔다.
어떻게 남에게 이 어린 아이를 맡긴단 말인가.
그 생각으로 그 집을 나와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엉엉 울었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절대로 남에게 이 어린 것을 맡길 수는 없어...'
그렇다고 어떻게 할 것인가.
아들 선우는 언니가 봐주다 시어머님이 봐주시지만 주현이까지는 어머님께 너무 어려운 일이고 ...
그렇다고 어떻게 할 것인가.
참으로 암담한 시간이었다.
그 결정은 나만이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그만 두는 일이야말로 나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남편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다.
전공살려 일하는 직장을 그만 두라고 하지도, 그렇다고 남에게 아이를 맡기라고도 하지 않고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남편의 조언을 들을 수는 있었지만 결정은 내 몫이었다.
아이를 남에게 맡기지 못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할 판...
그러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전공도 살릴 수 있었고, 직장 분위기도 좋았기 때문에 그 결정은 참으로 어려웠다.
온 가족이 말렸다.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안달인데 이제 왜 사표를 내느냐고 다 뜯어말렸다.
친정 아버지는 그렇게 대학원까지 가르쳐서 사회에 내보냈더니 사표를 내느냐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결국 사표를 냈다.
얼마나 울었는지....
함께 근무했던 언니들도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의 사표에 대해...
그러나 내 생각으로 그것이 최선이었다.
꿈을 향해 한 계단씩 올라가던 시기에 난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춘 것이다.
내가 올라가야 할 계단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사표를 낸 시기가 1995년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그만 둔 직장을 이번에 서울 갔을 때 들렸었다.
물론 직장을 그만두고도 집에서 회사 일의 일부를 했었기 때문에 광화문에 있는 한국생산성본부에 갈 일은 많았었다.
직장 그만두고 처음 한국생산성본부에 갔을 때, 그 현관에서 울었었다.
가슴이 뭉클뭉클하고...
그렇다.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남은 삶은 내 의지대로 산다며 오지 산골로 귀농하고는 한번도 못갔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뻔질나게 갔었으면서도 거기까지 들릴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TV '30분 다큐'를 보고 선배 언니가 얼굴 좀 보고 살자며 전화를 한 김에 일을 보다말고 광화문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마음은 벌써 머리끄댕이를 다 끄들려 놓은 것처럼 어수선했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경복궁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안국역에서 내려 한국생산성본부를 찾았으니...
다시 전철을 타고 내리니 선배 언니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하고 입사하여 결혼하고, 둘째 낳고 나서까지 다녔던 한국생산성본부.
그 현관을 보니 다시금 눈가가 촉촉해지고...
지하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점에서 언니들이 사준 커피랑 빵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귀농이야기를 하고, 직장이야기도 듣고 시간가는줄 몰랐다.
다음은 빌딩으로 올라가 전에 국제부 시절, 같이 근무했던 상사분도 만나 보았고, 교육훈련사업본부에 근무했을 때의 동료도 만나 보았다.
거의 대부분은 많이 사퇴를 하여 얼굴을 몰랐지만 같이 근무했던 분들을 보았을 때는 온몸이 전기가 오는듯 그렇게 빠른 속력으로 추억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마지막 회식을 하고 왔을 때, 우는 나를 위로하며 남편이 말했다.
누구든, 어떤 위치에서든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이 좋은 거라고...
난 그 말을 흘려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본다.
그때 그만두길 잘했다고...
엄마 노릇을 잘하지도 못하지만 좋은 결정이었다고....
그렇게 그만 두고 나서 한번도 직장그만 둔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다만, 아쉬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산골로 귀농하여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은 지금 세상을 다 끌어안으듯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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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