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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_해당되는 글 1건
2011.03.19   귀농편지,이건 우리세대의 몫이다. 

 

귀농편지,이건 우리세대의 몫이다.
+   [산골편지]   |  2011. 3. 19. 22:25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작품으로 1953년 부산 대신동 피란살이 모습이라고 합니다>

엄마는 생활력이 강하셨고,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셨다.
시골에서도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손에 낫 한번 거머쥐시는 걸 본적이 없다.

대신 엄마가 머슴아저씨들과 하루 평균 최소한 열 명이 넘는 일꾼들을 건사하셨다.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그렇게 여인들이 일선에서 뛰고 계실 때 할아버지는 집안의 땅사는 문제, 인사문제(머슴이나 품사는 문제), 교육문제 등 집안의 큰 일에 대해서 관장을 하셨고 평소에는 시조를 읊으시고 책장을 넘기시는 소리를 내시는 것으로 일관하셨다.

아이들 서울물 먹이고 머리에 먹물 많이 넣어 좋은 남자 만나게 해준다며 한양에 입성한 후에도 엄마의 생활력은 퇴색하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더 진한 색을 띠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이걸 어디다 쓸까를 궁리하셨고, 엄마는 작은 돈이라도 모으고 모아 자식 공부시키는데 쓰셨다.

서울로 올라올 때, 달랑 집얻는 돈만 가지고 오시고 나머지 재산을 시골에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서울로 와서의 생활은 하루 아침에 천국과 지옥이었다.

시골에서는 떵떵거리며 살다가 하루 아침에 신분이 땅에 떨어졌으니 아버지의 가치관 역시 많이 혼란스러우셨으리라.

다 팔아 서울로 가져오면 홀라당 까먹을까봐 어떻게든 서울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으로 했으니 오죽했을까.


가장으로서 그런 두려움과 어깨위 무거움이 너무 크셨던 탓인지 몰라도 시골에서 장손으로서 부족함없이 사셨던 아버지의 서울생활에는 변화가 많았다.

아버지는 무엇이 조금 시원찮으면 덕지덕지 거지처럼 덧대어 쓰는 재미로 사셨지만 엄마는 돈많이 벌어 새 것, 번듯한 것을 사려고 기를 쓰셨다.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1958년 작품입니다.>

아버지는 없으면 중고면 어떠냐고 하셨지만 엄마는 누가 쓰던 것인지도 모르는 것을 내 집안에 들일 수 없다며 중고는 쳐다도 안보셨다.

아버지는 새 난닝구를 사드리면 잘 떨어지는 곳이 떨어지기 전에 새 옷에 천을 덧대어 달라고 하여 입으셨지만 엄마는 남자가 통크지 못하다고 대놓고 말도 못하시고는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셨다.

엄마는 딸들도 다 비행기타고 외국 드나드는 전문여성(엄마 표현)이길 바라셨지만 아버지는 지금껏 배운 것으로도 잘 살 수 있는 거고 못살면 지팔자라고 하셨다.


그런 전문여성을 만들기 위해 나를 일본 유학시킨다며 대학원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설득하여 일본에도 보내셨었다. 학교 알아보라고...

엄마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새끼들과 더 잘 살 수 있을까 궁리하셨고,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화초를 잘 키우고, 책많이 읽고, 글쓰며, 당신 좋아하는 영화도 많이 보는데 꼴나게 있는 돈을 쓸까를 궁리하셨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기셨지만 그렇게 생각만 하실 뿐 대놓고 아버지에게 침튀기지 못하고 삭히는 천상 조선여자였다.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1957년 작품입니다.>

숨부통이 터질 때, 기껏해야 하시는 말씀이
“연봉 아부지, 왜그래유.”(연봉이는 큰언니 이름이다)


그게 다였다.

내 엄마는 그랬다.
어느 충청도의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시골에서는 무엇 하나 부족이란 모르고 사셨지만 자식 농사에는 시골이 불리하다고 여기셨다.

완서님의 어머니처럼 딸자식들에게도 서울 물 먹이고 많이 가르쳐야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다고 믿으셨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 구슬러 서울행을 단행하셨던 엄마.
그렇게 엄마는 초보농사꾼과 반대로 서울살이 주동자셨다.

엄마는 시골사람들이 엄두도 못내는 시대에 서울살이를 주동하셨고, 초보농사꾼은 도시인들이 꿈으로만 간직하는 것을 그 시대에 시도한 산골살이, 귀농 주동자였다.
그 장모에 그 사위이다.

이렇듯 색깔이 전혀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많은 자식들은 엄마가 원하던대로 모두 서울에 말뚝박고 그런대로 꿀리지 않고 잘 살아주었다.

그런데 언니들이 죄다 날더러 니가 엄마를 제일 많이 닮았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 딱 맞는 말이었다.

나도 엄마처럼 이왕 사는 거 뻐근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귀농 전에 그랬다는 거다.

더 많이 배우고 싶었고, 배운만큼 그 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값이란 물론 눈에 보이는 번지르함이겠고.

부부가 둘다 직장생활하면서 벌어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파트도 빨리빨리 늘리고, 좋은 서울에서 뻐근하다고 여기는 지역으로 진출도 해야 하고, 새차가 나오면 신삥으로 바꾸고 싶었다.
남편이 자동차 회사를 다녔으니 새 차 나오는 거야 제일 먼저 알았으니까.

새 것을 손에 넣어도 얼마 후면 후져보였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은 잘 키우고 싶어서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더 높은 상승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살았다.

그럴수록 콘크리트 속의 내 영혼은 건조하다 못해 한여름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좍좍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남들 눈에 겉모습은 티가 안나고 기름기가 돌았다.

나의 허세가 그렇게 지랄맞게 되어간다는 사실은 나만이 아는 일이라 그게 들통날까 꽁꽁 싸매려 들었다.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나와 다 거기서 거기지 싶다.
여하튼 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나아갔다’ , 노래 가사처럼...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은 좋게 말해준 거고 기를 쓰고 잘 되어야 한다고 시건방을 떨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처럼 남편이 다 놓고 귀농하자 하여 내려온 산골.
그동안 살아온 환경과 정반대의 삶의 모습..

그런데 신기했다.
산골생활을 더 숨통막혀 할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산소호흡기를 떼고 식물인간에서 조금씩 조금씩 꼬물락 꾸물락 사람구실을 하는 형태로 변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서울생활이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밥이라면 귀농생활은 구수한 숭늉과도 같은 생활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아버지를 닮아가게 되었다.

자식들 다 데리고 서울에 와서 돈이 궁색해져도 여전히 책읽고, 글쓰며, 영화보러 다니시고, 화초에서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늘 그런 것에 열과 성을 다하셨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엄마를 닮아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 시대로서 우리는 엄마는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엄마상이었다.

집에 돈이 있어도 자식들 머리에 먹물 많이 넣어 주어야 그게 자식에게 주는 유산이고 재산밑천이라고 여기시며 자식 교육에 온 신경세포를 집중시켰던 분.

시골의 큰 집에 살 때, 시주하러 스님이 오시거나 거지들이 들이닥치면 그 많은 일꾼들 밥을 챙기다가도 멍석에 한 상 가득 그들의 밥도 차별 없이 챙겨주던 분이었다.
우리의 멋진 할머니는 그런 분들을 대문간에서 호객행위를 하셨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시부모님, 그 많은 가족들, 그리고 가장인 아버지를 극진히 떠받들었던 엄마.
이 놈의 종갓집을 위해서는 부엌에 서서 잠을 주무시면서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셨던 분이었다.

내 엄마는...

그 시대의 모든 어머니에게 손바닥이 갈라지도록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아버지와 초보농사꾼은 어떻게 보면 시대를 앞서 산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시대에는 억울하게도 패잔병 취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시대가 발전하면 할수록 해골은 더 복잡해지고 매말라만 가고 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거듭거듭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세대는 그 전환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어중띤 세대인 우리 40~50대가 그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난 믿는다.
그래야 우리 자식세대부터는 자신의 영혼에 싹을 틔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 것이다.

뭔지 알고 사는 것과 뭣도 모르고 물살에 휩쓸려 가며 악다구니를 쓰며 인생을 허비하는 것과는 천지차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 내가 봄농사가 힘들긴 힘든가 보다 주제넘게 ‘세대의 역할’ 운운하고 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 귀농할 때 껌처럼 우리 부부 몸에 하나씩 붙어온 산골소년, 소녀의 영혼에 파릇한 싹이 돋고,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지나 돌볼 일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 www.skyheart.co.kr 에서 보세요~~

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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