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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_해당되는 글 3건
2011.03.19   귀농편지,이건 우리세대의 몫이다. 
2010.03.24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산골소녀의 제 손님맞이 
2009.02.14   귀농아낙의 책이야기--친절한 복희씨 

 

귀농편지,이건 우리세대의 몫이다.
+   [산골편지]   |  2011. 3. 19. 22:25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작품으로 1953년 부산 대신동 피란살이 모습이라고 합니다>

엄마는 생활력이 강하셨고,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셨다.
시골에서도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손에 낫 한번 거머쥐시는 걸 본적이 없다.

대신 엄마가 머슴아저씨들과 하루 평균 최소한 열 명이 넘는 일꾼들을 건사하셨다.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그렇게 여인들이 일선에서 뛰고 계실 때 할아버지는 집안의 땅사는 문제, 인사문제(머슴이나 품사는 문제), 교육문제 등 집안의 큰 일에 대해서 관장을 하셨고 평소에는 시조를 읊으시고 책장을 넘기시는 소리를 내시는 것으로 일관하셨다.

아이들 서울물 먹이고 머리에 먹물 많이 넣어 좋은 남자 만나게 해준다며 한양에 입성한 후에도 엄마의 생활력은 퇴색하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더 진한 색을 띠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이걸 어디다 쓸까를 궁리하셨고, 엄마는 작은 돈이라도 모으고 모아 자식 공부시키는데 쓰셨다.

서울로 올라올 때, 달랑 집얻는 돈만 가지고 오시고 나머지 재산을 시골에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서울로 와서의 생활은 하루 아침에 천국과 지옥이었다.

시골에서는 떵떵거리며 살다가 하루 아침에 신분이 땅에 떨어졌으니 아버지의 가치관 역시 많이 혼란스러우셨으리라.

다 팔아 서울로 가져오면 홀라당 까먹을까봐 어떻게든 서울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으로 했으니 오죽했을까.


가장으로서 그런 두려움과 어깨위 무거움이 너무 크셨던 탓인지 몰라도 시골에서 장손으로서 부족함없이 사셨던 아버지의 서울생활에는 변화가 많았다.

아버지는 무엇이 조금 시원찮으면 덕지덕지 거지처럼 덧대어 쓰는 재미로 사셨지만 엄마는 돈많이 벌어 새 것, 번듯한 것을 사려고 기를 쓰셨다.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1958년 작품입니다.>

아버지는 없으면 중고면 어떠냐고 하셨지만 엄마는 누가 쓰던 것인지도 모르는 것을 내 집안에 들일 수 없다며 중고는 쳐다도 안보셨다.

아버지는 새 난닝구를 사드리면 잘 떨어지는 곳이 떨어지기 전에 새 옷에 천을 덧대어 달라고 하여 입으셨지만 엄마는 남자가 통크지 못하다고 대놓고 말도 못하시고는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셨다.

엄마는 딸들도 다 비행기타고 외국 드나드는 전문여성(엄마 표현)이길 바라셨지만 아버지는 지금껏 배운 것으로도 잘 살 수 있는 거고 못살면 지팔자라고 하셨다.


그런 전문여성을 만들기 위해 나를 일본 유학시킨다며 대학원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설득하여 일본에도 보내셨었다. 학교 알아보라고...

엄마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새끼들과 더 잘 살 수 있을까 궁리하셨고,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화초를 잘 키우고, 책많이 읽고, 글쓰며, 당신 좋아하는 영화도 많이 보는데 꼴나게 있는 돈을 쓸까를 궁리하셨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기셨지만 그렇게 생각만 하실 뿐 대놓고 아버지에게 침튀기지 못하고 삭히는 천상 조선여자였다.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1957년 작품입니다.>

숨부통이 터질 때, 기껏해야 하시는 말씀이
“연봉 아부지, 왜그래유.”(연봉이는 큰언니 이름이다)


그게 다였다.

내 엄마는 그랬다.
어느 충청도의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시골에서는 무엇 하나 부족이란 모르고 사셨지만 자식 농사에는 시골이 불리하다고 여기셨다.

완서님의 어머니처럼 딸자식들에게도 서울 물 먹이고 많이 가르쳐야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다고 믿으셨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 구슬러 서울행을 단행하셨던 엄마.
그렇게 엄마는 초보농사꾼과 반대로 서울살이 주동자셨다.

엄마는 시골사람들이 엄두도 못내는 시대에 서울살이를 주동하셨고, 초보농사꾼은 도시인들이 꿈으로만 간직하는 것을 그 시대에 시도한 산골살이, 귀농 주동자였다.
그 장모에 그 사위이다.

이렇듯 색깔이 전혀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많은 자식들은 엄마가 원하던대로 모두 서울에 말뚝박고 그런대로 꿀리지 않고 잘 살아주었다.

그런데 언니들이 죄다 날더러 니가 엄마를 제일 많이 닮았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 딱 맞는 말이었다.

나도 엄마처럼 이왕 사는 거 뻐근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귀농 전에 그랬다는 거다.

더 많이 배우고 싶었고, 배운만큼 그 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값이란 물론 눈에 보이는 번지르함이겠고.

부부가 둘다 직장생활하면서 벌어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파트도 빨리빨리 늘리고, 좋은 서울에서 뻐근하다고 여기는 지역으로 진출도 해야 하고, 새차가 나오면 신삥으로 바꾸고 싶었다.
남편이 자동차 회사를 다녔으니 새 차 나오는 거야 제일 먼저 알았으니까.

새 것을 손에 넣어도 얼마 후면 후져보였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은 잘 키우고 싶어서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더 높은 상승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살았다.

그럴수록 콘크리트 속의 내 영혼은 건조하다 못해 한여름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좍좍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남들 눈에 겉모습은 티가 안나고 기름기가 돌았다.

나의 허세가 그렇게 지랄맞게 되어간다는 사실은 나만이 아는 일이라 그게 들통날까 꽁꽁 싸매려 들었다.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나와 다 거기서 거기지 싶다.
여하튼 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나아갔다’ , 노래 가사처럼...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은 좋게 말해준 거고 기를 쓰고 잘 되어야 한다고 시건방을 떨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처럼 남편이 다 놓고 귀농하자 하여 내려온 산골.
그동안 살아온 환경과 정반대의 삶의 모습..

그런데 신기했다.
산골생활을 더 숨통막혀 할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산소호흡기를 떼고 식물인간에서 조금씩 조금씩 꼬물락 꾸물락 사람구실을 하는 형태로 변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서울생활이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밥이라면 귀농생활은 구수한 숭늉과도 같은 생활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아버지를 닮아가게 되었다.

자식들 다 데리고 서울에 와서 돈이 궁색해져도 여전히 책읽고, 글쓰며, 영화보러 다니시고, 화초에서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늘 그런 것에 열과 성을 다하셨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엄마를 닮아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 시대로서 우리는 엄마는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엄마상이었다.

집에 돈이 있어도 자식들 머리에 먹물 많이 넣어 주어야 그게 자식에게 주는 유산이고 재산밑천이라고 여기시며 자식 교육에 온 신경세포를 집중시켰던 분.

시골의 큰 집에 살 때, 시주하러 스님이 오시거나 거지들이 들이닥치면 그 많은 일꾼들 밥을 챙기다가도 멍석에 한 상 가득 그들의 밥도 차별 없이 챙겨주던 분이었다.
우리의 멋진 할머니는 그런 분들을 대문간에서 호객행위를 하셨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시부모님, 그 많은 가족들, 그리고 가장인 아버지를 극진히 떠받들었던 엄마.
이 놈의 종갓집을 위해서는 부엌에 서서 잠을 주무시면서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셨던 분이었다.

내 엄마는...

그 시대의 모든 어머니에게 손바닥이 갈라지도록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아버지와 초보농사꾼은 어떻게 보면 시대를 앞서 산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시대에는 억울하게도 패잔병 취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시대가 발전하면 할수록 해골은 더 복잡해지고 매말라만 가고 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거듭거듭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세대는 그 전환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어중띤 세대인 우리 40~50대가 그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난 믿는다.
그래야 우리 자식세대부터는 자신의 영혼에 싹을 틔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 것이다.

뭔지 알고 사는 것과 뭣도 모르고 물살에 휩쓸려 가며 악다구니를 쓰며 인생을 허비하는 것과는 천지차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 내가 봄농사가 힘들긴 힘든가 보다 주제넘게 ‘세대의 역할’ 운운하고 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 귀농할 때 껌처럼 우리 부부 몸에 하나씩 붙어온 산골소년, 소녀의 영혼에 파릇한 싹이 돋고,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지나 돌볼 일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 www.skyheart.co.kr 에서 보세요~~

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아낙의 산골편지--산골소녀의 제 손님맞이
+   [산골편지]   |  2010. 3. 24. 12:38  

충남 천안 병천에서 온 가족이 한양으로 입성하여 그 꾀재재한 짐을 푼 곳이 서대문구 홍제동이었다.
그때부터 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어리디 어린 난 그 전까지는 무엇이 부끄러움인지 잘 몰랐다.


인간이 제일 먼저 느끼는 부끄러움이란 잘은 모르지만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된 ‘벗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닐까.

그러나 난 어려서 서울로 오고도 방학때마다 시골로 내려가 벌거벗고 멱감으러 다녔으므로 그런 부끄러움은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늦게 깨쳤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느낀 부끄러움은 ‘없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시골에 살 때는 모든 것이 풍족했던 어느 종갓집 막내 손녀딸이었다.


그 꼴난 공부한답시고 부모님따라 서울로 들어서고부터는 어린 것이 그런 부끄러움 먼저 배워야 했다.


(▲ 친구들을 삼킨  버스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때는 선생님이 학생집을 죄다 찾아다니는 일명 ‘가정방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신경을 곤두세우셨다.


그래봤댔자 뽀족한 수는 없었지만 내성적인 엄마는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곤 했었다.
나의 친구들이 집에 온다고 하던 날도 여린 엄마는 더 말씀이 없이 멍해 하셨다.

 

혹여 딸아이에게 정신적 충격은 기본이고 그것으로 인해 사기를 잃을까 걱정하셨던 것같다.

아끼바리처럼 기름기가 좔좔 흘렀던 내 고향 병천에서의 살림과 전세살이인 서울살림이 몸뚱아리 하나 옮겨 놓는 것으로 손바닥 뒤집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것으로 치자면 그 당시 엄마, 아버지야말로 정신줄 제대로 잡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 버스 문으로 친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식들 줄줄이 허리춤에 꿰차고 서울에서 공부 빡시게 시켜 시집, 장가 빵빵하게 보내리라는 그 꿈 하나로 올라오셨기에 많은 자식들 눈동자만 합해도 야구경기장의 라이트 이상으로 당신들을 정신들게 했을 것이다.


서울 첫 살이를 그렇게 옹색한 전세살이를 하던 때, 우리 엄마 세대가 끔찍이도 높이 봤던(?)‘선상님’이 가정방문을 온다고 했다.

그때 이웃집에 살던 아줌마가 당신 딸 아이의 옷을 빌려 주었다.


엄마는 그런 것을 빌려달랄 주변머리도 못되는 사람이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우리가 서울 올 때의 입성으로 보나 세간살이로 보나 없는 집구석 모양새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단다.


망한 것도 아니고 시골 재산 그대도 두고 서울로 올라오느라 하루 아침에 거지꼴이 되었으니 같은 거지(?)라도 질이 다르다고 느껴 우리에게만은 살갑게 대해 준 이웃이었다.


이 이웃이 주인집이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같은 전세살이 아니 오히려 우리집 전세보다 못한 지하실 전세살이였다.

요즘 말하는 반지하 차원이 아니다.


그 집은 한참을 똥개천쪽 계단으로 내려가 있는 푸세식 공동화살실이랑 마주 보고 있는 문 속에 살았다.
그러나 먹성, 입성은 왠만한 부잣집 이상이었다.
내일 죽을 것처럼 먹고, 펑하고 사라져버릴 돈인양 옷을 사입고 가전제품을 들여 놓고 살았다.


그 당시 그 집엔 좋은 TV가 있었으니까.
그런 씀씀이로 인해 그 장마에도 똥물이 흘러들어오는 개천 옆 신세를 면치 못했다.






(▲ 이제 우리집 앞으로 가!!! )


우리 엄마는 굶어죽으면 죽었지 남의 외상지는 것과 빚지는 것을 질색으로 아셨다.

어린 기억으로, 그 집에 엄마 몰래 TV 보러 가서(엄마는 구걸하듯 TV보러가는 것을 질색하셨다. 자존심 하나는 풀먹인 교복 칼라처럼 빳빳하셨다.) 창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개천의 똥물이 아는체 하고 들어올 것같아 그 쪽에 눈도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여간, 그 집 아주머니는 시키지도 않은 옷을 싸들고 와서 서울 선생들은 애들 옷을 보고, 세간살이를 보고 애들 기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며 엄마의 대답도 들어보지 않고 자기 딸 옷을 내게 입히곤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깐깐한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아온 엄마에게 얻어 입히는 것도 아니고 빌려 입히는 것이 자존심 구기는 일이었건만 딸아이 기죽인다는 말에 찍소리 안하고 그 아줌마의 행동을 말리지 못했으리라.


그것 생각하면 지금도 엄마의 그 고뇌가 느껴져 머리통을 언 땅에 대고 진정시키고 싶다.

그랬다.
우리 엄마는, 내 엄마는 소설가 박완서님의 엄마처럼 그랬다.






(▲ '어린시절로 돌아가고파...')


박완서님의 엄마랑 우리 엄마가 너무 닮았고, 처지도 비슷했다.
자식들 공부시킨다며 종가집 뛰쳐나와 고생고생 서울살이 이겨낸 것이 똑같다.


박완서님네의 첫 서울살이가 서대문구 현저동이었으면 우리의 첫 서울살이는 서대문구 홍제동이었다는 것도 비슷했다.

시골에서는 윤택했으나 서울살이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악착같이 자식들 공부시킨 점도 엇비슷했다.


그 엄마의 그 딸도 비슷하여 박완서님이나 나나 그런 서울이 너무나도 싫어 방학하는 날, 하이에나가 먹이감을 발견한 것처럼 반은 눈이 뒤집어져서 시골로 내달렸고, 내일 개학을 코 앞에 두고 서울로 상경했던 점 등이 또한 비슷했다.

이제와서 뭐가 어쨌다고 지금 어린시절 시린 생각이 날까.


오늘,
오늘 산골에 산골소녀 주현낭자의 친구들이 온다는 날이다.
주현이가 근처의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곧잘 친구들이 오두막을 찾았지만 오히려 새 집 짓고는 이래저래 바쁘다는 이유로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 "우리 입으로 들어갈 음식이 제대로 될까???")


이제 중학교 졸업을 코 앞에 둔 딸아이에게 그게 미안해 날을 잡았다.
그 놈의 날을 잡으면 왜그리 일이 생기는지.


걱정하는 내게 의외로 초보농사꾼이 아무리 일이 생겨도 애들 오는 날은 건들지 말라고 하였다.
정히나 우리 손님이랑 겹치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저 위의 신부님 집으로 애들을 보내자고 했다.


해먹는 것도 재료만 준비해 주고 지들끼리 구워먹든, 죽쒀먹든 해 먹으라고 하면 오히려 더 신바람 날 거라는 엄명이 있었다.

우리집 ‘가장’의 명대로 ‘주현이 친구오는 날’은 북박이로 고정시켜 두었더니 겹치는 문제들이 풀려갔다.
그래서 자식은 엄마의 똑똑함으로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아빠의 지혜와 우직함이 합해져야 제대로된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5명의 공주들이 온단다.
주현이는 아침부터 신부님집으로 올라가 보일러를 켜고, 혹여 벗들이 추울까봐 벽난로의 불도 다 지펴 두었다.




 


(▲ 벗들을 위해 벽난로도 미리 피워 놓은 산골소녀)


친구들이 읍에서 10시 버스를 타고 온다며 주현이가 걸어서 마을입구로 마중을 나갔다.
엄마가 태워온다니 걸어오는 재미가 있으니 엄마는 신경 하나도 쓰지 말란다.

그래, 뭐 신경쓸 일이 있을까.


그 옛날의 내 엄마처럼 자식 친구들이 온다고 하여 걱정할 일은 내게 없지 않은가.

애들이 걸어서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는다.


딸 아이 말마따나 지금 걸어오면서 추억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찐한 추억을...





(▲ 고기도 굽고... "햐, 빨랑 익어라")


한참만에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내다 보니 다섯 명이 깔깔거리며 오고 있다.
걸어오면서 놀다 와서 늦었다고 겉옷을 다 벗어 던진다. 덥다고...


그 ‘더움’은 소녀시절의 그 풋풋한 생기와 꿈과, 호기심 등이 발동하여 열고 변했으리라.

일단 우리집으로 와서 지들의 하루 먹을 꺼리를 건내주었다.
장을 봐다 달라는 품목만 딱 사주었다.


그 전에 몇 번이나 그 이상의 것은 하나도 못주니(^^) 미리 친구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식단을 짠 후 재료 품목을 넘기라고 했기 때문에 장봐온 것만 넘겨주었다.

그래도 김치, 김, 계란, 귤은 산골아줌마가 서비스로 추가 제공해 주었다.^^


재료 보따리를 나누어 들고 신바람이 나서 올라가는 아이들을 보니 설레임을 안고 소풍가는 아이들 같다.
점심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고, 김치찌개, 핫케익도 만들어 먹고 달고나 등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집의 마당에 나서니 달밭 위 신부님 집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난 고기구워 먹으려니 전선줄이 필요하다고 하여 갖다준 것 말고는 일체 그 근처를 얼씬도 안했다.
부담없이 지들끼리 놀라고...




 


(▲ 세월이 흘러 구두의 땟깔과 사이즈는 변해도 너희들의 우정은 변치 않길 빈다 )


일단 4시가 넘어서 부모님들이 걱정하시기 전에 길을 뜨자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아래 집으로 소리를 친다.

왜 안그렇겠는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지들끼리만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실수도 하고, 자빠지게 웃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기다려주었다.


주현이와 친구들을 태우고 읍으로 달렸다.
차 안에서도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뭐가 그리 재밌었냐니 계란말이는 자신있다고 아줌마께 큰소리쳤는데 말아지질 않아 후라이팬에서 다 먹어 치웠고, 핫케익 담당은 주현이였는데 다 태워서 검은 표고버섯 두 개가 있는 것같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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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들을 위해... 달고나의 달인, 산골소녀의 맛자랑 )


삼겹살이랑 김치찌개만 정상이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두 번이나 구워 먹었단다.
하기야 먹성 좋은 아이들이라 삼겹살을 넉넉히 사고도 부족한 듯 싶어 다시 정육점에 들어가서 산 것까지 다 주었는데 다 뱃속에 들어 앉았단다.

그러면서 너무 아쉽단다.


불영계곡의 어둠이 찾아들었는데도 그 아이들의 웃음과 재잘거림은 계곡물처럼 끝이 없이 이어졌다.

난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 말문을 열었다.


옛말에 ‘엄마 팔아 친구산다’는 말이 있는데 아줌마도 너희만할 때 엄마에게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살아보니 ‘친구’는 엄마를 팔 정도로 소중하고 살가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아줌마도 그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엄마 팔아 친구 산다’고 했듯이 지금 너희들의 이 우정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머리 희어질 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는 말을 흘렸다.
알아들었는지....


아이들을 읍에 내려주고는 집에 도착하면 바로 주현이 핸드폰으로 문자날려 달라고 했다.
주현이 핸드폰이 문자를 받아먹느라 바쁘다.



 


(▲ " 너무 좋다~~~")


다시 불영계곡을 돌아돌아 주현이와 산골로 돌아오는 길.
주현이에게 오늘 친구들과 부족함이 없었느냐고 하니 태어나서 삼겹살 이렇게 많이 먹어보긴 첨이란다.(주현이는 선우만큼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들이 또 오고싶어 한다는 말도 귀에 넣어준다.


그래, 기회되면 다음에 친구의 엄마들과 직접 통화를 하고 졸업하기 전에 한 번 더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주현이가 하품을 하면서 “엄마, 내 손님을 치러서 피곤한가봐“ 한다.


“그래도 나 자면 안돼. 신부님 집 대청소는 했는데 고기 구워먹은 판은 기름이 많아 못 닦았어.그것 다 닦고 자야지.” 한다.

뜨거운 물로 어찌어찌 하라고 일러주었다.


자기 친구가 와서 해먹은 거니 자기가 마무리해야 한다고 하는 말에 아이가 많이 여물었음을 느꼈다.

아이는 제 손님을 철나고 처음 치러본 셈이다.


이렇게 자주 제 손님을 치르다 보면 저도 남의 집 손님으로 갔을 때, 어떠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손님 맞는 사람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자세여야 하는지 스스로 깨쳐갈 것이다.

그것은 주현이가 세상을 깨쳐 가는데 중요한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에서!!


산골 다락방에서 귀농 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아낙의 책이야기--친절한 복희씨
+   [산골아낙의 책 이야기]   |  2009. 2. 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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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상세보기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삶의 정곡을 찌르는 재치와 유머, 원숙한 지혜가 담긴 박완서 신작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2001년...점원 겸 식모로 들어와 주인의 강탈로 맺어져 부부가 된 여주인공의 삶을 그린 표제작 친절한 복희씨 를...

박완서님은 내가 자빠지게 좋아하는 작가이다.
여러 차례 말했지만 우선 고향그리움이 같은 사람이고, 그 분의 글에서는 그 분만이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있기때문이다.

이 책까지 읽으면서
'왜 난 박완서님에 열광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같은 세대도 아니고, 세대차이도 좀 많이 나고,
그 분이 사용하는 표현들이 우리 세대에 걸맞는 표현이라서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흐름이나 줄거리, 또는 결론으로 나를 잘 데려다 주어 그런 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서울에서 자란 내 세대들이 느끼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어떤 것을 많이 느끼고 알고 있다.
그것은 세대를 초원한 것도 감지 하는 능력도 갖게 해주는 너그러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이 세대로 살면서 나보다 이른 세대를 속속들이 다 알고 즐기는 , 그런 양다리 말이다.

하여간 그러다 보니 박완서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 뱉는 말이 있다.
"맞아, 맞아, 그랬어"

꼭 상대방이 내 코 앞에서 대화를 하는듯이 책에다 대고 맞장구를 제일 많이 치는 책이 박완서님 책이다.

예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는데 읽고 있던 책이 많아 참았다가 결국은 또 먼저 읽기 시작한 책이다.
옆에서 선우, 주현이가 왜 그렇게 책을 늦게 읽냐고 구박(?)까지 들으며 다 읽었다.

눈이 너무 나빠져 돋보기 없으면 이젠 너무 힘이 든다.
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돋보기를 맞추리라 결심하고 머리까지 감았으나 CJ몰 '일촌 일명품'에서 새로운 주문이 들어와 결국 외출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돋보기가 그렇게 애절해졌다.
밤에는 아예 책을 못볼 지경이다.
누워서는 더더욱 못본다.

누워서 책을 본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했던 것인지 ...

이 책은 주로 등장인물이 노인들이다.
6,70대 분들...
작가가 80대라 그렇게 등장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

나 역시 이제 멀지 않은 풍경들이라 한 대목 한 대목이 목구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래서 감동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 표현력에서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같은 표현도 그렇게 절절히 표현하는 작가도 드물다.
물론 군더더기 없는 글과 표현이 절절한 것 하고는 다르다.
간결하지만 어떤 가슴 깊숙한 감동이 없는 표현들이 허다하다.

9편의 글이 옹기종기 들어 앉아 우리네 사는 모습을 표현해 준 책.

아쉬운 점은 마지막 부분에 끼어져 있는 '해설'이라는 부분이다.
김병익이라는 분이 쓴 이 책에 대한 말하자면 해설이라는 건가본데 글쎄 난 이런 해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누가 보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이렇듯 해설을 19페이지나 쓸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다.
이것 역시 내 생각일 뿐이다.

글에 대한 평이라고 할 것도 없는 해설...
그냥 이런 류의 책이고 흐름은 어떻다 정도면 모를까 구구절절이 각 작은 꼭지마다 해설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오랫만에 박완서님의 섬세한 표현들을 보니 고향 할머니를 만난 것처럼 그렇게 따뜻한 수가 없다. 마음이..
책을 덮으니 벌써 산골의 하늘에 내 고향 하늘에서 날아다니던 기러기가 V자를 그리며 날아가고 있는듯 아련해진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www.skyheart.co.kr--하늘마음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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