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빨래줄에 빨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걸려 있는 것이 아니고 죽지 못해 매달려 있는 듯, 망한 집 집구석에 널브러진 옷처럼 빨래가 매달려 있다.
이런 모습만 봐도 요즘 내 정신줄이 어떤지 알 수 있다.
햇살은 빨래가 어떤 모습인가에 상관없이 뽀송뽀송할 때까지 빨래에 앉아 그를 말려준다.
빨래가 정갈하게 걸려있든, 팔은 팔대로, 바지가랭이는 가랑이대로 미친년 똥싸듯 널려 있든에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따사로움으로 어루만져 준다.
부부도 연애질할 때와 같은 따사로움으로 평생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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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빨래를 내던져 걸 듯 간신히 불에 걸어두고 볼일 보러 읍으로 내달렸다.
읍에 가면 한두 가지 일로 마무리되는 날이 별로 없다.
철물점에 들려 초보농사꾼이 사다달라는 공구도 사야하고(그 놈의 공구는 허구헌날 사 나른다. 그건 쓰고 제자리에 못 놓는 초보농사꾼땜에 그렇다. 이그),
산골까지 못갖다 주니 며칠 기다리라며 퉁명스럽게 내던지는 말이 듣기 싫으니 택배도 직접 대리점에 직접 방문하셔서(?) 찾아야 하고,
옷 수선도 해야 하고,
머리가 불쏘시개처럼 되면 정신까지 사나우니 지붕개량도 하러 미장원에 가야하고,
몇 푼 들어앉아 있지도 않은 통장에서 돈도 꺼내야 하고,
엊그제 거센 바람과 놀아나다 몸마저 다 망가진 플라스틱 채반도 사야 하고,
서점에 주문해 놓은 아이들 책도 찾아야 하고....
하여간 대여섯 가지 볼일은 기본이다.
정신없이 이 일들을 해치워야 마지막 코스인 도서실에 들려 책도 빌리고, 재수 좋으면 거기서 몇 줄 읽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오늘도 그랬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보고 나서는 어느 집에서 내 뒤통수에다 대고
“그거 알아요?”한다.
들어 볼 도 없이 알긴 뭘 알겠는가.
산골에 틀어박혀 저 잘났다고 살다 조용필 노래 가사처럼 가끔 먹이를 찾아 나서는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는 인간이 뭔 일을 알까?
내용인즉,
같은 직장에서 눈이 맞았다가 큰 일이 터졌다는 거다.
처녀, 총각이 눈이 맞았다면야 요즘 국가 차원에서 발 벗고 나서는 ‘아이 낳기’에 한 걸음 앞서는 일이니(언제는 낳지 말라구 국가가 나서더니...)문제될 리가 없을테고.... 좋지 않은 머리로 이럴 때는 판단도 빨리 한다.
내 판단대로 그랬단다.
각자 가정가진 사람끼리.
결국 칼부림이 났다는 거다.
산에 틀어박혀 살다 내려온 사람에게가 아니어도 이건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오늘 읍에서 할 일을 빼곡이 적은 노란 포스트잍을 붙인 손가락이 한동안 떨렸다.
이럴 때 작은 충격이 머리를 더 하얗게 만들기 때문에 난 그 노란 포스트 잍을 잘 붙들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맹해졌다.
다른 거 아니다.
물이 질질 흐르는 빨래가 뽀송뽀송해지도록 어루만져 주는 햇살 같은 따사로움이, 애틋함이 부부 사이에 없어서다.
출근을 안했으면 모를까 출근을 했다면 햇살은 당연하게 제 할 일을 빈틈없이 해놓는다.
결혼을 안했으면 모를까 좋아죽겠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떠들어대는 예식을 올린 이상 마음은 언제나 같아야 한다.
그때의 사랑이, 그 온도가 아니면 그 대신 정이, 믿음이, 애틋함이 들어앉아 늘 평상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부부 아닌가.
만에 하나 혹여 똥밟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옛날처럼 얼굴도 안보고 부모가 결정한 혼사도 아닌데(그 당시의 이혼율이 더 낮았지만), 이유야 어떻든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닌지.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은 부부간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남편, 아내가 아니라 없으면 안될 일을 떠올리며 이겨내는 여유는 없었는가보다.
이건 말이다.
가정가진 두 사람이 눈이 맞은 이유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떤 이유에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남의 가정사에 오래 말할 뜻은 없다.
다만 누구라 하더라도 어제의 일은 부족한 나의 행동이었다면 내일은 보다 더 나은 내가 되면 된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알베르 카뮈는
“결국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라”고 했다.
밖으로의 이웃 사랑도 중차대한 일이겠지만 우선 안으로 안으로 사랑이 영글어 석류터지듯하면 밖으로 밖으로 그 사랑이 새끼를 쳐 더 따숩게 번져 가리라 믿는다.
이거 카뮈고 뭐고 말할 처지가 아니다.
오늘 점심에 달랑 김치찌개에, 톳나물 두부 무침 하나 해놓고 산골을 떠났으니 이제 팔자에 없는 ‘책읽는 일’ 걷어치우고 가족 품으로 돌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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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