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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분 _해당되는 글 61건
2012.02.16   [귀농]귀농편지#19-귀농하고 약초도 심어보고.. 
2011.04.05   귀농편지, 그럴 자격있습니다. 1
2011.03.24   귀농편지,이것만은 기억해라. 
2011.03.21   귀농편지,도망가지마. 너도 먹으라고 부어준거야. 
2011.03.19   귀농편지,이건 우리세대의 몫이다. 
2011.03.18   귀농편지, 깜짝여행 2탄 
2011.03.17   귀농편지, 깜짝 여행을 다녀왔습니다.1탄. 
2011.03.16   귀농편지,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는 일 
2011.03.14   귀농편지,마가렛꽃과 같은 사람냄새 
2011.03.10   귀농편지, 산골의 다락방 풍경 

 

[귀농]귀농편지#19-귀농하고 약초도 심어보고..
+   [산골편지]   |  2012. 2. 16. 14:37  

 

[귀농]귀농편지#19-귀농하고 약초도 심어보고..

 2011년 4월

귀농하고 알았다.
산골의 봄은 아주 느리다는 것을...

국도가에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어 우중충했던 동공에 화사함이 쏟아져 들어오면 귀농아낙의 가슴에 봄바람이 출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같은 울진이라도 산골은 거기서 또 몇 박자 더 늦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저절로 핀 꽃이란 없다.
보기 안스러웠는지 거실 한 켠의 선인장이 은행알만한 핑크빛 꽃을 머리에 달았다.

산골의 봄이 느리다고 하여 모든 계절이 느린 것은 아니다.
여름은 봄의 게으름을 물려 받아 느리지만 가을, 겨울은 또 부지런을 떨고 일찍 들이닥친다.

길어야 할 따뜻한 계절은 짧고, 이곳 분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여기는 겨울은 디지게 길다.

귀농 초에는 산골의 이런 ‘계절구성’에 ‘시어머니 저녁 굶은 얼굴’을 하고 화딱증을 냈었다.
그러나 산골살이가 두터워질수록 이런 계절 구성이 이렇다고 하여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터득했다.

느리면 늦는대로, 빠르면 빠른대로 시간과 사정에 끌려다니지 않는 느긋한 마음이 굳은살처럼 이제는 몸에 배어 있다.
*******************************************************

 

서울에서 한밤중에 도착했다.
수원의 농업연수원에서 하는 <소셜 미디어 과정>에 참석했었기 때문이다.

이 교육은 농업인 대상 교육이 아니고 공무원 대상 교육인데 내가 듣고 싶어 했던 과정이라서 교육신청을 했다.

4일 동안 농업연수원에서 숙식을 해가며 이루어진 교육이라서 큰 맘 먹고 갔었던 교육이다.

교육이 끝나 돌아오니 밤 10시가 넘었고 초보농사꾼이 읍까지 마중을 와서 산골로 왔다.

‘평생교육’이라는 말은 정말 깊이 새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사에도 예외는 없다.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자식을 키우는 일도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 또한 물론이듯이...

밤늦게 산골에 도착하여 초보농사꾼과 교육이야기를 하고 늦게 잠이 들었지만 날이 새자마자 서둘러 소광리로 갔다.
같이 농사를 짓는 밭이 소광리에 있고 오늘은 약초를 심는다고 했다.

 

귀농하고 약초는 처음 심는다.
우리 동네는 약초를 하는 분이 거의 없고, 다른 마을에서나 하는데 야콘을 심는 밭 일부에 약초를 심어야 하는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심게 되었다.

 

오늘 심는 약초의 종목(?)은 강활과 당귀이다.
강활과 당귀 모종도 처음 본다.

 

 

 

심겨져 있는 것이라 산골에서 오며가며 보았지만 말이다.
약초를 심을 밭이 곱게 갈려져 있다.

 

이전에 초보농사꾼과 우리와 같이 농사를 짓는 김이장님이 퇴비를 뿌리고 트렉터로 콩고물처럼 밭을 갈아놓았다.

소광리의 아주머님 세 분의 품을 샀기 때문에 금방 심을 줄 알았다.

일단 김이장님이 초보농사꾼의 관리기로 골을 타신다.
초보농사꾼은 다른 일을 하기로 한 날이라 오늘은 빠졌다.


(▲ 함께 농사짓는 소광리의 김이장님 모습)

 

약초의 골은 헛골이 없이 타는 것이 특징인가 보다 했는데 사실 비닐을 안씌우고 그냥 땅에 심기 때문에 헛골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같다.

 

비닐을 씌우지 않았으니 그 많은 풀은 일일이 다 손으로 뽑아주어야 한다.
말이 그렇지 비닐을 씌우지 않은 밭의 풀을 뽑는 일은 거의 중노동에 상당한다.


그쯤되면 풀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여하튼 작은 플라스틱 통에 강활과 당귀 모종을 적당히 담고 그것을 끌고 다니면서 골의 한쪽에 호미로 깊숙이 파고 강활과 당귀의 모종을 하나씩 놓은 다음 뿌리가 깊이 덮이도록 흙을 묻어주는 일이다.

 

아주머님들이 시범을 보여주신다.
워낙 손이 빨라 알듯말듯하다.


그런 내 마음을 이내 읽으시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시범을 보여주신다.

 

 

 

말은 쉬운데 한번도 안심어본 나로서는 진땀이 난다.
왜냐 하면 잘못 심으면 모종이 죽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 혼자 하는 밭이면 ‘내 탓이오’하고 말 수 있는 일이지만 같이 하는 밭이니 더더욱 신경이 쓰이고 강활과 당귀의 귀한 모종이 죽지 않게 온 힘을 기울이다 보니 허리 아픈 것은 기본이요,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 어깨에서 불이 났다.

 

 

 

어깨가 뭉치면 머리로 가는 신경이 짓눌려 두통이 아주 심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후 들어서부터는 두통까지 나의 고통에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온몸에 옻이 올라 가려움증은 쉴새 없이 나를 자극했다.
그래도 일에 몰두하면 다 견딜만한 정도의 일이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배운대로 약초를 심었다.

 

파릇한 작은 싹만 하늘을 보게 하고 나머지 몸은 흙이불을 두껍게 덮어주었다.

 

다른 아주머님들은 워낙 고수라서 같이 “준비 땅”을 했어도 이내 나와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런 나를 지나치지 않으시고 아주머님들은 처음 심는 내게 빨리 심으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하면 된다고 챙겨주신다.

 

시골인심은 이렇듯 끈끈하고 나 혼자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이 처져서 심어나오는 나를 이내 달려와 도와주신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온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라 난 천천히가 안된다.


이네 손바닥에 물집이 생겨 손바닥도 나를 안도와준다.

 

 

 

쉬는 시간에 밭가에서 읽는다고 오늘 챙겨나선 책은 ‘위험한 심리학’이다.
귀농하고 지금껏 늘 밭에 갈 때 쳥겨가는 작은 가방에는 책 말고 작은 강아지 인형이 있는데 그것은 딸아이의 마스코트와 옻이 올라 지은 약이 들어있다.

 

잠깐의 쉬는 시간이지만 밭가에서 책을 읽는 재미는 솔솔하다.

허리가 아프고, 손바닥의 물집이 아프고, 옻까지 올라 가려움증이 나를 어지럽히지만 처음 약초를 심는 일이라 신기하고 설레이는 마음이 그 고통을 잠재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 골을 다 심고 허리를 펴보면 푸릇한 작은 싹이 땅에 줄을 서있으니 그게 어찌 신기하고 기특하지 않겠는가.

초보농사꾼이 이런 맛이 농사의 참맛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동감이다.

 

이제는 일을 마무리 할 시간.
오늘 심은 약초를 보니 푸릇푸릇한 것이 살짝 흙위로 올라와 줄을 서있다.
이제 흙 속에서 제 몸을 잘 키울 것이다.

 

 

 

 

그 다음에 농부는 풀과의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일이 남아있다.
 봄기운 짙어가는 소광리 계곡을 돌아돌아 산골로 오니 나무타는 냄새가 먼저 나를 반긴다.

 

냄새 하나로 하루의 피곤을 녹여내고 다시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맞이하는 이 시간이 참으로 달다.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www.skyheart.co.kr 로 오세요.

 

<<귀농아낙은 낮에는 유기농으로 야콘농사를 짓고 야콘즙산야초효소를 만들고 밤에는 책읽고 글을 씁니다.
귀농해서 낸 귀농책으로는 <산골살이,행복한 비움>과 <귀거래사>가 있어요.>>

 

((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맨 아래의 '추천'을 꾹 눌러주세요.!!^^)) 

 

귀농아낙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귀농]귀농편지#19-귀농하고 약초도 심어보고..


 
 
        

 

귀농편지, 그럴 자격있습니다.
+   [산골편지]   |  2011. 4. 5. 14:56  

2010년 6월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는 그의 누이에게 이렇게 설명했다지요.

 

“밤은 낮보다 색깔이 훨씬 더 풍부해...잘보면 어떤 별들은 레몬빛 노란색이고, 어떤 별들은 분홍색, 또는 녹색, 파란색, 물망초색으로 빛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라고...

 

이 글을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에서 읽었을 때, 바로 그 말에 테클을 걸었지요.
‘아무리 예술가라지만 상상력이 풍부해도 너무 하는 거 아냐?’라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은 후로는 그의 상상력이 오바되었다는 것을 확인사살하기 위해서 밤만 되면 마당에 서서 관찰했지요.


그리고는 역시 그건 화가의 지나친 상상력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런 단정이 우스워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별들을 여러 날 자세히 올려다 보니 별의 별 색을 다 띠고 있었어요.
정말 노랗다 못해 붉은 색을 띠는 별, 어떤 날은 녹색별, 파란색...다 있습니다.


밤이 낮보다 훨씬 화려했습니다.
밤이 낮보다 훨씬 찬란하고 눈부셨습니다.

 

‘난 이 사실을 귀농 11년차에 깨달았는데 반 고흐도 귀농인이었을까??^^
오늘은 장미처럼 붉은 색 별을 보고 싶은데 그는 나왔을까.‘
******************************

산골벽난로를 들였습니다.
오늘 세 사람이 그것을 설치해주러 먼길을 달려왔습니다.

 

대부분은 유럽식으로 멋지고 이쁜 벽난로를 선호한다고 들었습니다.
초보농사꾼은 성격대로 묵직하고 튼튼한 것으로 선택하여 네 사람이 들고 들어오느라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멋진 팬션이나 무슨 별장에서나 볼 수 있는 벽난로를 산골에 들였다고 하면 ‘별이 파란색’이라고 한 것만큼 머리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산골은 연중 겨울리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여름에도 불을 때야 합니다.

 

아침, 저녁 기온차가 크다보니 낮에는 태영이 지글지글거려 살갗이 탈 정도로 덥지만 일단 해가 지면 태도를 바꾸어 찬물로 목욕하기 힘들 정도로 물도 차고 사람을 을씨년스럽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여름이라도 이틀에 한번 정도는 불을 때야 하고, 그나마 장마철에는 매일 때야 합니다.

산골의 난방은 나무 보일러지요.
오직 나무를 태워서 난방을 하다 보니 나무가 많이 필요합니다.


이때 많다는 표현은 1톤짜리 초보농사꾼 세레스로  정신없이 해나르더라도 늘 조바심을 내며 겨울을 나곤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의 양이 얼마나 필요한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보농사꾼이 한 차의 나무를 해와서 보일러실 앞에 턱하니 부어 놓으면 며칠도 못가 높이 쌓였던 나무 무덤이 늙은이 뱃가죽처럼 주저 않습니다.


없는 집 제사돌아오듯 나무해 와야 하는 날은 빨리도 돌아왔습니다.

땔 나무는 산에 간벌해 놓은 것이나 눈에 쓰려진 것 등이 대상이 됩니다.


또 입지조건이 나무까지 차량진입이 가능하냐에 따라 수고로움이 변별성을 갖다보니 그런 곳은 눈치빠른 사람 몫이고, 한 발짝 늦은 초보농사꾼은 작업복에서 물이 떨어져야 한 차를 확보 할 수 있었습니다.

 

작업복을 벗으면 온몸이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무거운 나무를 차에까지 지고 가 싣고, 내리고를 공기돌 놀리듯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무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값이 만만치 않다 보니 별장에 들어 앉은 사람처럼 돈주고 따박따박 땔 수많은 없었습니다.

 

농사일로 허리가 아픈 날도, 무릎 관절이 아픈 날도 그는 가족들 등 따숩게 해주기 위해 때도 시도 없이 썩은 세레스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나이를 먹다 보니 나무해오는 일이 버겁게 느껴지고 웬만큼 때서는 따숩게 느끼기도 힘들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을 새로 지을 때 벽난로를 입둔 사람마다 추천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첫째,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


그때 당시 약 5백만원 이상을 주어야 하는데 그 돈 들여 그 효과가 있을까, 그건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겨울에는 자다가도 몇 번씩 집 밖에 있는 보일러실을 들락거리는데 또 집 안에 나무를 이중으로 땐다는 것이 일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원무 신부님네 벽난로를 때 보니 그 보온성이 상상외였습니다.
많은 나무를 들이지 않고도 화력이 좋았습니다.

 

벽난로를 우리도 들인다면 나무를 적게 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초보농사꾼은 그때부터 벽난로를 알아보고 직접 가보고 했으나 결론은 가격이었습니다.

 

귀농 전, 성격같았으면 일단 저질러 놓고 볼 초보농사꾼이었지만 그는 생각이 많은 모양입니다.
고민을 하고 있는 초보농사꾼에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고민하지 말고 사라고, 당신 그동안 가족들 따뜻하게 해주려고 뼈골 빠지게 나무해 나를 만큼 날랐다고, 식구들이 자는 중에도 당신은 털신의 눈을 털며 머리가 깨질듯한 산골 겨울바람을 뚫고 보일러실을 하룻밤에도 수도 없이 오가며 고생했으니 이제는 나무가 적게 들면서 효율적으로 난방을 할 수 있는 벽난로를 살 자격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고생하는 당신을 위해 선우는 나무를 함께 등에 졌고, 딸 주현이는 손을 호호 불며 불쏘시개를 주워오곤 했지요.

 

많이 망설이던 초보농사꾼이 가족의 응원에 힘입어 벽난로를 들였습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들어와 벽난로를 들여다 보고, 나무를 때며 화력을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벽난로에서 나오는 불빛에 초보농사꾼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난 어느 광고 카피를 떠오릴며 중얼거렸습니다.


“열심히 나무해 나른 당신, 이제 벽난로 옆에서 한숨 돌릴 자격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 www.skyheart.co.kr 에서 보세요.

 

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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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편지,이것만은 기억해라.
+   [산골편지]   |  2011. 3. 24. 22:41  

산골에 핑크빛 작약이 활짝 피었다.
안그래도 기숙사에서 오는 딸아이에게 보여줄 꽃이 보라색 붓꽃 밖에 없어서 매일 꽃밭에 물을 주며 주문을 외웠었다.

환상의 꽃밭을 딸아이에게 선사하고 싶다고...


그 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핑크빛 작약이 붓꽃 옆에서 화사하다.
딸아이 가슴 속 작은 방에 산골꽃밭의 화사함을 많이 담고 갔으면 좋겠다.
*********************

나이밥을 먹으면서 묵직하게 닥아오는 것 중 하나가 자식이다.


자식을 키우는 일이란 심히 긴장해야 하고, 신경 바짝 써야 하는 것까지야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자식은 그 부메랑효과까지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하고, 그 행동은 시퍼런 아이들 눈에 늘 모범이,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사람 묵직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어려서는 다른 집 자식들과의 변별성에 관심이 두어졌지만, 애들 머리가 커가면서는 그의 투명하고 파릇한 가치관과 철학에 에미로서 기스나는 짓을 하는 것은 없는지, 나를 엄마로 선택하여서 더 성공할 것을 인생 구기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시도 때도 없이 쭈삣거린다.

예전에 읽은 책내용이 하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들게 하여 내 작은 공책에 일부의 긴 문장을 적어두었었는데 오늘은 그 공책을 뒤적이다 다시 읽게 되었다.

아들 선우가 아주 좋아하는 세계적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41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아버지 때문에 고통을 받은 작가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로 인해 머리 한번 한가한적이 없었던 그런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집안의 독재자처럼 군림했고, 권위적이었으며 중상, 모욕적인 말로 인해 어린 카프카는 큰 고통과 죄의식 속에 성장했다고 한다.

그것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것이 아들 카프카가 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라는 책이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하면


“어렸을 때 주로 식사시간에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훈육은 대개 식사법과 예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차려놓은 것은 모두 먹어라. 음식투정은 말아라 하는 식으로.
그런데도 종종 당신은 음식이 형편없다고 투정했습니다.


식탁을 감도는 침울한 고요는 번번이 훈계에 의해 깨졌지요.
“먼저 먹어라.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빨리 먹어라. 더 빨리, 더 빨리 먹어.”이런 식이었습니다.
뼈는 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했습니다.


잔을 입으로 빨아서는 안되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했습니다.


문제는 빵을 똑바로 써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소스가 뚝뚝 떨어지는 나이프로 빵을 썰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음식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가장 많이 떨어진 곳은 당신의 자리였습니다.
식탁에서는 먹는 데만 전념해야 될 터인데 당신은 손톱을 깎고 연필을 깎거나, 이쑤시개로 귀를 후벼팠습니다.


아버지, 부디 제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사소한 일은 그 자체만으로는 실로 무가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저에게 괴로움을 준 것은 제가 보기에 너무도 권위적이셨던 바로 당신이 저에게 강요하시던 계율을 당신 자신은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만약 카프카가 그런 독재자인 아버지 밑에서가 아니라 언행이 일치하는 그런 따사로운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면 그의 작품세계는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작품세계를 가졌던 것이라고 하면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작가 이전에 한 인격체가 그런 삶을 살다가 갔다면....

자식을 키우는 일은 인생 선배라는 이유로 자식을 불심검문하기에 앞서, 부모 자신의 그림자를 자주자주 점검하는 일이지 싶다.
그래서 함께 성장하고, 함께 소풍길을 오손도손 어깨동무하고 가는 사이가 아닌지.


자식에게는 숨쉴틈 없는 세세한 잣대를 들이대고, 내맘대로 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는 관대한지는 않은지.
자식을 키우는 일은 자식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도 함께 성장하고, 성숙하여 나이값을 해가는 일이지 싶다.

아들 선우가 주말에 오더니 아빠를 찾는다.
밭에 일 가신 것을 알련만 꼭 묻고 또 묻는다.


통화를 할 때마다 “아빠는???” 한다.

한번은 물었다.


왜 그렇게 묻냐고...
밭에 가셨다고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자기가 공부하면서 힘들 때는 아빠를 생각한단다.

아빠는 우리 자연에서 키우려고 오셔서 농사지으시며 고생하시는데 난 앉아서 공부하는데 힘들다고 하나....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래서 자꾸 아빠를 묻게 된다고.

그때 말해주었었다.

“엄마, 아빠가 너희들 때문에 희생한다고 생각지 말어.
그건 희생이 아니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최선이지.


그 최선을 다하면서 고생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란다.
너희들에게 딸랑이를 흔들어 주었을 때, 너희들이 까르르 웃는 그 웃음이 효도였고, 섬마섬마를 할 때, 그 비틀거림의 몸짓으로 인한  웃음은 영양제보다 더 약효가 좋았단다.


파리하게 작은 두 손을 엄마의 두 손에 의지한채 걸음마, 걸음마라는 엄마, 아빠의 구령에 맞추어 네가 발을 땔 때의 기쁨으로만 쳐도 넌 벌써 효도를 많이 한거지.
어리기만 한 녀석이 초등학교를 들어갔을 때는 가슴팍이 뻐근하게 대견했었단다.


그렇게 너희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너희들이 주는 깜짝 생일 이벤트를 보며,  기쁘고, 대견하고, 기특하고 그런 행복을 다 받았으니 엄마, 아빠에게 꼭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지 말아라.
그저, 가족이라는 울타리만을 잊지 말아라.“

고3 아들이 주말에, 산골로 들어서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아빠를 찾는다.
마침 밭에서 일하다 선우를 태우고 차가 들어오자 초보농사꾼도 서둘러 내려온다.


아빠를 보자마자 달려가 지아빠와  어깨동무를 한다.
그리고 오랫만에 기숙사에서 나온 주현이까지 모두 모여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우리집의 높은 지붕이 뚫어져라 웃고 떠들었다.

아들이 설거지를 할테니 엄마는 쉬란다.
그것으로 고3인 아들 녀석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자신이 잘 있음을 보여준 것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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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편지,도망가지마. 너도 먹으라고 부어준거야.
+   [산골편지]   |  2011. 3. 21. 22:22  

2010년 6월

얼마 전까지 고구마를 다 심고는 초보농사꾼이 밭 중에서 제일 먼저 야콘 심은 호수밭으로 올라갔다.
한참 후에 “아유, 풀이 얼마나 올라왔나 몰라”하는 소리를 토해내며 씩 웃는다.

예전같았으면 큰일났다느니, 언제 저 풀을 잡을 수 있을까 하며 걱정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풀이 야콘 모종보다 키가 웃돌아도 웃음을 바람에 섞어버리면 그만이다.

농사꾼이 풀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그 놈도 살려고 그러니 인상을 쓰고 당장 죽이려 달려드는 것도 참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뽑을 때 뽑더라도 그것을 징글징글한 것으로 여기는 않는다는 거다.


그렇게 마음 먹으니 풀이 무성함으로 인하여 야콘 등의 농작물 소출이 적더라도 그렇게 둘러 생각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내일부터는 다시 챙 큰 모자 쓰고 젓가락만큼 커버린 풀들을 호미들고 마주해야 한다.


***********************

내가 이제는 음식물 쓰레기를 굳이 땅속 깊숙이 묻지 않는다.

귀농하고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는 족족 잘 떠받들고 가서 라일락 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흙을 토닥토닥 다독여 주는 마무리도 잊지 않았고, 이거 먹고 잘 자라서 산골에 라일락 향기를 방사해 달라는 부탁도 빼먹지 않았다.

그 의식은 어린시절 방학이 되면 천안 할머니댁에 내려가 빤쓰 하나만 입고 멱감다가 모래사장에 나와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하면서 손등 위 수북히 쌓아올린 모래를 토닥토닥 다독여 주는 것과 같은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자니 어린시절 그 모습이 눈에 삼삼하여 가슴팍이 또 뻐근해온다.

그런데 다음 날, 내 관심을 듬뿍받고 있는 라일락에게 음식물을 또 시주하기 위해 가보면 보석처럼 묻어둔 것이 파헤져져 있었고, 그 중 반 이상이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지지부리한 양파껍질, 고추꼭따리 같은 것만 쫙 깔아놓은 상태.

다시 가져간 새 보물(?)을 구덩이에 넣고 단도리를 잘 한 다음 이번에는 건실한 몸무게까지 동원해 발로 꾹꾹 눌러주었다.
오직 이때만큼은 나의 그 온몸의 무게감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난 두더지나 들고양이, 토끼, 다람쥐 등 나와 같이 흙을 딛고 사는 도반들만 의심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까씨 일가였다.
밭으로 출근하려고 나서는데 사람소리같기도 한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보니 까마귀들이 그 라일락 아래로 대여섯 마리가 모여 앉아 전리품을 나누어갖듯 내 보물을 그렇게 분배하고 있었다.

손에 든 호미를 휘두르고 입으로는 거친 비명소리를 뿜어내며 달려갔더니 까~~~악 하며 굼뜬 동작으로 도망치는 거였다.

그 후부터는 삽으로 라일락의 뿌리가 보일 정도로 깊이 파서 묻어주며
“뺏기지 말고 너만 먹으렴.”하고 지성껏 주문까지 외워주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선사시대 유적 발굴하듯 그렇게 얌전히 그것들이 파헤쳐져 있었고, 그 후로는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 너도 먹어야지, 내가 땅에 발붙이고 산다고 또 팔이 안으로 굽었는가보다. 암, 너도 먹어야지.’

이제는 그냥 나무 아랫도리에 부어준다.
까마귀도 먹고, 나머지는 나무도 먹고, 지나가던 들고양이도 먹고...

그렇게 음식물을 부어놓아서인지 우리집에는 까마귀가 자주 나타나 원을 그리며 목표물을 탐색한다.

나도 귀농 전에는 그런 선입견이 있었고 귀농 초에는 쫓곤 했었다.


그러나 점점 자연 곁다리에서 살다보니 이내 마음이 돌아섰다.

 어느 분은 재수없는 동물이라며 우리집 밭 일을 하시다가도 소리소리지르며 쫓으신다.


돌도 던지고, 그것도 모자라 꼭 끝에는 침을 퇴, 퇴, 퇴 소리내어 뱉으신다. 후렴처럼....
무슨 당신 몸에 붙은 귀신을 쫓고 소금뿌리듯...

도무지 써먹을 데가 없는 것들이란 마음이신 것같다.
까마귀뿐만 아니라 이 세상 것 어느 하나 일생에 소용없는 것이 있을까.


우리가 몰라 그렇지 그 나름의 역할, 존재이유가 다 있지싶다.

인간의 짧은 머리로 눈에 보이는 현상만 갖고 판단하니 그리 무 자르듯 그들을 냉대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도 대부분이 겉의 번지르함이나 그의 완장, 직업만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죽으라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하고, 약한 사람 앞에서는 강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써먹을 데 있는 동물인지.

내 안에 하얀 물감을 들이는지, 시커머둥둥한 물감을 들이는지, 이제 막 피어 상큼하게 매일 웃고 있는 노란 붓꽃처럼 노오란 물감을 들이는지는 순전히 내 소관이다.

우리는 까마귀를 재주 옴붙은 것들이라고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길조로 여기지 않은가.
생각 차이일 뿐이다.

오늘은 아침을 먹고 출근하기 전에 산골가족들 먹고 남은 것을 이번에는 은행나무 아래 부어주고 들어왔다. 한 나무만 편애하면 안되겠기에...

밭으로 출근하려고 얼굴에 분칠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그들이 정신없이 먹다가 날아간다.

“까마귀야, 도망가지마. 너도 먹으라고 부어준거야.”

입에도 조각 하나 물고는 도망가다 말고 전봇대 위에 앉아 나를 향해 뭐라뭐라 하다가 그만 양식을 떨어뜨린다.
암말 말고 가져가 먹지..
가던 길 멈추고 그는 나를 향해 뭐라 했을까.

그 시대에 부와 명성을 따르지 않고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자연과 함께 살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내가 마을의 채소밭에서 김을 매고 있을 때 참새 한 마리가 내 어깨에 잠시 내려 앉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영광스럽게 느껴졌었다”고 했다.

나 또한 까마귀가 물고가던 그 귀한 양식을 떨어뜨려가며 내가 한 말에 뭐라뭐라 대꾸해준 것이 한없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 좋은 날이다.

비록 그의 말을 해독하진 못했지만 긍정적인 표현이었을 거라는 정도는 서당 개가 아니고 귀농 생활 11년에 그 정도는 알아먹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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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편지,이건 우리세대의 몫이다.
+   [산골편지]   |  2011. 3. 19. 22:25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작품으로 1953년 부산 대신동 피란살이 모습이라고 합니다>

엄마는 생활력이 강하셨고,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셨다.
시골에서도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손에 낫 한번 거머쥐시는 걸 본적이 없다.

대신 엄마가 머슴아저씨들과 하루 평균 최소한 열 명이 넘는 일꾼들을 건사하셨다.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그렇게 여인들이 일선에서 뛰고 계실 때 할아버지는 집안의 땅사는 문제, 인사문제(머슴이나 품사는 문제), 교육문제 등 집안의 큰 일에 대해서 관장을 하셨고 평소에는 시조를 읊으시고 책장을 넘기시는 소리를 내시는 것으로 일관하셨다.

아이들 서울물 먹이고 머리에 먹물 많이 넣어 좋은 남자 만나게 해준다며 한양에 입성한 후에도 엄마의 생활력은 퇴색하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더 진한 색을 띠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이걸 어디다 쓸까를 궁리하셨고, 엄마는 작은 돈이라도 모으고 모아 자식 공부시키는데 쓰셨다.

서울로 올라올 때, 달랑 집얻는 돈만 가지고 오시고 나머지 재산을 시골에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서울로 와서의 생활은 하루 아침에 천국과 지옥이었다.

시골에서는 떵떵거리며 살다가 하루 아침에 신분이 땅에 떨어졌으니 아버지의 가치관 역시 많이 혼란스러우셨으리라.

다 팔아 서울로 가져오면 홀라당 까먹을까봐 어떻게든 서울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으로 했으니 오죽했을까.


가장으로서 그런 두려움과 어깨위 무거움이 너무 크셨던 탓인지 몰라도 시골에서 장손으로서 부족함없이 사셨던 아버지의 서울생활에는 변화가 많았다.

아버지는 무엇이 조금 시원찮으면 덕지덕지 거지처럼 덧대어 쓰는 재미로 사셨지만 엄마는 돈많이 벌어 새 것, 번듯한 것을 사려고 기를 쓰셨다.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1958년 작품입니다.>

아버지는 없으면 중고면 어떠냐고 하셨지만 엄마는 누가 쓰던 것인지도 모르는 것을 내 집안에 들일 수 없다며 중고는 쳐다도 안보셨다.

아버지는 새 난닝구를 사드리면 잘 떨어지는 곳이 떨어지기 전에 새 옷에 천을 덧대어 달라고 하여 입으셨지만 엄마는 남자가 통크지 못하다고 대놓고 말도 못하시고는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셨다.

엄마는 딸들도 다 비행기타고 외국 드나드는 전문여성(엄마 표현)이길 바라셨지만 아버지는 지금껏 배운 것으로도 잘 살 수 있는 거고 못살면 지팔자라고 하셨다.


그런 전문여성을 만들기 위해 나를 일본 유학시킨다며 대학원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설득하여 일본에도 보내셨었다. 학교 알아보라고...

엄마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새끼들과 더 잘 살 수 있을까 궁리하셨고,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화초를 잘 키우고, 책많이 읽고, 글쓰며, 당신 좋아하는 영화도 많이 보는데 꼴나게 있는 돈을 쓸까를 궁리하셨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기셨지만 그렇게 생각만 하실 뿐 대놓고 아버지에게 침튀기지 못하고 삭히는 천상 조선여자였다.

 


<▲ 이 사진의 출처는 김주영님의  산문집 '젖은 신발'입니다.  한국 전쟁때 종군 사진 대장으로 활동한 임인식 사진작가님의 1957년 작품입니다.>

숨부통이 터질 때, 기껏해야 하시는 말씀이
“연봉 아부지, 왜그래유.”(연봉이는 큰언니 이름이다)


그게 다였다.

내 엄마는 그랬다.
어느 충청도의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시골에서는 무엇 하나 부족이란 모르고 사셨지만 자식 농사에는 시골이 불리하다고 여기셨다.

완서님의 어머니처럼 딸자식들에게도 서울 물 먹이고 많이 가르쳐야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다고 믿으셨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 구슬러 서울행을 단행하셨던 엄마.
그렇게 엄마는 초보농사꾼과 반대로 서울살이 주동자셨다.

엄마는 시골사람들이 엄두도 못내는 시대에 서울살이를 주동하셨고, 초보농사꾼은 도시인들이 꿈으로만 간직하는 것을 그 시대에 시도한 산골살이, 귀농 주동자였다.
그 장모에 그 사위이다.

이렇듯 색깔이 전혀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많은 자식들은 엄마가 원하던대로 모두 서울에 말뚝박고 그런대로 꿀리지 않고 잘 살아주었다.

그런데 언니들이 죄다 날더러 니가 엄마를 제일 많이 닮았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 딱 맞는 말이었다.

나도 엄마처럼 이왕 사는 거 뻐근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귀농 전에 그랬다는 거다.

더 많이 배우고 싶었고, 배운만큼 그 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값이란 물론 눈에 보이는 번지르함이겠고.

부부가 둘다 직장생활하면서 벌어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파트도 빨리빨리 늘리고, 좋은 서울에서 뻐근하다고 여기는 지역으로 진출도 해야 하고, 새차가 나오면 신삥으로 바꾸고 싶었다.
남편이 자동차 회사를 다녔으니 새 차 나오는 거야 제일 먼저 알았으니까.

새 것을 손에 넣어도 얼마 후면 후져보였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은 잘 키우고 싶어서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더 높은 상승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살았다.

그럴수록 콘크리트 속의 내 영혼은 건조하다 못해 한여름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좍좍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남들 눈에 겉모습은 티가 안나고 기름기가 돌았다.

나의 허세가 그렇게 지랄맞게 되어간다는 사실은 나만이 아는 일이라 그게 들통날까 꽁꽁 싸매려 들었다.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나와 다 거기서 거기지 싶다.
여하튼 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나아갔다’ , 노래 가사처럼...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은 좋게 말해준 거고 기를 쓰고 잘 되어야 한다고 시건방을 떨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처럼 남편이 다 놓고 귀농하자 하여 내려온 산골.
그동안 살아온 환경과 정반대의 삶의 모습..

그런데 신기했다.
산골생활을 더 숨통막혀 할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산소호흡기를 떼고 식물인간에서 조금씩 조금씩 꼬물락 꾸물락 사람구실을 하는 형태로 변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서울생활이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밥이라면 귀농생활은 구수한 숭늉과도 같은 생활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아버지를 닮아가게 되었다.

자식들 다 데리고 서울에 와서 돈이 궁색해져도 여전히 책읽고, 글쓰며, 영화보러 다니시고, 화초에서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늘 그런 것에 열과 성을 다하셨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엄마를 닮아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 시대로서 우리는 엄마는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엄마상이었다.

집에 돈이 있어도 자식들 머리에 먹물 많이 넣어 주어야 그게 자식에게 주는 유산이고 재산밑천이라고 여기시며 자식 교육에 온 신경세포를 집중시켰던 분.

시골의 큰 집에 살 때, 시주하러 스님이 오시거나 거지들이 들이닥치면 그 많은 일꾼들 밥을 챙기다가도 멍석에 한 상 가득 그들의 밥도 차별 없이 챙겨주던 분이었다.
우리의 멋진 할머니는 그런 분들을 대문간에서 호객행위를 하셨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시부모님, 그 많은 가족들, 그리고 가장인 아버지를 극진히 떠받들었던 엄마.
이 놈의 종갓집을 위해서는 부엌에 서서 잠을 주무시면서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셨던 분이었다.

내 엄마는...

그 시대의 모든 어머니에게 손바닥이 갈라지도록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아버지와 초보농사꾼은 어떻게 보면 시대를 앞서 산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시대에는 억울하게도 패잔병 취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시대가 발전하면 할수록 해골은 더 복잡해지고 매말라만 가고 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거듭거듭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세대는 그 전환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어중띤 세대인 우리 40~50대가 그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난 믿는다.
그래야 우리 자식세대부터는 자신의 영혼에 싹을 틔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 것이다.

뭔지 알고 사는 것과 뭣도 모르고 물살에 휩쓸려 가며 악다구니를 쓰며 인생을 허비하는 것과는 천지차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 내가 봄농사가 힘들긴 힘든가 보다 주제넘게 ‘세대의 역할’ 운운하고 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 귀농할 때 껌처럼 우리 부부 몸에 하나씩 붙어온 산골소년, 소녀의 영혼에 파릇한 싹이 돋고,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지나 돌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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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편지, 깜짝여행 2탄
+   [산골편지]   |  2011. 3. 18. 14:35  

2010년 5월 22일

 

낯선 곳에서의 아침은 늘 두근거린다.
비록 찜질방에서의 아침을 맞았지만 이내 여기가 길 위라는 생각이 들자 그 설레임 또한 신선했다.

 

부시럭거리며 미니 담요을 갰다.
찜질방에서 자도 우리 주현이 것만큼은 미니 담요를 덮어주려고 가져간(초보농사꾼 몰래 챙긴 거다. 별나게 군다고 할까봐.) 것을 주섬주섬 개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잤던 주현낭자가 씩 웃더니  롤러코스트를 타자는 거였다.


나는 사실 아무리 쉽고 완만하고 특이할 것 없는 놀이기구라도 그런 것을 당최 못탄다.
어지러워서...현기증이 심하고...

 

아이들이 어려서 에버랜드에 몇 번 갔었는데 시시하다고 꼬맹이들만 타는 놀이기구도 자신없어 했다.
그러나 애들이야 당연히 엄마랑 아빠랑 같이 타고 싶어하지...

 

그 마음은 알아가지고 용기내어 탔다가 못내려 도우미들이 와서 부축해서 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들도 그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주동자 주현낭자가...

 

내가 롤러코스트를 타는 입구에 턱하니 붙여놓은 그림으로 보니 타고 있는 애들이 놀라 소리소리 지르는 사진이더만...
롤러코스트라니 무슨 소리냐고 살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엄마랑 같이 재미있게 타려고 했는데....’하며 포기를 하는 소리를 들으니 이거 에미로서....

‘그래, 인생 뭐 있냐, 타보는 거지’하고는 두 당 3천원씩 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 앞에 탄 팀들이 지르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오자 내가 들어갔을 때의 어려움이 불보듯 뻔했다.

 

그러나 우리 딸이 오랜만에 엄마랑 타고 싶다는데...
이게 사람 죽이는 소리다. ㅎㅎ

 

 

 


(▲ 박경리 문학공원에서.)

 

하여간 우리 순서가 되어 탔다.


그런데 우리랑 같이 탄 어린이랑 우린 찍소리도 안했다.


같이 탄 어린이는 찜질방 아저씨가 너 또 왔냐고 할 정도로 단골인 것같으니 당연했고, 우리 주현이는 번지점프도 한 여성이라 그런지 찍 소리도 안나왔다.

아마 밖에서 돈받는 아저씨가 어쩌면 제일 걱정이 심했을 것이다.


‘이 팀들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쥐소리도 안들리니...‘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겁쟁이 소피아는 왜 찍소리를 안했을까요???

우리 주현이가 딱 맞췄다.


우리 엄마 분명히 눈감고 있었을 거라고...
사실 눈을 떠야 본전을 빼는 건데 4D영상으로 보는 것을 눈을 감고는 몸으로만 흔들리는 것만 느꼈으니 뭐 기절할 정도가 아니었던 거였다.

 

 

 

 


(▲ 박경리 문학공원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봐야 주현이랑 느낌을 말할텐데 걱정이 되어 실눈을 뜨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질 않나, 담벼락에 부딪치지를 않나 난리가 아니라 찜질복이 벌써 젖어오고 붙잡은 손잡이 사이에 땀이 끼어들어 미끄덩거렸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돈만 버린 꼴이 되었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탔기 때문에 주현이는 그래도 엄마랑 탔다는 것이 되었을 것이니 후회는 없다.

 

내가 그곳에서 나오자 초보농사꾼이 웃는다.
그 웃음을 안다.


초보농사꾼도 내가 그런 것에 잼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찜질방에서 나와 아침으로 추어탕을 먹었다.


주현이가 처음엔 추어탕 이야기가 귓구멍에 도착하자마자 인상을 쓴다.
아마 학교에서 주는 추어탕에 질린 모양이다.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겠지.
그랬단다.

 

그렇다면 추어탕의 이미지도 다시 주입시킬겸해서 추어탕집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건 완전히 다른 맛이라며 아주 잘먹는다.

 

이제 배도 든든하겠다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했다.
이번에 들린 곳은 ‘박경리 문학공원’


난 공원이라는 말이 영 걸렸다.

그냥 그분의 이름만 따서 공원을 만든 것이려니 생각했던 거다.


그럴 바에는 문학관을 찾아가자고 했는데 초보농사꾼은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발길이 닿는대로 가는 거라고 한다.

‘아, 예,예.... 박기사님이 어련히 잘 데리고 다니실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곳은 박경리 선생님께서 1980년부터 1998년까지 약 18년 정도를 이곳에서 사시면서 대하소설 토지의 4부와 5부를 집필하시고 완간하신 곳이란다.

 

 

 

 

책에서 이 집을 보았었는데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다니.
그 분의 체흔이 느껴지고, 그 분이 동물들의 먹이를 챙겨 먹이시느라 부르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리는 것같다.

 

선생님은 이곳에서 치열하게 글을 쓰시고, 외로움과 고독을 끌어안으며 자신을 지탱하셨을 것이다.
여기서 외로움은 내가 늘 말하지만 바로 옆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다.

 

그러면서 옆의 텃밭에서 고추도 심으시고, 상추도 가꾸시며 사셨을 그 흔적을 재연하여 찾는 이들이 집을 향해 선생님을 큰소리로 부르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감탄한 부분이 그것이었다.
다른 곳 같았으면 이렇게 했을까.

 

그러니까 선생님이 쓰셨던 바로 그 텃밭을 지금도 그 모습대로 보여주려 파도 심고, 상추도 심고 배추, 호박 등을 소박하게 심어 놓았다.
그 섬세한 배려와 마음씀이 그것을 관리하고 보전하려 애쓰는 원주시에 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집 울타리 안의 텃밭에 또 울타리를 쳐 놓은 것이리.


한국 사람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꼭 들어가고, 개념 없는 사람들 꼭 들어가서 확인하고 사진 찍느라 짓밟으니 아예 나무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그런 것은 ‘허브나라 농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애가 꽃밭으로 들어가 다 짓밟고 다녀도 내 자식 체험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엄마, 내 자식 사진도 되도록 들어가서 꽃을 만지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직 멀었구나’싶었다.

주현이는 박경리 선생님의 시를 읽어주곤 했고 ‘토지’를 읽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서 관심이 많았다.


일일이 집 주위도 둘러보고 청동으로 사진찍으라고 만든 선생님 동상 무릎에 앉아서 포즈도 취했다.

그 동상은 사람들이 선생님 무릎에 앉도록 만들어 놓아 찾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그 분의 마음을 가져가도록 배려해 놓았다.

 

 

 

 

집 바로 앞에 연못을 만들게 된 이유 등을 다 기록해서 세워놓았다.


그러다 보니 바로 현관문을 열고 선생님이 나오실 것만 같았다.
집을 둘러서는 그 분의 시가 여러 번 오는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읽는 내내 애려온다.
그 분의 시집에서도 읽었지만 글쓰는 사람의 고독, 외로움, 을씨년스러움이 묻어나오는듯하다.


거기다가 ‘대문 밖 짐승들’(시의 표현)은 얼마나 쓸데 없이 남의 일에 손톱을 세우는지....
주현이도 거기에 세워진 선생님의 시를 찬찬히 읽는다.

 

나 역시 그 시들이 수동타자기에 박히는 소리가 순서대로 들린다.
수동타자기의 그 글씨 판이 서로 꼬이면 손으로 떼어주면서 치는 그 수동타자기.

 

박경리 선생님은 원고지에 펜으로 눌러 쓰셨을텐데 왜 수동타자기가 자판이 내 가슴에다 대고 이 시를 쳐댔을까.
따다닥 따다닥...두르륵(이건 행갈음하는 소리다. 수동타자기를 쳐본 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다.)

 

 

 

 


(▲ 선돌의 모습이다. 두 박씨만 구경했다.)

그곳에서 말했다.


주현이가 ‘토지’를 읽어야 하는데 시작하겠냐고...
알았단다.

 

하기야 지금 박경리 선생님이 사시던 실제 집에 와본다며 좋아하는 아이에게 그 말은 쥐약이었을 것이다.^^
안그래도 읽으려고 했는데 워낙 긴 작품이라 사실 엄두가 안났다고 한다.

 

지금 주현이가 읽고 있는 독서량으로도 난 만족하고 대견하지만 더 늦기 전에 ‘토지’를 들이밀어야 했다.

다음에 우리를 선돌로 모신단다. 박기사가.


선돌로 모시던, 누운 돌로 모시던 모셔봐봐...

그리고는 내가 잔 모양이다.


선돌이라며 내리라는데 이거 여행떠나기전에 밤새 책읽은 후유증이 사람죽인다.
선돌이야 몇 번 가본 곳이니 박씨들만 다녀오라고 했다.


물론 곱게 가겠는가.
여행 온 사람이 저렇다느니, 온갖 야유를 다 귓구멍으로 아련히 쑤셔 넣어주고 두 박씨가 갔지만 어쩌랴.

 

 

 


(▲ 탄광문화촌에서)

 

두 박씨가 돌아오기에 선돌이 잘 서있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그렇게 세 사람의 웃음까지 싣고 가느라 우리 차의 무게는 훨씬 무거웠으리.

박기사님의 말씀으로는 이번엔 탄광문화촌으로 간단다.


이곳에 갈 때까지도 혼수상태에서 헤어나질 못해 탄광문화촌 체험도 두 박씨들만 했다.
이번의 야유는 한여름 소나기처럼 드셌다.

 

내 몸을 내 몸대로 못하겠고, 정신도 왜그리 오락가락하는지...
어제 찜질방에서도 주현이를 데리고 자다보니 신경이 엄청 쓰였다.


자다 일어나고, 자다 일어나고...
그 와중에 남녀들이 왜그리 내 방인양 떠들고 난리인지...

 

 

 


(▲ 탄광의 막장까지 가보고)

여하튼 난 바로 고 시간에 혼수상태중에 있었다.

 

다녀온 두 박씨들이 더 흉보기 전에 난 깨어 차 밖으로 나가 정신을 불러들였다.
나 이제 정신이 안들어오면 이거 여행 모두 황이라고...


서서히 정신이 들어오고...
밖을 서성이는데 빗방울이 좀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 탄광문화촌에서)

 

저 멀리서 두 박씨들이 웃으며 온다.


어떻드냐고 물으니 막장까지 가보고 온단다.
순간 우스개소리인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막장을 보고 우리가 흔히 쓰는 인생 막장 운운하는 것이 이 막장을 말한다고 주현낭자에게 초보농사꾼이 설명해준 모양이다.

막장....


사진으로 보는 동상의 표정에서도 삶의 무게가 느껴져 가슴팍이 뻐근해온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

작가가 어느 탄광을 방문해서 막장까지 들어갔단다.


거기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의 소원은 '땅 위 직업'을 갖는 것이란다.

'땅위 직업'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았는데 농사를 지을수록 농협 빚만 늘어가고 결국은 감당할 수가 없어 땅 아래에서 이렇게 지내는데 돈이 모아지는데로 고샹에 가서 농사짓는 것이 소원이란다.

 

'땅위의 직업'이 소원...
이 시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면 얼마나 가슴팍에 와 닿을까.

 

그때의 이야기가 생각나다 보니 위의 막장에서의 동상들의 표정과 어깨에 짓눌려지는 무게를 느껴보지만 나 또한 얼마나 알량하게 그 무게를 느낄 것인가.

 

 

 

 


(▲ 탄광문화촌에서)

 

또 그곳에는 1960~1970년대 탄광지역의 삶의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 그 시절 탄광촌 사람들의 애환과 고뇌, 힘듬,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도록 해놓았단다.


이러한 곳이 없다면 우리 아이들 세대부터는 탄광촌은 그저 소설에서 보는 짧은 설명으로, 역사시간에 들리는 아련한 소리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 봉평에서 했던 말을 계속 반복했다.


“엄마, 정말 우리 여기 잘왔다. 그치??”

이제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서서히 울진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웰컴투 동막골 셋트장’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안그래도 오늘 아침에 주현이가 이곳을 가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게 웬떡인지...


우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환호했다.
박기사가 데려다 줄지 아닐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그러나 주현이가 환호가 들리자마자 핸들을 좌측 표지판이 얌전히 안내하는 곳으로 꺾는 우리들의 박기사

그곳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아주 산속 깊은 곳이었다.
산아래 첫동네이면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진 곳이었다.


정말 사방이...

어느 한 쪽도 탁 트인 풍광이 아니고 바구니처럼 그렇게 옴팍하게 들어앉은 형상의 외지고 외진 곳이었다.

 

그곳은 그나마 다른 셋트장보다는 잘 보존이 되어 있었고 관리의 손질이 보여져 주현이의 환호소리가 땅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하늘에 떠있게 해주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지만 보는 즐거움은 그 비를 말리고도 남았다.


그곳 한 켠에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입었던 옷과 총, 모자 등을 빌려주고 있었다.
물론 주현이는 강혜정이 입고 썼던 가발을 빌렸다.

 

빌리는 비용은 단돈 천원.
너무 싸다 싶었다.


시골의 맘씨 좋아보이는 아저씨께서 돈을 받으시는데 자꾸 너무 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돈을 모으면 마을분들이 이곳을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사용하실텐데 그에 비하면 ....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주현이가 또 오빠랑 함께 못온 것을 후회한다.
‘오빠랑 같이 왔더라면...’하는 마음이 여행 내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양이다.

 

 

 

 

주현이가 강혜정이 입었던 옷과 썼던 가발을 뒤집어 쓰고 포즈를 취한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던진다.

 

이 때는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해야 맞단다.
머리를 계속 비비 돌리면서 정신줄을 놓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셋트장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벌써 오후 5시가 되었다.
비도 오고 서둘러 울진으로 향해야 한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온 선우를 데리고 산골 집으로 가야한다.

 

저녁을 먹으려고 면 단위로 찾아갔다.
막국수집에도 가고 중국집에도 가고 다 돌아다녀봐도 식당이 장사하는 집이 없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곳 중학교 체육대회여서 장사를 다 안한단다. 거기서 먹느라고...

배는 고프고 한참을 돌아다니다 마트에서 빵 등을 사서 차 안에서 먹었다.


차로 이동하고 노동을 안하다 보니 배고픔을 다 놓았다.
결국은 학교에서 끝난 선우를 읍에서 태우고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니 어설펐지만 오랜만에 온가족이 만났으니 어떤 것을 먹은들 맛나지 않을까.

주현이는 오빠가 아쉬워할까봐 여행 이야기를 많이 안하는 눈치다.


선우가 그 마음을 알고 오빠는 그런 생각 없다고...어차피 고3이니 학교의 일정대로 해야 하는 일이라 상관없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어디 어디를 갔었는데 하며 말을 시작한다.

 

 

 

단 이틀의 여행.


정말 아무 준비없이, 아무 계획없이 길을 나섰는데 어느 여행때보다 알찼다.
양떼 목장에서의 실망감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우리 부부에게는 교훈이었다.
정말 교훈이었다.


오히려 배울 점은 양떼 목장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랬으니 모두 정말 잘 들렸다.


아마 몇날 며칠 계획을 세워도 이렇게 다양한 체험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제 내 둥지로 돌아왔다.


여행에서의 그 느낌, 묵상, 웃음, 행복감을 간직한체 다음 여행을 뜰 때까지 다시 ‘열심히 일한 당신’이 되자고 했다.
그래야 다음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를 다시 외치며 길을 나설 수 있지 않냐며....

 

여행다녀온 자의 얼굴에서는 어떤 이유모를 아우라같은 것이 있음을 또 확인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늘마음농장 -- www.skyheart.co.kr에서 보세요.

 

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편지, 깜짝 여행을 다녀왔습니다.1탄.
+   [산골편지]   |  2011. 3. 17. 09:42  

2010년 5월 21일

 

살다보면 말이다 그 단어만 들어도 마음설레는 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여행이 아닐는지.
최소한 나는 그렇다.

 

여행’이라는 그 말만 들어도 울렁울렁 가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귀에서는 알 수 없는 이명으로 생각을 바로 세울 수가 없이 만든다.
입에서는 앵무새처럼 같은 노래의 후렴을 반복하고 있고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주위 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다만, 이 몸뚱아리 제일 꼭대기에 올려진 머리에서 그 단어만 떠올려도 완전자동으로 그런 반응이 이는 것은 무엇일까?

 

아들 선우랑 그의 표현력에 혀를 내둘렀던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이 몇 문장에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 여행이 주는 그 사유의 폭과 깊이, 그리고 빛깔에 대한 것이 죄다 들어있다.

정말 그렇다.
눈앞에 보이는 것과 나의 머릿속 생각 사이에는 기가 막힌 관계가 있다.


새로운 장소에 나서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생각과 문제의 실마리가 스스로 풀려버리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여행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침튀기는 것처럼 이렇게 침을 튀기고 있다니.....

딸아이 주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기숙형 울진고등학교에 들어가다 보니 2주일에 한번 집으로 온다.


산골로 오는 날은 빨리 산골로 가자고 운전도 재촉하고, 읍에서 장을 보거나 목욕을 하는 시간도 아까워 하는 아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기숙사에서 나오는 날이 가까워 오면 분주해진다.


아이 오는 날은 되도록 볼일을 안만들고, 되도록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려고 용을 쓴다.

이번 주는 더더욱 그랬다.


딸 주현낭자가 여행을 가자고 중간고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 석가탄신일인 연휴를 찍어 놓았었다.
오빠는 고3이라 어렵겠지만 아빠랑 모두 같이 가고 싶다는 마음을 밝히고는 울진고등학교 기숙사로 들어갔었다.


공부할 때는 열심히 공부하고 나머지는 여행으로, 그리고 책으로 정서를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이란 책 다음으로 스승이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기회만 있으면 귀농 전에도 여행을 다녔었다.
그런데 정작 귀농할 때 애들이랑 약속한대로 외국여행을 많이 다녔으니 국내여행에도 더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아이 입에서 스스로 여행이라는 단어를 발사했으니 다행이지 싶었다.

아이가 울진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고 우리 부부는 농사를 재촉했다.


새점밭에 남은 농사를 끝내려고 삽질을 하고, 비닐을 덮고, 고추를 심는 등 강행군을 했다.
딸아이와 편안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입에서 헉헉 소리가 날 때마다 그 후렴으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를 이빨 사이로 흘려보내며 힘든 순간을 웃으며 보낼 수 있었다.


여행은 떠나면서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여행을 떠나기 전 그 날을 향해 나아가는 나날 조차도 행복으로 가득차게 만드니 대단한 위력이다.

 

 

 


(▲ "주현아, 구슬 아이스크림 먹다 살찐다..." 라고 하는 것같은 표정의 초보농사꾼. )

귀농하고 약속대로 해마다 외국여행을 갔었다.


온가족이 1년 동안 농사지은 것으로 떠나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단물이었다.

그런데 아들 선우가 고1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중단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고딩이고 뭐고 그런 여행도 공부 만큼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예전처럼 가려고 했는데 문제는 우리 아이로 인해 다른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간다면 그건 생각해 볼 문제였기 때문이다.

 

내 아이야 결석으로 인해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뜰 마음이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을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은 고1이 되는 겨울방학 때 다녀온 이후 지금껏 가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주현낭자가 여행 운운을 해서 선우를 두고 셋만 가려니 발길이 무거웠지만 연휴기간에도 전교생이 학교를 가는 선우를 두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계획 없이, 목적지 없이 떠나기로 했다.


처음에는 전라도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만 했는데 주현이가 강원
도 운운을 해서 출발 전날 강원도로 간다는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는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검색을 하라고 하고는 다음 날 우린 운전대를 잡았다.


원덕에서 아점을 두 박씨는 물회를 먹고, 난 회덮밥을 먹었다.

 

 

 


(▲ "아가야, 그 긴 옷은 어찌하여 앞으로 그렇게 입었느냐? " 한참 후에야 아참 옷을 제대로 입어야지 하는 주현 낭자)

운전을 하면서 서로 상의를 해가며 제일 먼저 간 곳이 대관령 양떼목장이었다.

 

주현이는 오랜만에 집으로 온 어제 늦도록 아빠와 차 마시며 이야기하느라 늦게 자서 차 안에서 잠을 잤다.
잠을 깨고 내리니 날씨가 엄청 더웠다.

 

주현이는 애들처럼 구슬 아이스크림에 눈길을 준다.
아이스크림이 녹을 정도로 찌릿한 눈길을 주기에 2천원주고 상표도 없고 그냥 이름이 구슬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을 사주었다.

 

저도 먹고 아빠 입에도 한 입 넣어드리고 ...
불량식품처럼 보인다며 사주기를 꺼리는 엄마에게도 한 입을 건네는 주현이...

 

양떼목장으로 모인 인파는 대단했다.


우선 줄을 한참을 서서 기다린 다음 드디어 입장.


입장료는 3천원 도합 9천원을 내고 입장했다.

그런데 어디를 둘러봐도 멀리서 보이는 약간의 양떼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양떼가 없다.


그럴 리가...

내가 상상한 양떼농장은 이름만으로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양들이 겁나게 많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멀리에 보이는 양떼말고 허름한 막사처럼 생긴 곳 안에 들어앉아서 입장객이 주는 건초만 죽으라 먹는 양들밖에는 다른 모습은 없다.

 

우선 반들반들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 돌았다, 다시 올라가도 처음엔 멀리서 보였던 일단의 양들이 다였다.
그 양들은 ‘너무 먼 당신‘


초보농사꾼과 난 놀랐다.
그리고 한참 멀리에 있는 양을 보러 온 인파가 그렇게나 많다는 것에 더 놀랐다.

 

 

 

 


(▲ 너무나 먼 그대들... 카메라의 렌즈를 당겨서 당겨서 이나마 볼 수 있는 그대들...)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입장료는 받지 못하고 건초 값으로 대신하는 3천원으로 모두들 양들에게 건초를 주러 갔다.

그러나 그 우리 안의 양들은 멀리 언덕에 있는 양들보다 몸들이 엄청 뚱뚱했다.


순간 우리 식구들만이라도 건초를 주지 말자고 했다.
거기에 갇혀 진종일 관람객의 건초를 받아 먹어야 하는 양들을 위해....

 

목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며 우리가 섰던 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 드물다 보니 이런 곳으로도 사람이 몰린다고...

 

외국의 경우는  체험도 하고, 즐기고, 사색을 할 수 있는 곳들이 잘 발달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경치 좋은 곳에 모여서 고기를 구워먹는 곳으로의 발길이 더 빈번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허탈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곳 주차장가에서 파는 양고기꽂이구이에 눈을 두는 주현낭자를 위해 하나 사주었다.

이제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길을 나섰다.


길에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기분이 드는 것이 여행이 아닌지.
또 딸아이를 위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 우리 모두를 위한 ‘길 나섬’이니만큼 서로 마음을 구름처럼 가볍게 먹고 길을 달렸다.

다음은 주현이가 가보고 싶어했던 ‘허브나라 농원’으로 갔다.


봉평면에서도 한참을 좁은 길을 따라 가야 했기 때문에 오는 차, 가는 차들이 서로 정체를 보이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주현이는 입장마감시간이 5시라며 초보해했다.


그래서 말해주었다.
5시를 넘겨 못들어 가면 내일 가면 될 일이니 여행에서 초조감은 금물이라고 했다.

 

거의 5시가 다 되어 입장을 했다.
입장료는 우리 모두 5천원씩이었다.

 

허브나라 농원은 대기업의 CEO를 지낸 이호순님과 그 부인이 1993년 흥정계곡으로 귀농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둘다 서울대 출신인 부부는 50이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 살자던 약속을 지켰다고 하니 그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허브농원.


농원 곳곳에서 아주 섬세한 이의 손길이 느껴져 입장료 5천원이라는 것이 그 가치를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초보농사꾼과 입을 모았다.

허브 농원은 테마별로 허브꽃들이 잘 손질되어 있었기에 우선 그랬다.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잘 생각할 일이다.
그 돈이 많던, 적던간에 말이다.

 

그러나 일일이 허브 꽃들을 가꾸고 배치하고 또 구경 온 이들 가슴에 어떤 추억을 남겨줄까를 고민한 흔적이 여실히 보였다.

 

테마별로, 자생정원, 요리정원, 약용정원, 차정원, 향기정원, 나비정원, 미용정원, 벚나무 아래, 새초롱마을, 세익스피어정원, 모네정원, 성서정원, 온실, 팔레트정원 등이 환하고, 아름답고, 이쁘고, 아기자기한 모습의 소품과 함께 손님을 맞이했다.

 

 

 

 

이 외에도 어린이 정원과 놀이터, 허브공예관, 허브 전시관, 허브 상품점, 파머스마켓, 터키 갤러리, 우리만화갤러리 만화의 숲, 야외공연장 별빛 무대, 허브찻집과 레스토랑, 팬션, 기념품점 등의 부대시설이 튀지 않은 모습으로 꽃들과 잘 어우러져 있어 농원을 구상하고, 설계하고, 가꾼 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주현이도, 초보농사꾼도 모두가 감탄을 연발했다.
주현이는 오빠와 함께 오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 할 정도로 이곳의 모든 것들을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꼭 좋은 풍경을 보면 친구들이랑 오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하는 것으로 보아 기숙사의 골수 친구(그들 표현대로라면 절친들이 걸리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내가 환장할 정도로 갖고 싶은 소품들이 너무 많아 사실은 가슴이 벌떡벌떡거려 애를 먹었다.
결국 그 가슴 벌떡임을 자제하지 못하고 손바닥만한 함석 물뿌리개를 하나 샀다.


내가 그것을 만지작 만지작거리자 초보농사꾼이 돈을 주었다.
쥐똥만한 물뿌리개가 만2천원이나 했으니 내 망설일수밖에...

 

농장의 이 많은 꽃들을 정리하고, 조경하고, 그리고 겨울을 나게 하기 위해서 손을 쓰고 할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 이런 볼거리를 만들어준 두 분의 대표에게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 분들은 자연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자연으로 돌아온 사람으로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작물을 가꾸고, 관리하고 겨울을 나고 하는 것을 해본 사람으로서 이 농원의 이 손질은 결코 입장료 5천원과 비교될 수 없는 값진 무엇이 있음을 느꼈기에 감사한 마음이었다.

 

허브나라 농원에서는 각종 허브도 화분으로 팔고 있어서 나도 화분 두 개를 사서 돌아왔다.
산골의 화분에 옮겨 심어 아이들이 주말에 올 때마다 눈으로 코로 허브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간혹 그 잎을 따서 부침이도 부쳐주고, 샐러드에 넣어주기도 하면 더더구 자연의 생명에 감사해 하겠지.
주현이는 허브 농원을 다녀왔으니 더 애착을 갖겠지.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아이들에게 일일이 아름다운 농원을 설명해주는 모습에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성이 들어간 볼거리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깊이, 깊이 해보았다.

 

우리 세 가족은 다음에 선우와 함께 한번 더 와서 보자고 하면서 봉평읍으로 달렸다.
우선 저녁을 먹고, 그곳 찜질방에서 잠을 자기로 했기 때문이다.


주현이를 목욕탕에 데리고 가야 하는데 산골에서의 시간을 더 갖고 싶어 하여 목욕탕을 못데리고 갔고, 나 또한 이래저래 바쁘고 온몸이 뻐근한 터라 불가마 찜질을 하고 싶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찜질방을 외치며 찾아나섰다.

 

그런데 읍의 어디에도 찜질방은 없었다.


결국 돌아다니다 돌아다니다 일단 포기하고 주현이가 좋아하는 갈비로 저녁을 먹은 다음 다시 원주로 향했다.

길에서 무엇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속상해할 이유는 없다.


봉평에서 잘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될 일이고 그런 아쉬움이 더 좋은 일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뒤틀렸다고 하여 모든 일이 부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일은 아니다.


특히 여행길 위에서는 더더욱...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어둠 속에서 원주로 향했다.


그런데 원주 번화가에도 찜질방은 없었고, 다시 물어물어 한참을 찾아간 곳에서 1박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찜질방에서 3가족이 잠을 자기는 처음이다.


초보농사꾼 이제야 가족을 구경 잘 시키고, 배를 든든히 한 다음 이제 잘 자리까지 마련해서인지 피곤함이 몰려오는 모양이다.

그렇게 캔맥주와 음료수를 앞에 놓고 세 사람이 오늘의 여행을 이야기했다.


양떼 목장은 목장대로 교훈이 있었고, 허브나라 농원은 농원대로 만든이의 정성과 땀과 사랑에 존경과 찬사를 서로 아끼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공중장소에서 경우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꼭 있다.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언성을 높이며 옆사람 생각 안하고 대단하단 듯이 말하는 사람 꼭 있고, 어린 꼬마들도 수두룩한 곳에서 자기들만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남녀 꼭 있다.
나이를 먹었건 시퍼렇건 예외 없이 그런 사람 있다.

 

 

 

그런 것도 겪어 보아야 그런 행동이 얼마나 옆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지 느낄 수 있으니 주현낭자에게 또한 교훈이었다.

우린 다음 날, 황금 휴일을 원주에서 잘 보내리라 믿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2부에 계속..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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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편지,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는 일
+   [산골편지]   |  2011. 3. 16. 15:56  



뒷말 없이, 날개 없이 떨어지는 복사꽃을 보며 나도 어떤 행위를 하면서 그렇듯 조건 없고, 뒷말 없어본 적이 있는가 되물어 본다.

대낮에는 땅에 코를 박고 내 얼굴로 흐르는 땀냄새를 양념으로 맡다가 부은 얼굴로 집으로 향하는 시간, 그 시간은 얼마나 가슴이 뿌듯한지 모른다.


요즘 비노바 바베의 말이 자주 생각난다.
“내가 말하는 명상이란 기도와 탈키(또는 차르카) 물레질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며, 탈키 물레질은 행동으로 표현한 명상이다”라고 했다.


그렇듯이 나 또한 대지에 코를 박고 챙 큰 모자 안이 우주인 듯 그 안에서 명상을 하고, 땀을 흘리다 보면 하루 해를 등지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여름안거를 마치고 나서는 스님의 발걸음만큼 가볍다.


그렇게 들을 내려와 집으로 향할 때 두 농부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아는체하는 개복숭아 나무.
뿌연 어둠이 내리는지, 돋보기를 많이 쓴 탓에 눈이 맛이 갔는지 눈깔빠지게 들여다 봐도 복사꽃의 선명함은 맛보지 못했다.


내가 그런 성실하지(?) 못한 처지로 바라보아도 연한 핑크인지, 인디언 핑크인지, 허여멀건 핑크인지 하는 복사꽃잎이 농부를 위해 하늘하늘 땅으로 자세를 낮춘다.


나도 누군가에게 뒷말없이, 조건없이 행동한 적이, 자세를 낮춘 적이 있는지 괜시리 미안스러워지는 밤이다.
오늘은 귀눈이 콩만한 복사꽃이 내 혼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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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하고 두 해인가 모를 심어봤다.
집이 딸린 6천평 땅 중에 세 다랑이나 되는 논이 있었다.


그것도 집 바로 앞 황금위치에...

논농사는 밭농사와는 달리 물에서 하는 일이다.


우선 봄에 모심기를 할 때면, 엉덩이를 하늘로 높이 치켜 세우고 모 몇 가닥을 다섯 손가락을 오무린 끝에 살포시 쥔 다음 땅에 박아야 한다.

이 때, 힘의 분배가 절정을 이루어야 한다.


너무 깊이 박으면 모의 모가지까지 물이 차서 죽게 된다.

그렇다고 힘을 빼서 꽂으면 내 손이 물 속을 빠져나오자마자 모도 얼떨결에 따라나와 수영장의 튜브처럼 둥둥 배회하고 다닌다.


내게는 수능만큼 어려운 모를 하나 심고 나서 다음 모를 심기 위해 발을 빼려면 논바닥 밑에 귀신이 달라붙어 있는지 도통 발목을 잡고 놓아줘야 말이지.

어찌어찌 허벅지에 힘을 주고 한 발을 빼면 그 옆 발이 안빠지네.


그렇다고 달랑 모 하나 심고 쳐들었던 엉덩이를 원위치시키고 직립 인간임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꼿꼿이 서서  발 빼는 작업에 있는 힘 다 빼고 언제 또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옆 모를 심는단 말인가.


그래도 자존심 하나는 꼿꼿해서 허리를 펴지 않고 눈깔빠지게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경배를 했었다.

난 모를 잘 심을줄 알았다.


왜냐 하면 난 손이 잽쌌기 때문이다.
단순 반복 작업이라면 손이 안보일 정도로 실력을 발휘해 왔던 전력으로 보아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내기를 하기 전 옷맵시부터 프로는 다르다는 되먹지 않은 생각으로 여물게 챙겨입고 의기양양하게 ‘논으로 돌진’이라는 초보농사꾼의 명령이 떨어지길 모가지에 힘주고 기다렸었다.


그러나 사단은 논에 들어가자마자 났다.
일단 들어가면 발이 빠져야 잰 손을 놀리든지 말던지 할게 아닌지.


어쩌다 발이 떨어진다 해도 물 속의 모간 간격이 영 어른거려 그것 눈대중치느라 또 분기탱천하던 사기는 논바닥에 패대기쳐지기 일쑤였다.

물밖 눈대중은 귀신인데 물 속 눈대중은 죽어도 안되었다.


르노아르는 장미를 그리다가 잘 안되면 장미꽃잎을 따서 먹었단다.
혹여 그러면 잘 그릴까해서란다.


그때 심정이라면 모라도 씹어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점점 사기는 떨어지고 하늘로 쳐든 엉덩이 중간은 부러질 듯 아프고 이래저래 내 맘대로 안되니 거의 논바닥에 얼굴을 닿을 듯 쳐내린 탓에 피가 몰려 건드리기만 해도 분수처럼 사방으로 피가 튈 것같았다.


혼자서도 내 자신을 수습못하고 있는 판에 산통을 깨는 쪽은 꼭 초보농사꾼이었다.
왜 옆으로 이동을 못하고 한 자리에 북박이라느니,

모심던 선우 엄마 뒷간 갔느냐느니...

다른 아주머니들도 웃겨 죽는단다.


안그래도 단순반복 작업을 잘한다고 되어 있는 나의 이미지에 금이 간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초보농사꾼까지 가세를 하니 그 말의 모서리에 찔려 논바닥에 박은 종아리에서 거머리에 물린 것처럼 피가 날 것같았다.

사실 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의 손놀림을 믿어왔기에 그 상심은 아주 컸다.


이쯤되면 눈에 세운 핏대와 자존심을 누그러뜨려야 하지만 그때만 해도 성질머리와 자존심은 뭣같아서 그러고도 논에서 오래 버텼다.

그 후로 난 논에 들어가지 않았다.


모심는 날이 닥아오면 나쁜 머리를 총동원하여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물 밖의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핏대를 세워가며 초보농사꾼 귀에 넣어주었고 단순한 그는 어렵지 않게 세뇌되었었다.


어쨌거나 논농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웃 할아버지가 당신이 들어갈 묘자리에 물길이 지나가면 안된다고 우리 논으로 들어오는 보를 막아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가 이사오기 전에는 멀쩡히 그 가묘자리로 물길이 지나가도 전 주인이 논농사를 잘 하셨다는데 우리가 뭣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는지 그런 일이 생겼다.


초보농사꾼은 말싸움이 싫어 논을 닫아 걸었다.
그것으로서 세 다랑이 되는 논은 논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봄이다.
야콘을 심고나서 고추를 심을 시기가 되면 겨우내 물기 없이 뽀송거리던 마을 논에 물이 찰랑찰랑거리게 된다.


그리고 논을 삶는다(논을 간다는 표현을 이곳에서는 이리 표현한다.), 모를 심는다 분주해진다.

올해는 보무도 당당하게 이웃분의 논에 모를 심어드릴까 생각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논 주인이 ‘거부의사’를 밝혀올까 두렵다.
혹여 예전 나의 실력(?)을 기억해내신다면 그럴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어렵다.


솔직히 모심는 실력은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니까.

내일은 야콘즙 포장작업이나 그 재다는 손으로 실력발휘해 가며 쌩소리나게 해치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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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귀농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편지,마가렛꽃과 같은 사람냄새
+   [산골편지]   |  2011. 3. 14. 19:00  



2010년 5월 5일

 

올해는 소광리에도 야콘을 심었다.


그곳에 이장을 맡고 계신 분과 작년에 인연이 되었는데 올해 같이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셔서 초보농사꾼이 하기로 한모양이다.

지금 현재는 매번 심는 호수밭과 답운재밭에 야콘을 심었다.


달밭은 농사가 잘 안되어 소나무를 심었고, 답운재밭의 일부도 길로 나가는 부분이 있어서 야콘은 안심고 감자를 심었다.

그리고 소광리에 농사를 지으러 오늘까지 딱 3일 다녀왔다.


책 원고가 마무리 안된 상태라 머리가 한가롭진 않았지만 인도의 비노바 바베의 말대로 노동의 환희와 노동의 기적을 알기에 초보농사꾼과 함께 빨간 원피스 작업복을 입고 빨간 장화 신고 나섰다.

그곳은 핸드폰도 안터지는 곳이라서 산골에 연락이 안된다며 걱정 전화를 주신 분도 계셨다.

 

사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하는 일은 신경이 배로 쓰인다.
나 혼자 하는 일이면 힘들면 쉴 수도 있고, 일이 있으면 내일 할 수도 있지만 함께 하는 일이란 기본적으로 더 마음을 쓰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울진읍에 일이 있어서 가야 했지만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소광리로 향했다.
난 일을 못하는줄 알고 오지 않을줄 알았다고 하신다.


일을 하든 못하든 같이 하는 일에는 무조건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가 한 일은 삽질.
진종일 삽질을 했다.


바람은 불어 흙이 날려 눈으로 코로 들어오고 삽 자체의 무게때문에도 팔에 쥐가 나는 것같았다.
손으로 빨리빨리 하는 일은 잘하는데...

 

난 쥐는 힘이 없어서 사실 무게에 무지 민감하다.
그렇게 무거운 것을 들고 하는 일은 배로 힘들어 한다.
그러나 어쩌랴.

 

누군 안힘드나 다 힘들지...
그러니 입을 꾹 다물고 하다보니 중간중간에 신음소리가 막 터져나온다.

 

그렇게 오늘까지 3일을 초보농사꾼과 나 그리고 이장님 부부 이렇게 열심히 일했다.
서로 마음을 챙겨주시니 힘든 일인데도 마음이 가벼웠다.

원래는 2틀 정도면 끝나는데 야콘씨가 남아 조금 더 심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러다 보니 5월 5일 어린이날에 달길님이 산골에 와서 포크레인을 봐주시기로 했는데 어쩌나 했다.

 

그래서 사실대로 일이 하루 더 해야 할 것같다고, 같이 하는 밭이라 빠지기 어렵다고 초보농사꾼이 말씀드렸더니 달길님이 괜찮다며 혼자 가서 하면 된다고...

 

그 일을 다 하고 소광리로 만나러 가겠다고 하셨다는 거다. 초보농사꾼에게...

안그래도 사람도 없는 집에서 혼자 우리 일을 봐주러 먼 길 오시는데 미안스러운 마음이었다.


소광리에서 일을 하면서도 핸드폰이 안터지는데 잘 찾아오실지...
전화로 위치를 알려드리긴 했는데 초보농사꾼이 걱정을 했다.

 

결국 일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핸드폰이 터지는 지역에서 전화를 했다.
달길님은  벌써 다 일을 하고 소광리로 우리를 찾아찾아 헤매셨으나 결국 우리를 못찾고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한다.
새 차인데 비포장길도 많은 그 멀고 먼 소광리길을 찾아왔었는데 못만나고...

 

어찌나 마음이 싸하던지...
직장인의 휴일이란 금쪽이 아닌지.

 

그런 분이 그것두 어린이가 있는 집에서 어린이날 집을 비우고 산골로 와서 포크레인을 손봐주시다니...
사람도 없는 집에서 혼자...

 

불영계곡의 바람도 내 미안한 마음을 알았는데 세차게 바람을 차 안으로 밀어넣어 주었다.
집에 도착해서 초보농사꾼이 내게 아침에 꽃밭에 물을 줬느냐고 한다.


아니라고...
그런데 꽃밭 군데군데 젖었다나...(혹시 나의 노상방뇨를 의심하는 것 아니것지.)

그리고 꽃밭을 보니 마가렛이 심겨져 있었다.


아차, 아까 소광리 이장님댁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달길님 부인(그러니까 우리 홈 아이디는 달의 노래님)이 전화를 하셨다.

달길님이 산골에 가는데 그 길에 마가렛을 보내려고 하는데 산골에 그것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없다고 하면서 어린이날 이렇게 달길님이 우리집 일 때문에 산골에 오셔서 어쩌냐고 하니까 남편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하면서 환하게 웃는다.
그 집에 어린이가 한 명 있는데...

 

그렇게 해서 산골로 오기로 되어 있던 마가렛.
그 하얀 꽃을 달길(김승하 님)님은 포크레인도 다 손봐주시고, 마가렛도 물을 주어가며 일일이 군데군데 심어놓고 가신 거야.

 

포크레인도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초보농사꾼이 산골에 도착하자마자 보더니 내가 옆에서 잔손을 거들었으면 그래도 편하게 했을텐데 내가 없이 혼자서 해야 하니 이렇게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플라스틱 통을 놓고 애를 먹으신 모양이라며 달길님께 고생하셨다며 전화를 건다.

그렇게 꽃까지 심어놓으시고 소광리 그 먼길을 우리 본다고 오셨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되돌아 가시는 생각을 하니 찡해왔다.

 

하얀 마가렛이 그 분의 마음처럼 깨끗하다.
이번 농사 일이나 급한 불 끄면 읍에서 함께 모여 저녁을 먹으려고 한다.

 

요즘 바람이 아주 세다.
그 바람 속에 사람의 향기가 묻어서 달려드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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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락방에서 귀농 아낙  배동분 소피아


 
 
        

 

귀농편지, 산골의 다락방 풍경
+   [산골편지]   |  2011. 3. 10. 17:35  



“그들은 그곳에서 살고, 창조하고 고통받았다.
스스로 택한 고독과 글을 써야만 한다는 긴박감이 언제나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글쓰기의 열정으로 집을 채웠고, 바로 그만큼 집을 사랑했다.
작가들의 삶에서 집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집은 작가들의 추억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의 불안을 달래주며, 사유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글은 내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작가의 집>이라는 책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헤르만 헤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버지니아 울프, 장 지오노, 장콕토, 윌리엄 포크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이 그의 작품에 그 집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다룬 책이다.

 

난 환장하듯 읽어내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닭꼬치처럼 엮여 있었기 때문에....

 

 

 

 

과연 이 유명한 작가들에게만 집이 그런 역할을 할까?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집은 그런 휴식처요, 창조의 산실이요, 사랑을 갈고 닦고 기름치는 정비소인 것이다.

나 또한 집이 그랬다.


처음 귀농한 집은 15평도 안되는, 눈만 씨게 흘겨도 금방 삐뚤어질 것같은 낡은 오두막이었다.
우리집에 오신 최용건 화백님의 표현으로는 김밥 옆구리가 터질 것같아 불안했다는 말씀을 하셨던 그런 오두막이었다.^^

 

 

 

작은 그 오두막은 어린 아이 앞에서도 맥을 못출 것 같이 힘없어 보였지만, 천만의 말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당당함과 노련함이 검으티티한 서까래 사이사이에 깃들어 있었다.

 

그 집은 지금 새로 지은 넓은 집보다도 더 위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흙방의 구들은 늘 가장인 초보농사꾼의 배려로 절절 끓었다.


갈라진 흙벽 사이로 바람이 들락거리며 공기를 바꿔 주었다.

집 안의 공기를 귀신같이 정화해 준다는 무슨무슨 공기청정기 유도 아니었다.


네 가족이 막 귀농해서는 아이들이 어렸고 적응기간도 있기에 그 작은 흙방에서 4식구가 누워 잤다.
그러고도 공간이 남았다.

 

그렇게 누우면 더 많이 갈라진 흙벽 사이로 별들이 혹여 산골가족이 낯선 곳에서 외로움을 탈새라 밤새 지켜주는 모습이 죄다 보였다.
그 흙집 덕에, 자연 친구들 덕에 이 낯선 곳에서도 마음의 언저리 관리를 할 수 있었다.

 

집은 그런 거다.
이제 새집을 지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 눈에는 지금 새 집이 번지르르하고 멋들어져 보이겠지만 난 사실 오두막에 마음이 간다.

오두막이 숭늉과 같은 맛이라면 지금 새 집은 스프 같다는 느낌이다.


오두막이 나무타는 냄새처럼 마음 한 자락을 아리하게 해준다면, 새 집은 원두커피 내릴 때의 냄새처럼 가볍게 향기롭다.

오두막이 구수한 사투리같다면, 새집은 똑 뿌러지는 서울 말씨 같은 느낌이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오두막은 내 눈물 속에 포크레인 몇 바가지로 사라지고 새 집이 산골에 들어서 있다.

새 집이 싫다는 게 아니라 오두막이 더 정스러웠고, 훈훈했었기에 지금도 가슴 한 자리에 그렇게 오두막은 들어앉아 있다.
얼마 전에 아이들도 나와 같은 소리를 했다.


가끔 오두막이 그립다고...
자연으로 돌아와 살다보니 아이들과 느낌이나 감동도 비슷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새 집을 짓게 되었을 때, 난 모양새나 구조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귀농 전, 내 성격 같았으면 일일이 참견을 했을 것이다

.
이건 요래야 하고, 저건 조렇게 구조를 해야 하고, 여기는 이 모양이어야 하고...
내가 1류 건축가처럼 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들어와 살다보니 겉모양새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뭐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결국은 초보농사꾼이 거의 모든 설계를 다 했다.


다만 한 가지 다락방은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했다.
글을 쓰고,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하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초보농사꾼은 나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었고 다락방은 그렇게 해서 얻게 되었다.

 

진중권님이


“나의 다락방은 콜라주 같은 것이었어요.
벽엔 신문을 발라 놓았는데 거기에 수많은 기사들이 있었죠.
그게 초현실주의적으로 다가왔어요.

사용되지 못한 물건들이 있고 같이 있을 수 없는 물건들이 뒤엉켜 있고 어딘가 마법적이었죠....”


라고 한 말을 책에서 읽었다.

 

나에게 있어서 다락방은 “안개꽃과 같은 존재이다”
안개꽃은 다른 꽃의 배경이 되어 주는 꽃이다.


저 자신이 돋보여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뒷배경이 되어주고 다른 꽃을 튀게 해주는 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다락방은 그렇게 편안한 방석처럼 내가 들어서면 나의 배경이 되어주는 공간이다.

 

내가 기도를 하고 싶으면 촛불의 은은함이 주위를 감싸도록 다른 빛을 자제시키고, 내가 명상을 하고 싶을 때는 다락방의 아주 작은 창으로 새소리만 통과시켜 준다.


내가 글을 쓸 때에는 열어놓은 창으로 솔바람을 실어다 주어 머리를 한없이 맑게 만들어주는 그런 공간이다.

 

그곳은 어떤 강렬한 마음도 자제시켜주는 진정제와 같은 약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낮게 낮게 마음을 주저앉히라고 이명처럼 속삭여주는듯하다.


결코 가볍지 않은 분위기가 있는 자그마한 공간이다.

다락방은 노오란색 계단에서 시작된다.


노란 나무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다 오른쪽 벽면으로 머리를 돌려 보면 내 표현으로는 ‘아기자기한’ 우리 언니들 표현으로는 ‘조잡한’ 소품들이 걸려 있다.


주현낭자 어려서 사진도 걸려있고, 꼬맹이 선우가 내복바람으로 책읽고 있는 모습도 걸려있어 오르내릴 때 그 사진을 눈에 넣으며 씩 웃곤 한다.

그리고 내가 자지러지게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은은한 소리를 내주는 풍경들이 몸을 벽에 바짝 기대고 있다.

 

 

 

한 계단씩 올라가며 하나하나 들여다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그렇게 올라가는 계단 끝마다에는 시어머님이 평생 자식처럼 아끼셨던 수석들이 새까맣고 뺀질뺀질한 얼굴로 나와 앉아 있다.

어머님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가지실 정도로 수석에 베테랑이시다.
그렇다면 그 분의 외아들인 초보농사꾼의 수석을 보는 안목은???


예전에는 짱돌이라고 해서 어머님께 지청구를 먹었는데 요즘은 변별력이 쬐금 나아졌다.

계단을 다 올라가면 친정 엄마가 쓰셨던 재봉틀이 보인다.


아마 일흔 살 이상 잡순 분들은 재봉틀과 미싱이라는 말을 혼용했던 것으로 아는데 내 어설픈 기억으로는 후자가 더 많이 그 세대분들 입에 오르내린 것으로 안다.

 

 

 

재봉틀 알맹이는 내던지고 다리만 남겨놓고는 그 위에 칼라 유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콘솔이다.

그 위에는 사진액자와 동물농장 모습이 그려져 있는 도자기가 있다.


신혼 때 선물로 받아 지금껏 들여다 보며 침흘리는 것인데 그 미니 도자기 속 그림이 어찌나 풍요로워보이던지...
결국 그쪽으로 나의 삶이 선회할 줄이야.

 

그 옆은 키작은 책꽂이가 새색시처럼 수줍게 앉아 있다.
다락방에도 거실처럼 책꽂이를 아예 집지을 때 짜 넣으려고 했는데 다락방이라 그 무게가 겁나서 포기하고 달랑 이 작은 책꽂이로 만족하고 있는데 볼수록 소박하다.

 

내가 좋아하는 법정 스님, 박완서님 책 등이 들어 앉아 있다.
그리고 다락방에서 제일 많이  뭉개는  책상과 의자가 있다.


이것들은 친정 부모님의 원대로 서울에 말뚝박고 사는 언니가 혼자 쓰기에 좋을 거라며 준 것인데 다 좋은데 내가 숏다리라 발이 편안하게 바닥에 닫지 않는 게 흠이었다.ㅜㅜ

결국은 망설임 없이 톱을 들었다.


그리고는 의자의 다리 길이를 과감하게 잘라냈다.
소가지 없는 짓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 쓰기 편하면 되는 거지 모양은 뭐 말라비틀어진 모양???‘이라는 후렴을 붙여가며 톱질을 해댔다.

 

 

 

그렇다면 내 앞의 의자도 잘랐느냐?
아니다.


그 자리에는 주로 롱다리가 앉을 확률이 높다는 판단에서 내 의자 다리만 절단냈다.

거기에 앉으면 오른쪽으로 난 창으로 소나무 싶이 내 옆구리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이 들어오고 눈을 조금만 내리 깔면 나무장작이 쌓여 있다.

 

보일러 주둥이로 들어갈 번호표를 받아들고 대기중이다.
그들이 대기하는 모습에는 인간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조바심이 없다.

 

이 책상과 붙어 있는 곳에 풍금이 있다.
날카로운 피아노소리와는 달리 풍금소리는 고동소리처럼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울림이 크다.

 

 

 

 

책상 정면으로는 기도하는 자리가 보인다.
이 낮은 자리에 앉을 때야말로 신과 내가 가장 가까이서 투명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순간이다.

 

초에 불을 댕기고 살포시 눈을 감으면 마음에도 은은한 그 빛이 내리 깔려 어느새 내 몸은 따사로운 들판을 걷는다.
이 순간에 자리를 함께한  '침묵'과 '고독'과 '외로움'이 나를 키우는 퇴비가 된다.

 

피타고라스는 “침묵하라. 아니면 침묵보다 더 뛰어난 말을 하라‘고 또 다른 정리(?)를 해 주었듯이 난 뛰어난 말을 할줄 모르니 침묵해야 하지만 말해야 할 때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는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자신에게 물을 일이다.

 

 

 

그리고 뒤로는 홀로 앉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의자가 하나 있다.
주로 봉사처럼 눈감고 앉아 나를 훑어보는 살벌한 시간을 갖는 곳이다.

 

작은 다락방 구석구석으로 영혼을 데리고 순회하다보면 아주 까만 밤이 주위를 감싼다.
이제 서서히 일어나 다락방 난간에서 통창을 내다보면 하늘에 쫙 깔린 별들이 앞 다투어 쏟아져 들어온다.

 

그 순간은 별의 그 날카로운 모서리에 정수리를 찔린 듯 정신이 바짝 들고, 뽕을 맞은 사람처럼 몽롱해지는 이중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뽕한 사람의 모습이야 영화에서 죄다 똑같이 연기를 하니 간접경험이라 할 수 있다)



 



평소에는 머리를 산발한 여자처럼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도 저녁에 다락방에 앉으면 어느 새 내 머리는 참빗으로 곱게 빗겨져 빛나고 있다.

 

 

내가 다락방이 그런 공간이듯이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


힘든 나를 대피시킬 수 있는 그런 공간.
그 공간이 좁든, 초라하든, 잡냄새가 나든 그건 상관할 필요가 없다.

 

내가 오두막에서 가장 많이 자신을 닦았듯이 눈에 보이는 모습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루를 전투를 치르듯 정신없이 산 자신을 토닥여주고, 위로를 해주고, 내일을 위해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그런 작은 공간이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락방에서 내려갈 때는 아랫배에 단단히 힘을 주고 내려간다.
그 아래는 또 다른 세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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